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Alexandre Desplat - Moonrise Kingdom (문라이즈 킹덤) (Soundtrack)(CD)
Alexandre Desplat / Abkco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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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 앤더슨을 좋아한다. [다즐링 주식회사]나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은 멋진 영화고 [로얄테넨바움]은 최고다. 하지만 조금 말하기 부끄러운 취향이지 싶다. 어느 책에선 힙스터 찌질이들의 감성의 영화감독이라고 했던가. 맞는 말이다. 아직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아니 벗어나지 못한 중산층 이상의 어른이 찌질대고 찌질대고 하염없이 찌질대다 결국 가족으로 회귀하는 작품만 만들어내니 웨스 앤더슨 취향에 일종의 어리광이 남아있음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번 [문라이즈 킹덤]은 어떨까? 1960년대의 미국 지방 스카웃 캠프장을 무대로 온갖 사랑스러운 소품과 색감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이전까지의 경향이 살짝 비틀려 나온다. 이제까지 웨스 앤더슨이 아이 같은 어른들을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어른 같은 아이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등장하던 못미더운 어른들 사이에 듬직한 꼬마들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줄줄이 사탕으로 사건을 이끈다.

 샘은 부모님을 잃고 위탁가정에서 자라 온 아픔이 있는 소년 스카웃이고 수지는 어머니의 불륜과 반항아 취급에 진절머리가 난 아이다. 샘과 수지는 서로 펜팔을 나누며 아픔을 공유하다 여름의 야영캠프를 탈출, 사랑의 도피를 약속한다. 야영 지식이 뛰어난 소년과 가족이 너무 미운 소녀가 펼치는 사랑의 도피행각은 아마 이제까지 웨스 앤더슨의 영화 중 가장 성숙하고 책임감 가득한 행보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소년과 소녀의 도피에서 적잖은 유치함과 꽤 많은 촌스러움이 돋보이고 이는 영화의 향을 돋구는 최고의 조미료가 된다. 회의와 비아냥이 미덕이 된 21세기에 주인공 샘과 수지와 같은 인물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웨스 앤더슨이 주로 다루어왔던 힙스터 찌질이 청년들의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1960년대의 복고라는 무대와 어린아이인 주인공은 이 낯간지러운 어른스러움에 대한 훌륭한 핑계거리가 되어준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홍보문구는 어떤 의미에서 적절했던 셈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애초에 동화는 아이들을 위한 뽀르노다. 그렇다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역시 뽀르노를 곱상하게 말했을 뿐이란 게다. [문라이즈 킹덤]은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훌륭하게 동화의 기능을 수행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믿음직스럽고 훌륭한 야영기술로 어디서나 생존이 가능하며 이 여행 도중에도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멈추지 않는다. 어른들은 그저 무력하게 이 아이들의 뒤꽁무니나 겨우 쫓을 뿐이다. 부모 없이 자립가능한 아이들만의 삶은 당연 아이들의 뽀르노다.

 하지만 [문라이즈 킹덤]은 어느 순간 타협을 하고 만다. 어른같은 아이에서 아이같은 어른으로 포커스가 옮겨지면서다. 아이들의 욕망은 어느새 어른들의 철들기로 뒤바뀐다. 흥미롭던 동화의 구조가 잊혀지고 한심한 어른들이 제 위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생각해보라. 뽀르노를 보는데, 예를 들어 섹시한 새댁과의 은밀한 정사가 등장하려는 찰나에 무능한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 무너진 가정을 복구하겠다며 용서를 빈다면 얼마나 분위기가 식겠냔 말이다. 상남자 샘과 강단있는 수지가 어른들의 손을 붙잡는 순간 모든 것이 깨진다.

 결국 60년대의 판타지가 21세기의 이성에 굴복하고 만다. 가출한 소년소녀가 야생에서 살아남는 결말을 원한 것까지는 아니다만 이 권력관계에는 문제가 있다. 비슷하게 아이들끼리의 가출을 다룬 [클라우디아의 비밀]은 이들이 가출한 이유가 어른과의 정당하고 동등한 거래를 통해 회복이 되었고, 아이들이 고립된 상황에서 생겨나는 광기를 다룬 [파리대왕]이 어른의 개입에 부숴진 반면 [문라이즈 킹덤]은 못미더운 어른의 부족한 자기성찰과 설득력 없는 고백에 당당한 아이들이 백기를 내리고 끝이 난다. 웨스 앤더슨은 결국 끝까지 어른같은 아이가 아닌 아이같은 어른으로 남고만 것이다.

 

 

덧//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랑스러운 인물과 소품, 색감으로 모든 단점을 용서하게 만든다.

원래 예쁜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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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D]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이세야 유스케 출연 / 기타 (DVD)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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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펑펑 울며 봤다. 두번인가 세번인가 봤는데 다 울었다. [자학의 시]도 봤다. 그럭저럭 괜찮았다. 관련 리뷰를 옛날에 읽은 적이 있어서 마지막의 감흥이 덜하기는 했지만 좋은 작품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집]을 봤다. 이때부터 슬슬 이게 뭔가 아니지 않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세 작품은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던 한 여성이 인생 다 그런거 아니냐며 쇼부치고 끝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나는 세번이나 이 판 박힌 패턴에 농락 당한 뒤에야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야. 퉁칠 걸 퉁 쳐야지.

 위 세 작품을 보는 도중 불편함을 없던 것은 아니다. 이 작품들을 깔 수 있는 방향이 대부분 꼰대스러운 방식으로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쨌든 펑펑 울기는 했으니까 뭐라 말은 못하겠어서 침묵하고 있었지만, 비록 나의 논리가 꼰대스럽더라도 가려운 곳은 긁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나 [자학의 시], [우리집]의 등장인물들의 슬픔과 눈물이 사실은 기쁨과 웃음이라고 느낀다. 그들이 받는 아픔만큼 그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그들은 비극적인 현실을 견디어낸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현실을 향유하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자백을 하자면 나 역시 그 고통을 쾌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가.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마츠코라는 한 여성이 수많은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거나 버림 받거나 이용 당하거나 죽어버리던가 해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한 여성이 애정관계에 있을 법한 대다수의 불운을 다양하게 섭렵한다. [자학의 시]는 깡패 남편과 자신을 사랑하는 식당 주인의 가게에서 일을 하는 아내의 일상을 다룬 4컷 만화-영화화도 되었다-로 거의 매 에피소드마다 밥상 뒤집는 장면이 명물처럼 등장할 정도로 가정내폭력이 일상처럼 다뤄진다. [우리집]은 가난한 마을의 3남매의 이야기로 위 두 작품과는 달리 어린 소년이 주인공 역을 맡았으며 돈독한 가족상이 그려지지만 뽕 맞고 칼 휘두르고 삥 뜯고 폭력의 강도는 가장 강하다.

 처음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봤을 때는 마냥 새롭기만 했는데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을 세 개나 보니 그냥 하나의 패턴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다. 아니, 패턴이나 클리셰를 가진다는게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단 어떤 전형이 있음을 모르고 봤을 때와 알고 봤을 때 느낌이 100%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작품들 모두 고통 받는 여성이 있고 괴롭히는 남자가 있으며 고난으로 가득 찬 삶과 그렇지만 알고보면 따뜻한 세상에 숱한 상처에도 웃음 짓는 여성의 웃음으로 끝이 난다. ([우리집]은 소년이긴 하다) 여기서 묻고 싶은건, 그럼에도 웃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에 웃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있고 그 남자를 바라보며 그래도 알고 보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다워 운운하는 모습을 보면 가정내폭력을 정당화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는 불륜에 주먹질에 강제적인 성매매에 폭력 한번 버라이어티하고 [자학의 시]에서는 자기를 강간하려고 한 식당 주인과 별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지내지를 않나 [우리집]은 여성 주인공인 누나는 그나마 겪은 풍파가 잘 묘사되지 않지만 동생들은 약하고 뿅가고 난리도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미소와 희생 뒤에서 증발하고 만다.

 나는 저들의 사랑이 과연 사랑인지도 의심스럽다. 많은 남성향 작품들에서 여성들이 한명의 인간적인 주체가 아닌 악세사리처럼 주변의 질시와 흠모를 받기 위한 쟁취의 대상이 된다고 지적을 받듯이 이 작품군에서 남성들의 위치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어떤 주체적 인물로는 다뤄지지 못한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여성들이 소유해야 할 존재로 대상화가 되는 것과는 달리 남성들은 하나의 비장미를 이끌어내는 풍경처럼 주인공과 그 주변을 맴돈다는 정도일 것이다. 무수한 불행들 중 하나로 말이다.

 저들의 삶이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희생은 그것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 손에 꼽히게 윤리적이자 아름다운 행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희생이라는 것이 일종의 쾌락의 도구로, 악세사리로 이용된다면 그게 정녕 희생인가? 애초에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도 불분명하지 않은가?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기 위해 주변인물들을 가해자의 위치로 유혹하기까지 한다면 그것이 진정 피해자의 위치일 수 있을까?

 '저년이 꼬신거야! 저년이 나빠!'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랬기에 그들이 그런 아픔을 겪었다는 인과적인 문제를 거론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폭력을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일곱글자 뒤에 숨겨놓고 그에 대한 저항을 정지한 자포자기와 미화화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도피가 아니냐 묻고 싶은 것이다. 그 미소 뒤에는 가해자의 폭력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자처하는 모습마저 숨겨져 있다. 이것이 인생을 긍정하는 것인가?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길인가?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너무나도 기쁘다는 듯이 불운을 탐미하는 저들의 쇼의 관객이, 혹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들어내는 범죄의 공모자가 되고 싶지 않다. 파국도 구원도 없이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며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 말하는 것에서 무력함만을 느낀다. 파국도 구원이 없음을 미화하는 것은 파국도 구원을 기대하는 것보다도 끔찍하고 황폐한 풍경이다. 삶의 구원은, 그러니까 자신의 과오에 대한 긍정과 용서는 저렇게 불의와 일그러짐에 대한 응시를 포기하고 타성에 떠밀려 자신을 희생자라 마스터베이션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위치에 있다. 멋대로 쇼부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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