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울프
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지음, 김양희 옮김 / 아고라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난 베오울프의 이야기는 이전에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다. 영화로도 책으로도. 그저 그런 게 있대 수준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도서 수집가들을 다룬 논픽션 『젠틀 매드니스』를 읽으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영미 문학. 이리저리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보관에 신중을 가하며 복원하려고 한다고 했던가? 그리고 영화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는 약간 관심이 생겼을까. 그러나 읽을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베오울프』를 발견했을 때 망설임 없이 집어들었다.


 


닐 게이먼


사실 내게 닐 게이먼은 그리 관심 가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을 몇 번 읽어본 적은 있지만 빠져본 적은 없다. 닥터후의 에피소드 몇 개를 쓰든, 샌드맨을 쓰든 '닐 게이먼이었구나!' 이상으로 인식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유명하고 대단한 작가임은 틀림 없다. 이전에 읽었던 『신들의 전쟁』도 나에겐 잘 안 맞았지만 이야기나 소재가 매력적인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닐 게이먼은 상도 엄청 많이 받았는데, 휴고상, 네뷸러상, 브램스토커상 등 SF, 판타지 쪽에서 권위 있는 상들은 다 휩쓴 듯...(그 상 받은 작품이 신들의 전쟁이다.) 어쨌든 그런 닐 게이먼이 베오울프를 다시 썼다. 공동 작가인 케이틀린 R 키어넌은 닐 게이먼만한 유명세는 없지만 몇 번 상을 받은 작가라고 한다. 



세련되어진 영웅시


난 베오울프 원작은 읽어본 적이 없어 이들이 베오울프를 어떻게 고쳤는지, 어느 부분을 덧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처음 읽을 때 오래된 이야기 치고 참 세련되었네 싶었다. 인간적인 괴물들, 인간적인 영웅.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새로 덧붙이고 강조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바뀌었든 간에 재창조의 방향은 오랜 영웅시를 현대화시키는 쪽이 아니었나 싶다. 구전되다가 8세기 쯤에 기록된 오래된 이야기라니, 얼마나 케케묵었을지는 안 봐도 짐작할 수 있으니까. 닐 게이먼은 그걸 현대적으로 바꾸어서 술술 읽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덴마크의 흐로드가르왕의 연회 중 괴물 그렌델이 쳐들어온다. 많은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와중, 바다에서 베오울프가 온다. 베오울프는 그렌델을 물리치고 왕이 된다. 그리고 왕이 된 베오울프를 용이 위협하는데 그 용도 물리치고 덴마크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1부 그렌델은 왕이 되기 전, 2부 용은 왕이 된 후의 이야기이다. 

 


베오울프는 줄거리만 보면 별 다를 게 없는 영웅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지 않고서는 북유럽 신화에 기반하고 있으면서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는 사회상, 인간적인 괴물들의 괴로움, 물의 마녀의 매혹적인 모습들은 알 수 없다. 특히 내게는 베오울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닐 게이먼은 이 인물을 뻔한 영웅이 아니라 흔들리고 유혹에 빠지며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한 인물로 만들어놨다. 톨킨의 『후린의 아이들』의 투린과도 같이 영웅인데 영웅인 걸 인정하기 싫은 그런 모습들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베오울프를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어놨는데, 베오울프의 자기 정의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나, 그렌델? 그렇다면 알려주지. 나는 토막 내는 자, 찢는 자, 베어내는 자, 그리고 후벼파는 자다. 나는 어둠의 이빨이며 밤의 발톱이다. 나는 네가 네 자신이라고 믿는 모든 것이다. 나의 아버지 에즈데오우는 나를 베오울프라고 이름지었다. 벌들의 늑대라는 뜻이지. 네가 수수께끼를 좋아한다면 말이야. 이 악마야."-p.144

"나를 기억해주오." 그가 말했다. "왕이나 영웅, 악마를 죽인 자로 기억하지 말고, 실수를 저지르고 결함이 있는 평범한 남자로 기억해주시오. 그게 내가 기억되고픈 모습이오."-p.321


전통적이며 현대적인 옛이야기

닐 게이먼의 『베오울프』는 전통적이면서도 세련되었다. 이제까지 그의 작품에서 느꼈던 것과 같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전해온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는 만큼 기본적인 재미는 보장하고, 베오울프의 내용이 궁금했던 나에게 충분한 답을 주었다.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라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베오울프를 통해 알게 되었다. 북유럽 신화에 기반한 오래된 영웅 설화가 궁금한 분이라면 이 책을 읽을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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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뼈의 딸 1 -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4-1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4
레이니 테일러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연기와 뼈의 딸』은 사실 별로 읽을 생각이 없었지만, 북트레일러를 보고 한눈에 반해 고민하다가 결국 질러버리고 말았다. 파란색으로 치장한 신비로운 아가씨의 표지를 감상하다가(아무리 봐도 주인공 카루는 아니다. 카루는 눈이 검은색. 그럼 이건 누구일까?) 표지를 넘기면 책 날개에 파격적인 핫핑크 머리의 여성분이 웃고 있다. 파격적이다 못해 현실감이 없는 색이다. 참으로 재기발랄하고 파격적일 거 같은 이 사람이 레이니 테일러. 과연 이런 사람은 어떤 글 쓸까? 


 

 


 

파란 머리 소녀 카루

연기와 뼈의 딸은 로맨스 판타지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어덜트 소설되겠다. 낭만의 도시로 잘 알려진 프라하에는 파란 머리의 소녀 카루가 살고 있다. 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하는 카루는 전 남자친구 문제로 고민하고, 친한 친구와 노는 것을 좋아하고, 미술을 사랑한다. 그런 카루에게는 비밀이 있다. 카루는 괴물들의 손에서 자라 그들의 심부름을 다닌다. 카루는 브림스톤을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며 이빨을 모으는 일을 하던  천사를 만난다. 세라핌 아키바는 과거의 일 때문에 키메라들에게 증오를 품고 있으며 브림스톤의 집을 불태운다. 이에 카루는 망연자실하며 키메라들의 세계로 떠날 길을 찾는다. 

 

 


"널 놔주는 건, 카루, 나비가 날아갈 수 있게 창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아. 그렇게 밖으로 날아간 나비가 돌아오길 바라선 안 된다."

 

"난 빌어먹을 나비가 아니라고요."

"아니지, 넌 인간이지. 네가 있을 자리는 바로 이 인간 세계야. 너의 유년기는 거의 끝났고."

"그래서 뭐요? 내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거예요?"

"그 반대야. 그 어느 때보다 더 네가 필요하단다. 아까 말한 것처럼, 오늘이 네가 우리를 떠나는 날이 아니라서 기쁘단다."

-p.97

 


 



천사 아키바와의 사랑

자, 여기서 악마의 딸인 카루와 천사 아키바가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둘 사이의 종족적 대립. 천사와 키메라들 사이의 전쟁, 서로의 혐오가 그들 사이에 장애물로 드리운다. 종족을 넘어선 금지된 사랑이라는 뻔한 소재에 진부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리 뻔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일단 키메라와 천사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순수한 존재로 악마라고 하기 힘들고 행동은 평범한 소녀에 가깝다. 아키바와의 사랑은 일견 그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아키바와의 사랑이 필연이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알려지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그들 사이의 해답을 주면서도 더 큰 장애로 다가오고, 아키바의 마지막 고백은 독자들마저 충격에 빠지게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다음이 어떻게 될지 쉽게 감을 잡을 수 없다.

"사랑은 사치예요."

 

"아니요. 사랑은 근원적인 원소인 걸요."

 

-p.436

 

희망이라는 이름


연기와 뼈의 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희망'이다. 카루를 키운 브림스톤은 소원을 거래하는 위시멍거이다. 그런 그가 소원보다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이 희망. 그렇기에 그는 카루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으며 절대 소원을 함부로 사용하도록 하지 않는다. 카루의 존재 그 자체가 희망 없이 지속되던 전쟁에서 피어난 희망을 의미하며 전쟁의 끝, 평화의 시대가 올 수 있을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카루는 소원을 쉽게 이루지는 않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영혼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다우며 절대 꺾이지 않는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잔인한 것이 희망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후에 희망이 꺾일 때 그 무엇보다 큰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꺾이지 않는다면, 희망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마법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난 희망은 품지만, 소원은 빌지 않아. 둘은 다르단다, 아가야."

카루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곱씹어 보면서 만약 그 다른 점을 그녀가 생각해 낼 수 있다면, 브림스톤이 대견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그녀는 그것을 애써 말로 표현했다. "희망은 나에게서 나오는 거고, 소원은 그냥 마법이니까요."

"소원은 가짜야. 희망이 진짜지. 희망은 그만의 마법을 부린단다."

-p.176


"아, 이건 마법이 아니에요. 그 소원들이 정말로 이뤄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왜 이런 걸 하는 거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이라기보다는 희망이죠. 희망은 아주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어요. 여기에 진짜 마법은 없지만, 자신이 뭘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지 알고 그 희망을 자신 속의 빛처럼 간직하고 있으면, 마법처럼 그런 일들이 이뤄진답니다." 

p.349-350



간만에 신선한 판타지


『연기와 뼈의 딸』은 정말 간만에 판타지스러운 판타지를 읽었다는 느낌을 줬다. 그동안 읽은 게 판타지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이면서도 신선한 판타지는 정말 오랜만인 듯. 로맨스에 우선해서. 사랑이 있고 고통이 있고 희망이 있다.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고, 마법도 있다. 다른 세계도 있고. 닭살 돋는 로맨스이기는 하나, 그리 달콤하지도 않다. 로맨스의 달달함보다 판타지의 마력이 강하다. 씁쓸하면서 환상적이다. 특히 앙칼진 고양이같은 카루가 멋있다. 그 희망을 나눠가지고 싶을 정도로. 이 이후에 불행 밑에 있다는 '카루(희망)'가 어떻게 피어날지 기대된다. 원서 사서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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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상한 존 오멜라스 클래식
올라프 스태플든 지음, 김창규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12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내가 고전 SF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그게 몇 십 년 묵은 작품이든 세월의 흐름을 크게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보면 구식인 상상의 과학기술들도 재미있게만 보인다.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고 상상을 통해 축소/확대 혹은 왜곡하거나 메타포를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한 존』 또한 가끔 나오는 전쟁과 냉전, 공산주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1935년에 출간되었던 작품이라는 걸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면 '아, 이게 참 오래된 소설이었구나'라고 새삼 깨닫는다.



올라프 스태플든

1935년에 출간되었던 이상한 존. 작가 올라프 스태플든은 영국 작가로 과학소설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 중 하나라고 한다. 조금만 이쪽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작가들, 아서 C. 클라크, 스타니스와프 렘, C.S. 루이스 등에게 영향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하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는 짐작이 안 간다. 


이상한 존

이상한 존은 신인류의 출현을 소재로 삼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선 신인류나 초능력자들은 요즘의 SF에서 색다를 것이 없는 소재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출간된 당시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신선한 소재가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이 소설은 다른 그 무엇보다 신인류, 초인의 삶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초인인 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간들의 세상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난 슈퍼 영웅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인종이다. 능력적으로도, 자의식적으로도 인간을 넘어선 개별적인 존재인 존. 요즘의 초인들이 특이한 능력만 좀 더 가진 호모 사피엔스라는 점을 볼 때 이상한 존에 필적하는 신인류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존은 정말로 지금의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들과 '우리'라는 개념을 가질 수 없고 동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호랑이나 원숭이를 보고 대하는 딱 그만큼만이 호모 사피엔스가 존에게 차지하는 위치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목숨과 정신을 경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솔직히 불편하다. 우월한 존재에 대한 열등감도 느껴지지만, 내 목숨이 그 정도라니. 이들에게는 감정도 없나 싶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해봤지 소용없어요. 결론은 간간해요. 호모 사피엔스는 한계에 직면했어요. 
그리고 나는 멸망한 종족을 뜯어고쳐주느라 인생을 낭비할 생각이 없어요." -p.129


초판 표지

호모 수페리어 Homo Superior

그럼 스태플든이 그리는 신인류는 어떤 모습일까. 인류에서 나온 돌연변이인 초인들은 일단 외양부터가 인간과 다르다. 인간과 비슷하나, 이질적이다. 마른 몸, 긴 팔다리, 큰 손, 더 큰 눈, 거의 없는 흰자위. 짧은 머리카락과 큰 머리. 거미같다는 표현도 있다. 외양은 신인류마다 다르지만, 큰 눈과 짧은 머리는 대부분이 공유하는 점인 듯 하다. 거기다가 성장이 지나치게 느리다. 수명도 긴데 몇백살까지 살아온 초인들도 있다. 능력도 다들 조금씩 다른데, 기본적으로 지능이 무척이나 높다. 한 언어를 습득하는 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보는 관점들이 우리와는 다르고 미의식 또한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완전히 이성적이라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수명을 제외하면 이상한 천재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특기할 점은 텔레파시나 시간을 넘나드는 의식, 정신력으로 원소를 다룰 수 있다는 점들이다. 근데 나는 이런 초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신인류로 보이는데 굳이 넣었어야하나 싶다. 그 모든 게 극대화된 정신력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텔레파시가 등장하면서부터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던 게 사실.

"여기는 정말로 괴물들의 섬이다." -p.249


고전 SF의 재미

이상한 존은 고전이다. 읽으며 고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처음에 내가 시대의 흐름을 크게 느낄 수 없다고 썼던가? 그렇다. 이런 류의 소설은 언제나 새로이 읽힐 수 있기에 고전이면서도 신선한 재미를 준다. 모순적인 말이지만, 이런 게 또 고전 SF를 읽는 재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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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토익 만점 수기 - 제3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심재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나의 토익 만점 수기』를 처음 봤을 때 생각했다. '이게 소설 제목이라고? 살벌하잖아.' 그렇다. 정말 살벌하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풍의 책일 것만같은 표지. 그런데 사실은 소설이었다. 그것도 제목과는 다르게 위트가 넘치는 소설. 술술 읽혔다.


 


 

엉뚱 발랄한 이야기

 

토익 590점의 '나'는 토익 점수를 올리기 위해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바나나 농장으로 위장한 스티브의 마리화나 농장에 인질로 지내면서 영어 공부를 하게 된다. '나'는 토익을 핑계로 이주일을 닮은 아버지와 지진에서 도망쳤고, 스티브 농장의 지하에는 아폴로 13호를 믿는 여자가 살고 있다. 이웃 농장에는 토익 리스닝 A, B가 지내고. 나는 토익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 모든 일을 토익과 연관해 이야기하는 나의 태도는 익살스럽다.

 

 

달콤 씁쓸한 바나나

 

소설 내용만 보자면 정말 웃기다. 현실에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이야기. 황당무계하다. 그런데, 마냥 웃을 수가 없다. 재미있는 내용을 보고 웃어야하는데 웃기가 힘들다.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어학연수를 가서 무얼 했던가. 나는 눈이 두 개 달렸나. 외눈이 아닌가. 이번 달에 보러갈 토익은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제대로 공부 안 했는데. 이렇게 절박했나? 아니, 근데 이렇게 절박해야하나? 990점이 뭔데 '나'는 800점이 넘어도 만족을 못할까. 그게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일까. 읽고 있는 내내 심란해진다. 씁쓸하다. 꼭 스티브의 바나나 농장같다. 달콤한 바나나로 위장한 마리화나 농장. 그게 바로 이 소설이다.

 

만점을 받는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토익 만점은 뭐, '나 눈 두 개 달렸소' 하는 것과 같지."

-p.18

 

 

에휴 그 놈의 토익

 

토익. 그놈의 토익. 토익 만점은 눈 두 개 달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나'는 그 눈 두 개를 얻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토익 두 눈을 달기 위해 많은 걸 버려야했다. 토익 만점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솔직히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사회는 목숨과 건강을 내걸도록 우리를 내몰고 있지 않은가. '나'가 실제로 어학연수에서 얻어온 것은 토익 만점만이 아니다. '나'는 통나무집에 한류를 전파했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익 정신은 그 모든 것을 떠나게 만들었다. 이상적으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현실적으로 가치있는 가치들을 좇아 대기업 면접을 본다. 그럼에도 한 켠으로는 가슴 따스해지는 그 가치들을 지키고 있다. 과잉대응을 포기하고 친구를 위해 자신의 손실을 숨긴다. '나'라는 존재는 토익을 준비하지만 거기에 잠식되지는 않은, 내가 되고 싶지만 정말 어려운 그런 사람이다.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하며, 현실적인 척 하지만 전혀 현실적이지도 못하다.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궁금하군."

스티브는 말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p.208


내 눈은 두 개

 

어학연수는 절대 안 갈 거라고 했을 때가 있었다. 결국 다녀왔다. 다음 주면 토익 시험을 본다. 스펙 쌓을 걱정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20대. 두 눈을 가지고 사는 게 왜 이리 힘든 건지 모르겠다. '내 눈은 두 개'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때가 과연 올까. 어느 쪽이든 눈 두 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눈 하나를 내버려야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걸 아는 모든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낄낄거리면서도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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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364일 블랙 로맨스 클럽
제시카 워먼 지음, 신혜연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열일곱, 364일』은 처음으로, 그리고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접한 블랙로맨스클럽의 소설이다. 사실 이것보다는 『웜 바디스』랑 『레드 라이딩 후드』를 더 읽고 싶었는데 열일곱, 364일을 사버린 건 역시 이벤트의 영향이다. 블랙로맨스클럽 라인업 홍보 이벤트로 책을 구입하면 신지가토 다이어리를 줬기 때문에. 다이어리는 동생 손에 들어갔지만, 책은 다행이도 내 손에 남았다. 


처음으로 접하는 블로클 책! 과연 어떨까 궁금궁금. 소녀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러블리 본즈>가 떠오를 법도 한데 비슷할까?


 

 


죽음 이후의 퍼즐 맞추기

이야기는 주인공인 리즈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열여덟살이 되는 생일날 다섯 친구들과 리즈는 보트에서 파티를 연다. 술과 마약에 취해 잠들었던 리즈는 잠에서 깨어난 후, 자신이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리즈의 영혼 앞에 나타난 알렉스. 알렉스는 리즈가 죽기 1년 전 교통 사고로 죽었던 소년이다. 학교에서 잘나가고 인기 많았던 여왕 리즈와는 달리 알렉스는 변변한 친구도 없었던 은따. 리즈와 알렉스는 너무나도 다르기에 자주 투닥대지만 알렉스는 리즈가 생전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것을 돕는다. 죽음을 겪은 후 리즈의 기억은 공백이 많다. 리즈는 퍼즐을 맞추듯이 자신의 기억들을 한 조각 씩 찾아 맞추고 자신이 죽은 이유를 알아내려 한다. 과연 리즈의 죽음은 우발적 사고였을까, 아니면 보트에 있던 다섯 친구 중 한 명의 소행일까?

이제는 대단한 예고나 준비 시간 없이도 기억 속으로 빨리 들어갈 수 있다. 우연히 빠져 들어가듯 찾아 헤맬 필요도 없고, 접근도 더 쉽게 할 수 있다. 많은 것을 기억할수록, 퍼즐 조각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는 것 같다. 그 퍼즐이 그려 내는 내 인생의 그림이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몇 가지 조각들로 점철된 텅 빈 서판이 아닌 것에 감사한다. -p.308


로맨스의 틀을 깨다

로맨스 소설에는 사랑이 있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있고, 두 사람의 만남과 두 사람을 가로막는 사랑의 장애물이 있고, 사랑이 이루어짐으로써 끝난다. 보통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열일곱, 364일은 이런 로맨스의 틀을 과감히 깨부순다.  리즈가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스 뿐이기 때문에 알렉스가 남자주인공인가 싶었다. 알렉스는 무척이나 중요한 인물이고 리즈와 싸우고 정드는 친구이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서로 좋아하기도 힘든 게 둘의 관계인데다 리치에 대한 리즈의 사랑이 너무 견고해서 일찌감치 그런 기대는 접어버렸다. 리즈에게는 생전에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리치. 서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리즈와 리치의 사랑은 과거에 기반해서만 유지된다. 그런데도 의외로 달달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견고해서 신기할 정도다. 대화도 사랑의 속삭임도 과거의 일인데 로맨스는 로맨스다.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주인공

처음부터 리즈의 행동을 알았다면 리즈를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억이 드러나는 순서는 교묘해서 리즈가 변할 수 밖에 없던 이유, 리즈의 아픈 과거와 현재 모습, 겉과 속을 차례대로 다 보여주고 리즈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금발 미녀, 잘생긴 남자친구, 부유한 집안에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리즈의 삶이 그렇게 고통에 차있었다니. 특히나 리즈의 달리기에 대한 열정은 어머니의 죽음이 리즈에게 가져온 고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떻게 이런 리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리즈는 늘 달리기에 대해 얘기하곤 했어요. 그러니까, 죽기 전에요. 전 가끔 물었어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고요. 리즈의 대답은 늘 똑같았어요. 아무 생각도 안 한다는 거였어요." -p. 146


누가 봐도 재미있을 소설

블랙로맨스클럽의 소설 중  『열일곱, 364일』 을 처음 읽은 것은 아무래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로맨틱하지만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에서 한참을 벗어난, 판타지이지만 추리 소설을 읽는 것같은 『열일곱, 364일』! 로맨스를 안 좋아하고 판타지에 관심이 없어도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아닌가 싶다. 블로클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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