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조작’된 삶,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
남자는 평생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다닌다는 속설이 있다. 통속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파생된 이야기일 테지만 아이러니하다. 이미 어머니와 관계가 없는 아들 자신의 연애에 어머니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개입한다. 따뜻하고 가정적이며, 요리를 잘하고 때로는 위로가 되어주는 여자를 바라는 마음 한편에는 (실재든, 상상이든) 언제나 ‘어머니’가 존재한다. 여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든든하고, 멋지며, 어떤 일이건 이해해줄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여자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존재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전 세대의 정신에 영향을 받고, 그것은 유산이 되어 다음 세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연애도, 관계 역시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놀라게 한 흉악범죄자의 이면에 불우한 어린 시절이 존재하고, 성공한 사업가의 인생에 닮고 싶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가르침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가며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행동에서 부모님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놀라워한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우리는 많은 부분을 우리 부모가 했던 방식에서 힌트를 얻는다. 호랑이가 지난 자리엔 가죽이 남고, 앞선 세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우리가 남는다. 그것이 성격이건 생각이건 취향이건, 인생 그 자체이건 간에.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선택’을 한다. 아니, ‘선택’ 된다. 어떤 드라마나 소설에서 죽은 부모의 복수를 위해 칼을 들고 총을 쥐는 그런 ‘복수자’로 우리는 선택되기도 한다. 자신이 아닌 부모를 위해 분노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이야기는 어디에서건, 얼마든지 있다. 복수는 때때로 더 무서운 복수를 낳고, 이따금 어떤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부모’로 인해 인생이 부정된다. 조작된다. 그렇게 삶을 빼앗긴다.
이 글은 그 빼앗긴 삶에 대한 이야기다.
* 그 순간 그녀는 느꼈다. 이 아이의 우주에 어른의 삶이 난폭하게 침입했으며, 그로 인해 이 아이 역시 기진맥진해 있다는 사실을. / 22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연애 소설이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또 추리소설도 아니었다. 거짓된 관계에서 출발했으니 엄밀히 말해 연애는 아니겠다. (물론 그것 또한 누군가의 애정 방식이라면, 이 소설은 훌륭한 연애소설이겠으나) 이 글은 단순히 남녀간의 이런저런 사정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부터 ‘복수’를 꿈꾸며 준비해온 프란츠, 그 프란츠에 의해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 당한 소피의 관계는 해석에 따라 ‘연애’로 보일 여지를 주지만 연애로 읽을 수 없는 코드가 곳곳에 존재한다. 프란츠의 욕망은 소피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소피를 원하는 것도, 그녀를 수렁에 몰아넣는 것도 모두 그녀를 향한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완벽하게 증오하는 편에 가깝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 모든 순간을 인내하고, 그토록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며 소피의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지만 프란츠는 소피를 보는 것이 아니다. 프란츠가 보는 것은 소피가 아닌, ‘어머니’다. 자신이 사랑한, 자신을 사랑했다고 믿은, 그러나 자신이 지켜주고 돌봐줄 기회도 없이 자살해버린 어머니.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프란츠는 소피를 복수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그녀의 모든 인생을 조작한다. 본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거짓이 되고, 거짓 정보들은 진실이었던 것처럼 스며들어 소피를 온통 뒤흔든다. 프란츠는 꼼꼼하게, 소피를 조작한다. 조종에 가까운 행위를 통해 소피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죽음에 내몰고, 숱한 사람들을 죽인 연쇄 살인범이 되어 끝내 자신의 이름과 모든 정보들을 부정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가짜 이름을 만들고, 가짜 서류로 가짜 남편을 만나 가짜 인생을 산다.
소피는 소피가 아니다. 우습게도 프란츠 역시 프란츠가 아니다. 소피는 프란츠에 의해 삶을 박탈당했다. 프란츠 역시 자신이 아닌, 오로지 어머니 그 하나만을 위한 복수를 꿈꾸는 프란츠에게도 ‘인생’은 없다. 둘 중 누구 하나 ‘진짜’가 없다.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가 가진 아이러니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그 모든 아이러니를 프란츠가 가지고 있던 낡은 ‘웨딩드레스’를 통해 담담히 풀어낸다.
* 프란츠는 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참고 넘어간다. 그렇다. 그는 착한 남편이다. / 284
* 그에 대한 증오가 너무 강렬하여 때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럴 때 프란츠는 하나의 관념 같은 것이 된다. 어떤 개념. 그녀는 그를 죽일 것이다. 지금 그를 죽이고 있다. / 354
개인적으로 피에르 르메트르는 내게 썩 좋은 작가가 아니다. 알렉스를 읽을 때에도 애를 먹었고 (다 읽고도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 전 고백) 이번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 역시 읽는 내내 상당히 싸워야 했다. 취향의 문제겠지만, 가벼운 문장에 비해 잘 읽히지 않고 심리묘사에 치중한 전개 방식 때문에 끔찍하리만큼 지겨운 대목들도 더러 있다. (책은 물론이고 텍스트 그 자체에 엔간히 편견은 없으나, 사실 재미는 없다. 끔찍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어떻게든 피에르 르메트르의 책을 끝까지 읽게 되는 것은 (이 또한 아이러니지만) 그 심리묘사 덕분이다. 읽을 때엔 사족 같고 (리뷰를 쓰며 다시 돌이켜봐도 대체 이런 묘사가 왜 필요했던 건지 납득이 도저히 되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긴 하다) 지겨워서 발목이 몇 번이나 덜컥덜컥 잡히는데도, 어떻게든 읽게는 된다.
이것은 피에르 르메트르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 그토록 지겨웠던 심리묘사는 어느 지점을 기해 놀랄 정도의 이입을 끌어내고, 캐릭터의 그 어떤 행동도 이해하고 납득하게 만드는 토양이 된다. 프란츠가, 또 소피가 왜 구태여 그런 선택을 하는 지에 대해서 작가는 충분한 설명을 소소한 행동이나 생각 등을 통해 충분히 배치를 해둔다. (이 점은 리뷰 전작인 알렉스가 절정이라고 생각하나, 이 부분은 알렉스 리뷰를 위해 패스한다.) 때문에 지겨웠던 이야기가 절정부에 접어들면, 오히려 그 지겨웠던 심리 묘사들로 인해 캐릭터를 이해하며 빠져드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이야기의 결말에 (알렉스 또한 그러했지만) 의외로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피에르 르메트르의 글이다. 프란츠를 이해하고 소피를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그 아이러니마저도 우리 삶의 일부였노라고 납득하게 하는 그것.
* 그것은 그때까지 내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든 일들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난 가까스로 그 일을 해냈지만, 그 일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 아이와 함께 내 안의 무언가가 죽어버린 것이다. 내 안의 무언가…… 그것은 그때까지 내 안에 아직 살아 있던 어떤 아이였다. / 256
결론을 말하자면, 프란츠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프란츠의 복수는 온전히 프란츠의 것이 아니며, 그토록 해명 받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과거’는 오히려 그를 파국으로 내모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소위 ‘멘붕’이라 하던가. 문자 그대로 멘탈이 붕괴된 상황까지 내몰리고 난 후에야 프란츠는 소피에게서 그토록 바랐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증오가 강렬하여 오히려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소피는 죽어가는 프란츠를 묵묵히 돌봐주고, 그 장면은 우습게도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평화롭다. 그 모습이 어쩌면 ‘진짜’ 둘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건, 그때 그곳에 있던 건 진짜 ‘프란츠’였고 ‘소피’였다. 모든 것이 밝혀진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진짜’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던 그때.
삶은 그제야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제야 삶이 된다. 진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