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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나가주세요.


 자신없지만 일단 지르고보는 가설 하나. 과연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원작소설에 관심이나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원작소설의 이야기를 충실히 옮기거나, 원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원작의 이야기를 대폭 축소하고 변형한뒤,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타일로 그려낸 작품이다. 소피는 시작한지 얼마안되 곧바로 노인으로 변하면서 소피에 대한 여러 설정은 모두 날라가버리고, 소피가 어떻게 해서 저주가 풀리는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게다가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울과 캘시퍼의 계약역시 처음에는 그저 ‘계약’이라고 표현되다가 작품 후반에서나 그것이 하울의 목숨과 연관되어있음이 밝혀지고, 아무런 복선도 없는 마지막의 ‘반전’은 사람에 따라서는 정말 당황스러울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설리만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코믹함이 스며들어있다. 하울이나 소피는 그렇다치더라도, 하울의 목숨과 연관되어있는 캘시퍼는 거의 팬시상품용 캐릭터라할만큼 귀엽고, 초반에 하울과 소피의 최대의 적이될것 같았던 황야의 마녀는 작품 중반부터 코믹한 캐릭터로 변신한다. 그러니 하울이나 소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심각하게 여겨지지않고, 이 때문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원작보다 예쁜 캐릭터로 가득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또다른 작품처럼 보인다.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변화


 실제로 이 작품은 원작소설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매우 유사하다. 어느날 환상적인 세계에 빠져 모험을 하는 소녀, 잘생긴 소년,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마녀, 그리고 주인공을 남몰래 사랑하는 또다른 존재등의 구성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완전히 동일하고, 그 사이에 쉴새없이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역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연상시킨다. 설리먼의 부하인 힌이 특히 그렇다. 힌은 스토리만을 놓고보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캐릭터에 가깝다. 소피가 계단을 올라갈 때 힘들어하는 에피소드는 꼭 힌이 아니라 다른 존재여도 상관없고, 그 에피소드 자체가 스토리보다는 그 순간의 웃음을 주기위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상적인 세계속에서 펼쳐지는 캐릭터의 귀여운 행동이지 논리적인 스토리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작에서 필요로했던 것은 단지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불가능이 없는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바로 그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안에서 변화를 준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원작소설을 가져와 자기식대로 풀어낸대신, 자신의 스타일에 담긴 자신의 감성과 메시지를 변화시켰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 구성적인 면에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닮아있지만, 그것이 전개되는 양상은 전혀 다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소녀가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물론 소피도 성장하지만, 센의 성장과 소피의 성장은 다르다. 센의 성장이 모든 일에 심드렁하던 철없는 아이가 신들의 세계에서 열심히 일하고, 여러 사건을 처리하면서 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여 그 ‘노동과 근면의 세계’를 ‘뒤돌아보지않고’ 떠난 이야기였던것과 달리,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오히려 소피에게 ‘노는 것’과 ‘아름다운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캐릭터가 대부분 생략되었긴 하지만 소피가 노인의 모습으로 변하기 전의 모습을 보라. 그녀는 파티에도 가지않고, 자기 방에서 일만하며, 이성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다. 게다가 그녀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자신은 별로 예쁘지 않다는 말이다. 소피는 근면성실하되 그 나이에 걸맞는 재미있는 삶이나, 미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소피가 노인으로 변해도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녀의 마인드는 세상 다 산 사람쪽에 가까웠으니까.


 즉,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는 정반대로, 소녀같지 않았던 소녀에게 소녀가 ‘즐겨야할 것’들을 되찾아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숙명, 혹은 젊은이가 져야할 세상에 대한 ‘의무’같은 것이 없다. 대신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을 통해 소피에게 아름다운 꽃밭을 선물해주고, 그녀가 신나게 모험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다.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무나 강박관념없이 순수하게 즐길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이는 소피가 사랑하게 되는 하울의 캐릭터를 통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울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사상 가장 아름다운 남자 주인공 캐릭터가 아니라, 가장 가볍고 쾌활한 캐릭터다. 그는 진지하고 성실하거나, 혹은 굳센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아름답지 않으면 살아야할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막강한 마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설리먼이 자신을 부를까 두려워 소피를 보내려하는 인물이다.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 같았던 ‘나약하고 불성실한’ 캐릭터인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작품들이라면 당연히 이런 남자 캐릭터가 소피에 의해 변해야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반대로 소피가 하울에 의해 변화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까지만해도 부정당했던 것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이르러 오히려 긍정되는 것이다.


바보같은 전쟁을 끝내줘


 다시말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식 청춘 예찬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있어 청춘이란 어른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가까웠다. 청춘의 불안이 어떤 통과제의를 거치면서 ‘어른 이상으로 성숙한’ 존재가 되는 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올바른 가치관만을 추구하고 살았고, 자신이 세계에 ‘좋은 영향’을 줘야한다는 의무감을 지고 살았다. 그러나 하울은 청춘 그 자체를 즐긴다. 그는 성숙해지지도, 세상을 책임지지도 않는다. 그가 조금이나마 성숙해지는 것은 세상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피를 사랑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가족’을 만들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어른의 보호도 받지않은채, 그저 자신들의 힘만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주책맞은 할머니까지 모시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을 통해 누군가를 책임질줄알고, 그래서 진실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이 영화의 결론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중 가장 소박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특히 설리먼과 하울, 전쟁과 하울의 성의 차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품 초반 하울은 국가의 의무를 무책임하게 저버리는 인물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하울의 선택은 지극히 옳은 것이었다. ‘국가를 위해’ 한다는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소수의 권력자들뿐이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지는 못해도 거부하는 하울의 선택은 오히려 세상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또한 설리만은 현명하고 온화한듯 하며, 하울이 ‘못된 길’로 빠지지않을까 걱정하지만, 사실 하울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설리만이다. 하울은 설리만이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사랑을 찾고, 자신의 집을 만들어 살아간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어른들이 옳다고 내세우는 가치중 올바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지금까지의 작품세계를 통해 꾸준히 ‘훈계’하려했던 청춘들의 삶의 방식을 긍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의 전작들은 불안한 청춘들이 험한 세상을 겪으면서 어른의 세계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어른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전쟁이나하는 존재들이고, 하울이 마법으로 만들어내는 세상이야말로 정말 아름답다. 그래

서 심통맞은 표정으로 하울과 소피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설리만의 모습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려했지만 이 대책없는 젊은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더 나이들어보니 이런 청춘들도 참 ‘예뻐’ 보이는 그런 어른 말이다.


감동대신 비명을 지르세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단지 청춘의 삶을 긍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도 청춘이 된듯한 느낌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펼쳐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어버린 스토리안에서 폭주하듯 자신의 시각적인 비젼을 펼쳐내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상미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거의 폭주하듯 자신의 비쥬얼적인 가능성을 시험한다. 스토리만 놓고보면 왜 그토록 하울이 전쟁터에서 싸워야하는지, 하울이 갑자기 ’이사‘를 결정하는지 알기는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논리적인 결과를 따지기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독특한 캐릭터들과, 사람의 눈을 매혹시키는 영상들이다. 모험은 쉴새없이 이어지고, 그에 따라 환상적인 영상들도 계속된다. 물론 이런 경우 대부분 화려한 영상만 가득한 작품으로 끝날뿐이지만,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시각적 비젼을 한발짝 더 발전시킨다. 일반적인 셀 애니메이션과 수채화와 유화의 질감을 작품안에 한데 섞어놓고, 전쟁터의 어두움과 하울과 소피가 사는 밝고 아름다운 공간을 적극적으로 대비시키며 연출되는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는 원작소설이 글로 다 표현하지 못했던 환상적인 분위기 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하울이 성의 내부를 바꾸면서 변화하는 집의 분위기, 즉 어두침침하던 유화와 같던 성 내부가 밝고 화사한 수채화처럼 변하는 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즐거움이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닐까. 아이와 청년들이 정말 즐거워했던 것은 자신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펼쳐낸 상상력 가득한 영상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작품속에서 하울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길로 이끌려고 했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하울의 삶을 긍정하는 설리먼의 모습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습과도 겹쳐보인다. 어른들은 전쟁을 하는 사이, 청춘들은 자신들의 성에서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얘도 예쁘네


 그러나, 이런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로운 감수성은 아직 완결된 세계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폭주하는 비쥬얼을 보여줬으되 청춘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 바로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는데는 실패했다. 하울과 소피의 사랑, 그리고 소피를 사랑하는 또다른 존재의 사랑은 지금의 청춘이 보기에는 너무나 전형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소피와 하울의 이야기는 선남선녀가 만나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이야기일 뿐이고, 폭주하는 영상미 속에서 황야의 마녀나 설리먼과의 대립, 허수아비와 기타 캐릭터는 거의 어떤 스토리도 부여받지 못한채 하울이 펼쳐놓은 스펙터클한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만 봐야한다. 그래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해도 비쥬얼과 공존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서스펜스와 메시지가 공존하는 스토리라인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이르러 그 균형이 깨졌다. 아마 미야자키 하야오의 비쥬얼이 가져다주는 매력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중반부 이후로 지루하거나, 혹은 당황스러운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청춘이 ‘폭주’한다는 것은 알았으되, 그것이 어째서 그런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줘야하는지는 아직 모르는 듯 하다(하긴, 알면 그게 이상한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개인에게나, 그의 애니메이션을 계속 봐온 사람에게는 상당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된 그가 전작에서 젊은이들에게 돌아보지 말고 달려가라고 하더니 이젠 자기도 달릴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미 대가가 된 사람이 여전히 미완으로 남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가 새로운 작품을 만들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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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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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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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일 남녀작가 소설 합동 연재


작가 공지영씨와 쓰지 히토나리의 합동소설 연재는
지난해부터 준비되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착잡한 과거사가
몇 개의 ‘돌/주년’으로 맞아떨어지는 2005년을 문학적으로도
기념해 보자는 취지에서였다.

두 작가는 연재 기획이 확정된 지난해 10월 이후 전자우편을 통해
연재 소설과 관련한 협의를 계속해 왔다.

일본 남성과 한국 여성 사이의 사랑을 그리되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와 현재의 관계를 바탕에 깐다는 데도 합의했다.
소설의 이름이 될 제목은 시간을 두고 더 논의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냉정과 열정 사이가 생각난다.
일본 남성과 한국 여성 사이의 사랑-_-;
퀄리티보다는 의의를 생각해야겠지 모. 뭐가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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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Laurencin, 'The Kiss'


언제부터 인가
그 아이가 행복해하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그 아이가 기뻐하면 함께 기쁘고
그 아이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진다.
내가 즐거워하면 그아이도 덩달아
즐거워하는 걸 알게되었다.

그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려면 나 자신부터
그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려면 나 자신부터

진정한 사랑은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주어서 기쁜 것임을 알게되었다

- '파페포포 메모리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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