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용지의 1/4 정도 되는 크기의 32장짜리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메모한다.

메모할 때 쓰는 펜은 동아 헥사플러스 파인라이너 10색 세트 중 그날그날 색상을 고른다.

남들이 보면 안 되는 욕 메모가 적힌 건 찢어서 파쇄한다.

서재에 가정용 파쇄기가 있다.

종이에 우울한 내용, 구체적으로는 가족 욕, 주변인간들 욕, 조물주 욕을 많이 써 갈기기 때문에

반드시 파쇄해야 한다!


a4 이면지를 절반으로 자르고 그것은 8등분(4칸*2줄)으로 접는다. 

헥사펜으로 영화관 상영일정을 날짜별로 쓴다.

영화관 방문 날짜는 최소화하면서 감상편수는 최대로 할 수 있는 일정을 짠다.

예매한 영화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친다.

이 일정표 종이를 1/4로 접어서 위에 말한 수첩 사이에 끼워 놓는다.

영화 일정표를 부적처럼 매일 들고 다니면서 바라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종이는 파쇄한다.




남동생이 해외 출장 일정표를 AI로 만들었다면서 이지미파일을 보냈다.

AI는 여백의 중요성을 모른다!!

AI표 일정표는 모든 면이 컬러라서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헥사플러스 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기도 

좀 애매하다.

나는 캔바스타일의 ppt에 적응하지 못한 구식 파워포인트 세대란 말이다.


남동생이 면세점에 살 거 있음 사라고 해서

에르메스 향수와 샤넬 파운데이션을 샀다.

요즘 내 소확행은 100ml 오드 퍼 퓸을 사서 아끼지 않고 

향수를 듬뿍 과하게 뿌리는 것이다.

마치 AI가 제작한 여백이 없는 과한 ppt처럼.



스타링크 덕분에 기내에서도 카톡을 하는 게 신기했다.

기내식 사진을 실시간으로 받아 보았다.

여행 경험치가 거의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기내식 사진만 받아도 

여행이 가고 싶어서 심장이 콩닥거렸는데

지금은 타인의 여행기만 읽어도 여행의 피곤이 느껴진달까.

요즘 오지은 여행책을 다시 읽기 중.



헬싱키 반타 공항까지는 아홉 시간이다. 수면제를 먹고 창문에 기대어 까무룩 잠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핀에어는 나에게 2-4-2 자리의 가운데 자리 중 가운데 자리를 주었고, 설상가상 주머니 속에 수면제는 없었다. 롤빵에 버터를 잔뜩 발라 우물우물 먹고 맛없는 핀에어의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1인당 커피 소바량이 두번째로 높은 나라이고 정말 맛없는 커피를 마신다. 그들은 맛없는 필터 커피를 끝나지 않는 밤 동안 주구장창 마신다.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 오지은>


2월이 끝나갑니다. 드디어 패딩점퍼를 벗을 수 있는 시기가 옵니다. 저는 11월부터 지금까지 한 패딩만 입고 지냈습니다. 저렴한 브랜드에서 산 남성용 패딩입니다. 엉덩이가 완전히 덮인다는 점과 허리선이 들어가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걸 입고 뒤에 달려 있는 모자까지 푹 쓰면, 전 정말 밖에 나오는 것이 귀찮고 힘이 들었는데 이렇게 또 힘을 내보았습니다요, 하고 세상에게 말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멋을 내고 싶은 기분이 정말 요만치도 들지 않는 겨울이었습니다.


그 점퍼를 입고 저는 지금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와 있습니다.(중략)

이번 여행은 제 첫 배낭여행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배낭 여행, 정말로 배낭을 메고 다니는 여행입니다. 이 여행을 위해 커다란 배낭을 새로 샀습니다. 왠지 그렇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청바지 하나, 맨투맨 티셔츠 하나, 거의 같은 복장으로 양말만 갈아 신으며 다녔습니다.

<당신께 / 오지은>


멋을 내고 싶은 기분이 정말 요만치도 들지 않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여행보다는 멋 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상황이 더더 궁금했다.

나는 늘 어떻게 해서라도, 한 방울이라도 멋을 부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멋을 낼 아무 재료가 없을 때는 한 방울의 향수라도 뿌린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속단추보다 작은 귀걸이로 변주하기도 하고

긴 바지 속에 감추어져 아무도 모르겠지만 양말이라도 쨍하게 신어보려고 노력한다.

화려한 양말도 매우 많다. 


하지만 저 문장이 나에게는 나를 겨냥한 명카피 같았다.

내 남은 인생을 모조리 말해주는 예고편. 

나에게 남은 시간들은 멋을 내고 싶은 기분이 요만치도 들지 않는 겨울로 진행될 거라는...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주문했다(사는 게 뭐라고는 주문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알라딘 다이어리도 샀다. 

휴대하기엔 무거워서 안 샀는데 십 년 만에 샀다. 

런던자연사박물관 작약 표지가 너무 예뻐서 안 살 수가 없었다.

매일 출첵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책의 문장을 필사 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