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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ㅣ 아셰트클래식 4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리스 포미에 그림 / 작가정신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모비딕]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을만큼 간단하다. 포악한 고래 모비딕을 그에게 한쪽 발을 잃어 복수심에 불타는 선장이 포경선을 이끌고 뒤쫓는다는 상식 수준의 진행 이상이나 이하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두꺼운 800p짜리 소설이 오래도록 고전으로 남았을리도 없다. 싸게 말해서 [모비딕]은 일종의 블록버스터다. 아니, 이걸로는 설명이 좀 부족하다. 블록버스터 무비들이 돈을 아끼지 않고 가상의 사건을 현실로 재현해내지만 [모비딕]은 그저 글자들의 나열만으로 이 모든 일을 해내니까. 또 돈이 아닌 작가의 인생을 쥐어짜 완성해냈으니까.
아마 지금에 와서 어떤 작가지망생이 [모비딕]의 장엄한 서술을 재현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가능성을 떠나 시도 자체가 뻘짓일 것이다. [모비딕] 곳곳에 삽입된 사건의 기승전결이나 맥락과는 무관한 생물학적/박물학적 지식이나 포경업에 대한 보고서들은 글로 된 텍스트나 작게 첨부된 삽화 외에 먼 바다의 고래라는 괴물을 접할 길 없던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 시대에만 가능했고, 지금 와서 재현할 의미도 필요도 없을 백과사전식 묘사가 가득하다. 포경업에 종사했던 멜빌의 과거와 어떤 자료든 단 한줄이라도 고래와 관련된 책은 모두 섬렵했다는 집착은 이 시대에서는 위키피디아와 다큐멘터리 채널로 대체되리라.
그렇다고 해서 [모비딕]의 문장들이 현 시대의 영상매체에 뒤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이제야 그릇을 만들 때 플라스틱이든 유리든 어떤 소재로 얼마든 찍어낼 수 있지만 오래고 오랜 옛날 장인이 흙을 고르고 섬세히 구워낸 자기와 비교할 카테고리가 애초에 아니지 않듯이. 골동품의 재현불가능함이란 그보다 나은 내구성따위의 기술력이나 투자금액이 아닌 이제껏 지나 온 인생을 한 작품으로 되바꿔놓는 그 집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의식이나 시대정신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질 거라 본다. 책에 담긴 막대한 고래학에 대한 정보량과 서술에도 불과하고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 그려지는 모비딕과 주술적 미신으로 예정된 운명이 포경선 피쿼드 호를 지배해나가는 그 과정은 어떤 방향으로든 해석될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러나 [모비딕]은 이처럼 어떤 소설에든 적용될 수 있는 방식을 떠나 이 매체 자체를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다. 침대 위에 누워 방안에서 책을 읽는 자에게 깊은 바다 속에서 살아숨쉬는 고래를 글이라는 투박한 방식 하나만으로 온전히 재현해보이겠다는 야망만큼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도전에 성공했다는 사실만큼 이 소설 [모비딕]에 주목케하는 무언가는 없다. 장엄, 그리고 또 장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