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에겐 후배가 생겼다. 언제나 아랫사람이 생긴다는 건 어리든 나이가 많든 생경한 경험인 것 같다. 더구나 나처럼 늘 주위 사람에게 어리광 부리길 좋아하고 떼쓰기가 일쑤인 사람은 누군가 나보다 '작고 이끌어줘야 할' 존재가 생긴다는 건 꽤나 쭈뻣쭈뻣 뻘쭘한 경험이다. 보통 선배하면 무서운 선배아니면 만만한 선배 둘 중 하나로 나뉜다는데 천성적으로 남을 이끌거나 훈계하는 류의 카리스마는 애시당초 없어서 나는 후자쪽에 가까울 듯 싶다. 나도 내가 무서운 선배가 되길 바라진 않고.

나는 우리 학교의 다른 학교와 가장 큰 차이점이 선후배 관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공부나 다른 면에서도 차이가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우리 학교만의 고유한 선후배 분위기는 다른 타 학교의 그것과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성질의 것이라고 자부한다. 입학하기 전부터 선배 후배 간 교류가 되는 학교, 입학 하고 나서 제일 먼저 부닥치는 것이 무수히 많은 선배들과의 대면식 일정인 학교, 같은 학교 출신 같은 과 같은 동아리 집에 갈 때 같이 타는 차 등등등 곳곳에서 엮어지는 선배들과의 고리는 그 수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고 그만큼 서로 부딪히는 횟수도 타 학교에 비해 월등히 많다. 우리 학교가 대학교라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만 고등학교라는데 그 특이함이 있을 것이다. 작년의 나를 생각해보건데 복도에만 나가면 인사할 선배들 천지여서 고개만 쉴새없이 주억거렸던 생각이 난다. 지금의 1학년이 그렇겠지.

나에게도 후배들이 생기고 있다. 내 핸드폰에도 그 애들 번호가 입력되가고 있다. 친구들도 처음엔 후배들이 복도에서 하는 인사를 받아주는 것이 어색하고 오히려 우리가 더 뻘쭘해하고 그러다가 이제는 쟤는 인사 잘 안하는 애 이러면서 뒤에서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참 놀라운 일이다. 우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선배님'하며 꼬박꼬박 존댓말 쓰는 애들이 생기다니!

오늘은 우리 학교에서 전해내려오는 같은 과 선배가 후배에게 마니또(자신을 밝히지 않고 선물을 주거나 편지를 주는 수호천사)가 되는 것에 동참해 우리 과 한 아이에게 엊그제 제과점에서 산 쿠키와 우유, 카드를 포장해서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같은 동아리 부원이자 우리 과에서 가장 웃기기로 소문 난 남자 선배에게 작년에 선물 받은 기억이 났다. 그 때는 선배한테 무조건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해서 그 다음날 바로 쇼핑백에 과자며 사탕이며 가득 담아서 반으로 찾아갔었지. 그래서 우리 과 모든 여자선배들이 그 선배더러 왠일이냐를 외치며 복도로 뛰어나왔었다. 나는 여자 후배였고 그 선배는 남자 선배였으니. 그 선배가 길게 편지도 써줬었는데 나는 내 후배에게 딸랑 3줄짜리 카드를 주었다. 어지간히 늦게 갖다줘서 나름대로 친구들 다 받는데 자기만 여태 못받았다고 초조했을지도 모르는 아이인데 좀 더 많이 챙겨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내일 모레는 또 과 대면식이 있다. 방학 중에 한번, 엊그제 한번, 내일 모레 한번, 그리고 앞으로 새로 들어올 동아리 애들하고도 대면식이 있을 예정이다. 우리 학교는 이렇게나 대면식이 많다. 나는 그나마 적은 편이다. 대면식이라 함은 선후배들끼리 밥을 먹으러 가거나 해서 서로 통성명을 하고 앞으로 인사를 하며 지내자는 약속을 하는 자리이다. 1학년과 2학년만 하기도 하고 가끔은 3학년도 끼는데 모든 비용은 2학년이 내야 한다. 작년에는 1학년이어서 모든 대면식에서 얻어먹기만 했지만 올해는 여기저기 대면식비로 나가는 돈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덕분에 요즘 내 재정 상황은 엄청나게 열악하다.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완전한 우리 학교 사람인 것 같다.

이번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이 돌아다닌 것이 1학년 복도일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작은 동아리를 하나 하고 있는데 모든 동아리는 2학년 위주로 돌아가서 2학년이 되면 동아리 홍보를 하고 신입부원들 오디션을 주최해야 한다. 3학년은 완전히 입시체제로 돌입하고 어느덧 학교물을 먹어서 익숙해진 2학년들은 이 때쯤 활발하게 동아리 홍보를 하며 1학년 복도와 게시판은 온갖 홍보물들로 가득찬다. 경쟁도 치열해서 서로 한명이라도 더 가입받으려고 각 반을 돌아다니며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꼬드긴다. 나도 우리 동아리 아이들과 각 반을 돌아다니며 안녕하세요 독우회입니다~를 열번은 한 것 같다. 나름대로 우리 동아리는 뽑히기가 쉽지 않고 인기도 많아서 들어가는 반마다 반응이 진지했다. 오늘 정규수업이 끝나고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동아리 회장애한테 슬쩍 넘겨받은 동아리 신청서도 제법 두둑했다. 월요일날 몰아서 내는 아이들이 많이 남아있고 심지어 어느 반 아이는 자기네 반에서만 20명이 지원할 거라고 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신청서를 읽고 또 읽었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과 선배님 꼭 뽑아주세요~' 무한 반복에 칸이 모자라서 종이를 붙여서까지 빽빽하게 채운 아이들. 읽다보면 정말 얘가 책을 많이 읽었구나 하는 번뜩이는 신청서들도 많았다. 우리 동아리는 독서토론 동아리인데 1차 서류 심사는 전원 통과이고 2차 논술은 절반 가까이 잘라내고 3차 면접에서 10명을 뽑는다. 그런데도 신청서를 이렇게 성실하게 써내는 걸 보면 어지간히 동아리에 들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마음으로는 몽땅 다 합격시켜주고 싶은 심정이다.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저 좀 뽑아달라고 애교부리던 후배도 있었다. 우리 과 아이들 중에도 한명은 합격해야 할텐데.

음 여러모로 작년 생각이 많이 나는 일주일이었다. 선생님들은 이번 1학년이 시끄럽고 말썽쟁이들이라고 하시지만 내 눈에는 우리보다 더 똘똘하고 번뜩이는 아이들이다. 야자가 끝나고 독서실로 슬슬 올라오는 아이들 수를 작년과 비교해봤을 때도 그러하다. 이 아이들은 부디 나처럼 방황하는(?) 1학년을 보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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