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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이토록 불편한 식사, <디너>










불행은 늘 함께할 누군가를 찾는다. 불행은 결코 침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혼자 있을 때의 그 기분 나쁜 침묵을. (p.13)




사랑은 옳다. 적어도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배워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 ‘아낌없는 애정’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 누가 부정적인 평가를 할까. 우리는 살아가며, 사랑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또 그 외에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먼 나라의 아이들에게도 우리는 이따금 사랑을 느끼고 연민을 가진다. 

사랑은 언제나 옳다. 그러나 이따금 그 옳고도 바람직한, 누구에게나 당연한 자연스러운 감정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할 때가 있다.


우리가 사랑에 눈이 멀었을 때, 사랑은 ‘독’이 된다.

독성을 띤 사랑은 더 이상 바람직하게 권장되어야 할 인류보편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때때로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전혀 관계없는 이의 목숨을 ‘충동적으로’ 앗아갈 정도로.



불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은 ㅡ 자연의 폭력이든 인간의 폭력이든 상관없이 ㅡ 도저히 참을수 없을 것이다.



글은 주인공인 파울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어디에서나 봤음직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가장. 그것이 파울의 표면적인 모습이다. 전직 학교 선생님,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하나 있고 세 사람이 꾸려가는 가정은 겉으로 보아서는 문제가 없다. 다음 수상 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는 세르게의 동생이며, 형님에게 다소 껄끄러움을 가지고는 있으나 형님 부부와 함께 프랑스로 바캉스를 다녀오고 여유가 있을 때면 고급레스토랑에서 사적인 식사를 즐기기도 한다. 굳이 네덜란드가 아니어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가장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을 위해 아들의 핸드폰을 뒤져가며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다. 


파울도, 또 형님 부부도, 또 아내도, 아들도 겉으로 보아서는 어떤 문제도 없다. 음식이 가격의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나 정치가인 형님의 겉치레에는 모자람이 없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파울은 형님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한다. 이 또한 전형적인 풍경이다. 아내와 함께 형님 부부를 기다리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가져온 지배인은 불필요할 정도의 설명을 덧붙이며 요리를 소개한다.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가 차례대로 나오며 독특하게도 책의 각 챕터 역시 코스로 이뤄져 있다.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 소화제, 팁. 지난 바캉스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섞어가며, 작품은 식사의 흐름을 따라 진행된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 디너,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잘 차려진 음식도, 지배인의 설명도, 형님의 태도나 형수님의 눈물 번진 얼굴도, 또 아내의 태도도 모두 어딘지 모르게 2프로씩 부족하다.


불편함을 느낀 순간, 음식은 식도에 탁 걸려든다. 먹은 것들이 죄다 얹힌 기분. 아무리 물을 마시고 소화제를 먹어도 깨끗이 밀려들어가지 않는 찜찜함, 그 불편함. 말 그대로 소화불량.


<디너>는 그런 글이다. 식도를 다 넘어가지지도 못한 채 탁 걸려버린 음식물, 위장을 내내 불편하게 만드는 소화불량 같은 그런 글. 그 불편함을 느낀 순간, 즐거웠던 식사 자리는 부조리의 장으로 변모한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때문에 제대로 씹어 삼킬 수 없는 껄끄러운 <디너>처럼.




정말로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것은 바로 그 비밀이었다. 

둘이서만 알고 있는 비밀. 망각은 일찍 시작할수록 효과가 큰 법이다. (p.179)




우스개소리지만, 먹을 땐 개도 건드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식사 자리에서는 잔소리도 삼가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불편한 자리들을 만나게 된다. 친척 어른들, 애인의 부모님, 혹은 회사 사장님이나 전공 교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는 언제나 불편하다. 그런 식사는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다. 아무리 비싼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고 식사가 끝나면 필연처럼 체증이 찾아온다. 


그래서, <디너>에선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말 저녁에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각자의 아이들이 ‘사건’을 일으켰고, 그들은 그 사건의 수습에 대해 대책을 나눠보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허나 누구도 대놓고 그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대세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대처해야하는 세르게부터 그의 부인, 또 파울 자신과 현명한 아내마저도 이 부분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이 없다. 아이들이 저지른 사건의 크기가 상당한데도, 그들은 지배인의 불필요한 설명을 들으며 음식을 소개 받고 애피타이저와 메인 코스를 고르고 있을 뿐이다. 말을 할 때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는 지배인의 습관이 거슬리는 파울은 기실 그것이 신경쓰이는 것이 아닐 테다. 걱정되는 것은 아들인 미헬의 문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아이들을 꾸짖지 않는다. 파울에게도 비밀에 부친 채 아내는 사건을 숨기기에 바쁘고, 이는 형수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숨기고, 가리며, 상대의 아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내 아이의 죄를 덜기에 바쁘다. 모두가 알지만 말하지 않는 아이의 ‘비밀’을 있는 힘껏 숨기고 감춘다. 그리고 그 비밀이 핀치에 몰렸을 때, 그들은 끝내 ‘선택’을 한다. 내 아이를 위한, 아니, 내 아이만을 위한.



본래 사랑이란 내리 사랑이라 했던가. 부모가 자식을 미쁘게 여기며 보듬는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사랑에 눈이 멀 때 우리는 불편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에 대한 기사들이 연일 터져 나오는 이때,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가해자인 아이보다도 그 아이 부모의 태도다. 우리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든가, 그쪽에서 잘못을 했다라든가, 혹은 우리 아이는 무조건 착하다는 식의 발언들. 물론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나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당신의 자식이 치기 어린 실수들을 저지를 때마다 세상을 향해 기꺼이 머리를 굽혀주지 않으셨던가. 그것은 존경 받아 마땅한 고귀하고도 고결한 마음이다. 


그러나 자식을 위한다는 말로 그 모든 과오를 덮기 시작할 때, 혹은 그 모든 책임을 미루기 시작할 때, 그리하여 내 ‘자식만’ 생각하며 그 외의 어떤 것들은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릴 때, 애정은 눈이 멀고 이윽고 ‘독’이 된다. 잠깐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ATM 기기 안에 웅크려 잠들었다 어린 십대들의 발길질에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노숙자를 죽인, 그 치명적인 독처럼.







+ 너무너무 늦어버려서 염치없는 리뷰입니다.. 여느 때보다 치열한 여름을 보내는 중인지라 리뷰 한 번 쓰는 것도 여의치가 않네요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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