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KY(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에서 스페인 애니(라고 할 수 있을까? 대사는 전부 영어였다) 한 편 보고 나와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혹시 방금 본 영화 감독님이세요?"라고 묻는 걸 들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나한테 한 말인가?? 뒤를 돌아보니 지난 주에 나를 빡치게 했던 고스트 룩 할머니가 서 있었다. '내 뒷모습이 어딜봐서 영화감독(?)으로 보인다는 거야? 위, 아래 전부 우영미 입었는데! 우영미 셋업으로 입는 영화감독도 있나? 그리고 방금 본 영화 감독은 스페인 사람이라고. 우영미가 글로벌 브랜드라고 해도 스페인 애니 감독이 우영미를 입는 건 좀...꽤... 거리가 먼데.' 라는 생각을 미래의 제미나이보다 더 빠르게 한 후 "아닌데요."라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할머니는 영화 어디서 봤냐고 물었다. 뭐 봤냐가 아니라 어디서 봤냐였다. 그래서 *극장에서 **봤다고 하니 할머니는 #극장에서 영화 봤다고 했다. #극장에서는 단편모음 상영했는데, 내가 영화감독지망생(?)으로 보였나... 내 어디가 황동만같았다는 거냐!!!! 와놔!!! 


지난주 토요일 저 고스트 룩 할머니 때문에 영화 <퍼시픽션> 상영관에 2분 늦게 들어가게 되었다. 심술 맞은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일기에 욕을 바득바득 적어놨었다. 내 계산대로라면 내가 상영관에 들어가자마자 상영관 조명이 꺼지는 거였는데, 저 할머니가 키오스크 새치기한 후 티켓을 무려 다섯 번(다섯 장)이나 발권하면서 내가 상영관에 늦게 들어가게 된 것. 내 계산이 뭐였냐면, 다른 상영관 영화들은 모두 9시 30분 시작이고 <퍼시픽션>만 9시 50분 시작이라서 영화 상영 직전에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발권을 하는 사람은 <퍼시픽션>을 볼 사람들뿐일 것이고, 토요일 첫 상영에 <퍼시픽션>을 볼 사람은 많이 잡아도 20명... 일 거라는 계산. 그러니 영화 상영 직전에는 아마도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도 발권을 하는 사람도 나뿐일 거라는 계산. 지하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잽싸게 혼자 올라가려고 했는데 1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 저 고스트 룩 할머니가 타더니 내가 엘리베이터를 먼저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키오스크로 가자 뒤에서 뛰다시피 걸어 새치기한 후 키오스크 잡고는 무려 티켓을 다섯 번(각각 5번, 티켓 발권을 위해서는 예매번호 7자리와 생년월일 6자리는 입력해야 함) 발권해 버림. 거의 대부분의 날들에 그랬듯이 키오스크 두 대 중 상습 수리 중인 한 대는 그날도 고장 수리 중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새치기를 하면서까지 발권을 급하게 하길래 나는 저 할머니도 <퍼시픽션> 보나 했는데, 발권하고 나서는 그냥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영화가 죄다 9시 대에 시작했기 때문에 다음 영화는 빨라도 11시인데 뭣 때문에 새치기를 해가면서 까지 뒷사람이 기다리는데도 다섯 번(다섯 장)이나 발권을 하는지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냥 노인특유의 심술 맞음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시작부터 별로였던 기분 탓인지 뭔지 유감스럽게도 이 날 본 영화 두 편 모두 별로였다. <퍼시픽션>도 <마티 슈프림>도 둘 다 길기만 백인 황동만들의 영화였다는 생각만 들었다. '뭐 어쩌라고요.' 하는 생각만 들었다. 


키오스크 화면에는 고스트 룩 할머니의 예매내역 리스트가 쭉 있었는데 예매한 영화가 최소 열 편이 넘었고, 예매 금액은 모두 무료였다. 발권하지 않은 예매 리스트에는 인디상영관의 독립영화들이 서너 편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할머니는 영화를 좋아하고 할 일은 없는 내가 꿈에 그리던 노년의 삶을 즐기는 그런 할머니였던 것(feat. 노인 특유의 심술 맞음) 골드회원권 뽕을 뽑을 수 있는 그런 시간 부자였던 것. 고스트 룩 할머니는 아마도 골드회원일 듯. (골드회원 연회비 50만 원, 모든 영화 1회 무료 관람 가능) 작년에 극장에서 본 영화가 100편 조금 모자라는데 영화비는 약 31만 원 썼다. 무료 상영, 초대권, 문화의날 그리고 영화지원금, 회원할인 등 할인이란 할인을 죄다 받았기 때문. 100편을 봐도 총 결제비가 50만 원이 못되는데, 50만 원 회원권으로 이득을 보려면 200편은 봐야한다는 건데 무직이라면 한 번은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올해는 현재까지 영화관에서 52편 봤고 결제금액은 약 15만 원(영화지원금으로 열여섯 편 봄) 출퇴근 하는 노동자가 골드회원권으로 이득을 보기란 불가능. 나도 언젠가 무직이 되면 상영하는 모든 영화 다 보기 & 매일 영화관 가기 해봐야지!!


고스트 룩 할머니를 그저 노인 할인으로 영화관이 시간 때우러 오는 그런 부류(엄청 많다!!)의 노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BIKY에서 봐서 놀랐다.  나조차도 BIKY를 매년 봤던 건 아니고,  BIKY 1회 때부터 봤기 때문에(그때는 일반 상영작은 무료였다, 지금은 8천 원) 애정이 있는 정도라서 마음 내키고 체력 되면 한 편 정도 보는 게 전부. 주로는 해외 장편영화를 본다. 국내 단편 모음 상영은 절대 안 봄. 황동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연습작을 볼 정도로 체력과 시간이 남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런 나와는 달리 시간 부자인 고스트 룩 할머니는 단편 모음을 봤단 말이지. 무엇보다 놀란 건 노인들은 오후 5시 이후로는 결코 영화관에 있지 않는데 이 할머니는 평일 저녁 7시 상영 영화를 봤다는 거다. 뭐지? 노인들은 조조는 볼지언정 저녁이나 심야 영화는 절대 보지 않는다 걸 불문율로 알고 있던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역시 옷차림이 남다르면 행동도 남다른 건가? 


p.s. 고스트 룩 할머니의 남다른 옷차림이란?

시스루 검정 장바구니 두 개(한 개는 그물 조직, 한 개는 그냥 뭔가 비치는 검은색 장바구니, 손잡이는 링)를 들고, 작은 검정 배낭을 메고,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의 주인공이 늙어서 고스트 룩+로리타 룩을 믹스해서 입었을 법한 레이스+시폰+시스루 믹스 치렁치렁 검정 원피스를 입고, 연한 검정으로 틴팅된 안경을 착용. 복장은 지난 토요일과 같아 보였다. 어쩌면 비슷한 다른 옷일지도.


p.s.2.

약 4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상영관에 십여 명의 관객만 영화를 보니 매우 쾌적했다. 어른 혼자 온 관객은 나 말고 한 명 더 있었는데 영화제 목걸이를 하고 있었기에 일반 관객은 아닌 걸로 보였다. 다른 관객들은 모두 부모와 자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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