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세 여성작가 작품 분석… 한국문학은 미적 돌파구를 찾았는가
▣ 고영직/ 문학평론가
지난해 출간된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현대문학사), 공지영의 소설집 <별들의 들판>(창비), 전경린의 <황진이>(전 2권, 이룸) 등의 작품이 그 문화적 품목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세 여성작가들의 스타성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볼 수 있겠지만, 명망 있는 작가들조차 ‘1쇄 작가’를 면치 못하는 출판시장에서 모처럼 국내 작가의 저작물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 여성작가의 작품이 갖는 문학적 의미를 추적하는 일은 우리네 문학이 꿈꾸는 가치지향을 엿보는 일은 아닐까 싶다.
<황진이> 포스트모던적 역사인식
우선, 전경린의 <황진이>는 우리네 의식은 물론 무의식의 차원에까지 각인되어 견고한 심상 구조를 이룬 채 부지불식간에 발화되는 일종의 문화원형을 소설화한 사례이다. 이것은 최근 1~2년 사이에 하나의 사태(沙汰)를 이루고 있는 역사소설 쓰기 현상과 관련된 글쓰기의 한 사례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의 역사소설 출간에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지점은 1930년대식 은둔과 도피로서의 글쓰기도 아니며, 1980년대식 역사복원으로서의 대하소설 창작도 아니라는 점이다. 황석영의 <심청>, 김영하의 <검은 꽃>, 김경욱의 <황금사과> 등의 작품이 증명하듯 최근의 역사소설은 사건 중심의 역사에서 탈피한 포스트모던적 역사인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회학적·풍속학적 관찰과 묘사의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상상의 리얼리티’를 재구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경린의 <황진이>는 신화화된 황진이에 대해 일종의 내면 공간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황진이를 부각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학적 육체성을 부여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엄정한 역사물이 아니라 “허구적 자유로움을 확보한 소설”로 재구성함으로써 ‘인간 황진이’에 대해 흥미 있고 심층적인 해석 작업을 했던 것이다. 예컨대 황진사의 서녀로 설정된 황진이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다른 생의 가능성’을 일관되게 추구한 인물로 묘사한 점은 이른바 근대적 개인의 내면 구조를 지향하는 소설 주인공의 설정과 흡사하다. 이로써 황진이는 ‘전’(傳)이라는 전근대 시대의 형식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근대적 소설 형식의 문제적 주인공이 되는 셈이랄까.
특히 신분제도와 조선의 억불정책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더불어 서화담과의 에피소드에 대한 작가의 전복적 상상력은 역사 다시-쓰기(re-write)의 생생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나다. 나는 언제나 진이다. 나는 홀로 나의 신 앞에 선다”(1권, 129쪽)라는 표현은 코기토(cogito)적 존재로서의 개인주의 선언이라 부를 만하다. 작가는 ‘존재론적 자유혼’을 표상하는 구체적인 인물로서 황진이라는 주인공을 설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는 남아 있다. 전경린의 <황진이>는 김훈의 <칼의 노래>가 그러하듯이 ‘열린 결말’을 제시하고 있지만, 특정한 시대의 특정 인물을 작가의 부속물로 보려는 관점은 경계해야 한다. 전경린의 <황진이>가 딱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건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탈피한 작금의 포스트모던적 역사소설 쓰기는 바로 이 문제에 관해서 새로운 해석학의 문제에 직면한 것은 아닌가 싶다. 오히려 전경린표 <황진이>는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되, 거기에 갇히지 않는 허구적 개연성을 추구했기에 의미 있는 해석을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남자네 집> 청춘의 기억
박완서와 공지영의 작품은 ‘상처와 사랑’에 관한 육성의 고백록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이라는, 저 빛나는 청춘의 문장(紋章)을 말하는 두 작가의 육성은 음역이 다른 작곡가의 곡을 대하는 듯한 착각마저 자아낸다. 자전적 요소가 짙은 두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냈던 일상의 역사를 아프게 돌아보는 일일지 모른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작가 스스로 말했듯이 ‘부채감을 주는 기억’을 끄집어내 기억의 저층을 깊숙이 탐사하는 작품이다. 전중(戰中)의 폐허지 서울에서 청춘의 열병을 치러야 했던 그 남자네 집이 50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에서 착상을 얻은 이 작품은 삶이란 무엇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느 평론가가 1950년대 전후 상황을 ‘화전민(火田民) 의식’이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박완서의 작품은 1950년대를 사는 일상인의 생활세계와 정서를 매우 구체적으로 복원해낸다. 전중의 사랑, 전후 베이비붐 현상, <자유부인> 논쟁, 사치풍조 등등에 이르기까지 <그 남자네 집>은 우리가 세월이라 부르는 것의 의미와 무의미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노년문학의 한 경지를 연출한다. 가령 시(詩)와 물질의 사치에 관한 작가의 담담한 붓질에는 부재하는 청춘에 대한 가없는 그리움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그래서 작가는 문학은 내 마음의 연꽃이었노라고 진술했던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그 남자네 집>이 기억의 터전에 대한 문학적 헌사라는 점은 마땅히 인정해야 할 테지만, 자전소설이라는 양식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경험과 감정의 과잉 현상은 자칫 문학의 에세이화를 낳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베를린 사람들’이라는 연작소설 형식을 취한 <별들의 들판>은 5년 만에 작단에 복귀한 공지영의 세 번째 소설집이다. 통칭 후일담 소설이라 명명할 수 있는 이 작품집에서 공지영은 한국문학의 바깥에서 내부를 성찰하고자 하는 일종의 환유적 글쓰기 전략을 구사한다. 이 작품집 속의 화자들은 ‘단절’의 경험을 안고 살아가는데, 그 양상은 혈연과 조국 그리고 과거의 이념과 단절된 시간으로 표상된다. 특히 표제작 ‘별들의 들판’과 ‘귓가에 남은 음성’에는 데뷔 이후 상처와 희망을 줄곧 추구해왔던 공지영 문학의 속성들이 잘 드러나 있다. 표제작의 화자인 수연 어머니가 묻힌 묘비명에 적힌 ‘좌절과 회색, 먼지와 베를린 그리고 얼굴’(200쪽)이라는 단어들은 공지영이 베를린이라는 상상 공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살수록 정이 떨어지지. 그런데 베를린 사람들은 다른 도시로 떠나지 못해”(44쪽)라는 진술과 겹쳐 읽는다면 단박에 그 문학적 의미를 간취할 수 있으리라.
근본적 전환점에 선 우리 문학
그러나 우리 문학은 지금 근본적인 전환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글이 명시적으로 보여주듯이, 한국에서 근대문학은 최근에 와서 ‘끝장’이 났다고 보아야 할 터이다. 고진은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교수와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야말로 문학을 버리고 사회운동을 택하면서 오히려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은 적자라고 역설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의 기본 기조에 대해 필자 역시 상당 부분 동감한다. 왜냐하면 작금의 문학 위기는 판매지수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떠나서 (문학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근본적 전환기를 맞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유구한 미적 자율성의 신화, 즉 미학주의를 유포하며 한 시대를 득세했던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미적 돌파구를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예술의 힘은 재미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한 사회 내에 적절한 담론을 형성하고 대중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공감을 살 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금의 문학은 어쩌면 획일적인 코드화 현상이 작품마다 산견되는가 하면, 몇몇 콘셉트에 의존하는 이벤트형 창작이 난무하고 있다는 우려가 들 때가 있다. 세 여성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아쉬운 점은 문화와 문명의 미래에 대해 심도 있는 작가적 통찰의 흔적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다루는 순간에도 이러한 관점은 일관돼야 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은 여전히 경험·감정·계몽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듯싶다.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