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극장에 앉아서 멍하게 스크린의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받는 기분이 드는 나나들이다. 일종의 불교식 명상이랄까. 어두운 공간에 나 자신은 없고 스크린 속 인물과 사건만 있는 상태가 약 두 시간 정도 지속되는 게 좋다. 외부와의 단절이 주는 편안함.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공짜 영화 1. <8번 출구>
10월 중으로 써야 하는 롯데시네마 무료 관람권 1매, 시네마테크 무료 관람 스탬프 1개(시네마테크 기획전 5편 보면 1편 무료)를 사용하기 위해서 영화시간표와 극장 동선을 이리저리 짰다. 내가 롯데시네마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는 코고나다 신작 <빅 볼드 뷰티플>이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8번 출구>로 변경. 두 영화 모두 이번 2025 biff 상영작이었으며, <8번 출구>의 주연 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영화 홍보를 위해서 영화제에 참석했다. 코고나다 역시도 영화 홍보를 위해 영화제에 참석함. 롯데시네마 홈페이지 상단에 매일 <8번 출구> 홍보 배너가 하늘만큼 길고 넓게 걸려있었고, 상영시간은 촘촘했다. 반면 <빅 볼드 뷰티플>은 상영 횟수가 3회던가. 완벽한 미소년이라고 생각하는 니노미야 카즈나리의 40대 얼굴도 볼 겸해서 <8번 출구>를 예매했다. 분장 탓일까, 역할 탓일까, 니노미야 카즈나리는 꽃중년 영포티가 아닌 그냥 주름이 많고 부자연스럽게 코가 큰 40대 동양인 남자였다. 영화 내용보다는 니노미야 카즈라니 얼굴에 생긴 얕다면 얕은 이마 주름과 8자 주름을 보면서 저건 분장일까 실제일까를 더 많이 생각했다. 이누도 잇신의 <황색 눈물>의 주인공 미소년은 온데간데없구나 하는 탄식을 하며 영화를 봤다. 나는 아직도 영화 <황색 눈물>(2007년 개봉) 때 받은 황색눈물 포스터가 프린트된 L자 파일을 소중히 사용하고 있는데, 그게 벌써 18년 전이라니!!
나는 이 영화가 지하철 역에서 발생하는 테러가 주요 사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저예산 실험영화 형식의 95분짜리 낙태 반대 출산 장려 공익 영화였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의 영화 버전인가. 어이가 없어서 집에 와서 영화 정보를 찾아보니 8번 출구라는 게임을 영화로 만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나름 좋게 평가한 '실험영화'도 아닌 것!! 놀라운 것은 의외로 전문가 별점이 높다는 건데, 도대체 왜??????? 원작 게임이 있는 걸 영화로 만들었다고 하니 더더욱 시시해졌다. 이걸 굳이 영화로 만드는 이유가 뭐냐고. 더 유치한 건 영화의 시작과 끝에 라벨의 볼레로가 웅장하게 깔리는데, 지나치게 쉽고 노골적이라서 부끄러웠다. 라벨의 볼레로 특징으로 검색해 보면 내가 왜 부끄러워하는지 알 수 있다. 영화과 학생 졸업작품도 이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을 듯.
p.s. 비슷한 구조의 저예산 영화로는 <쏘우 1>이 있다. 연기 최소화, 장소변경 없는 세트장, 대사가 메인이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이후의 니노미야 카즈나리의 활동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나는 왜 이 따위 영화에 출연했을까 하는 의문만 가득 남았다.
이 영화의 유일한 쓸모라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표현 대신 영화 <8번 출구> 같은 나날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정도.
p.s. 일요일 낮이었는데 극장 관객은 총 9명. 표 검사 하는 직원도 없었다. 멀티플렉스 극장을 거의 안 가서 원래 이런 건지, 이 영화만 이런 건지 모르겠으나 시내 중심가 극장인데 이렇게 관객이 없어도 되나? 아무튼 관객이 거의 없으니 진상도 없고 매우 쾌적하게 영화 봄.
공짜 영화 2. <공원에서의 추운 하루 that cold day in the park>
라벨의 볼레로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무섭게 극장 조명이 들어왔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빠른 걸음으로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내가 볼 다음 영화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백화점 7층인가 6층에서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까지 15분 내에 이동해야 한다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엄청난 미션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뛰다시피 걸어서 다음 영화 시작 전에 아슬아슬하게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본 영화는 로버트 알트만 특별전 작품 중 <공원에서의 추운 하루 that cold day in the park>(1969년작, 이번 회차만 무료 상영!)였다. 검색해 보면 기존 번역은 <공원에서의 차가운 나날들>이다. 나중에 집에 와서 영화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람. 추운 하루와 차가운 나날들은 너무 다른걸!! 극장 홈페이지의 간단한 줄거리만 읽고 영화 봤다가 마지막에 식겁해 버림! 이런 게 거장 영화감독의 내공인 건가 했다. p.s. 이 영화에서 놀란 점은 1969년 즈음의 캐나다 부유층의 아파트 내부의 고급짐이었다.
공짜 영화 3.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년, 120분)
다음 영화는 스탬프 5개 모아서 1편 무료 찬스로 본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이 영화가 대박이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 20분 이상 폭설 장면 속에서 연기한 워렌 비티가 냉난방이 잘 되는 먼지 하나 없을 거 같은 세트장에서 연기하는 미노미야 카즈나리를 봤다면 뭔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밀러 부인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물동이를 나르면서 교회에 난 불을 끈다. 맥케이브는 눈 속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 목숨을 건 총격전을 벌인다. 진짜 보는 것만으로도 손발에 동상이 걸릴 것 같은 장면이 (아마도) 이십 분 이상 이어진다. 촬영 장소는 폭설이 쏟아지는 캐나다의 어느 숲 속이었다고 한다.
1971년에 맥케이브를 통해서 찌질한 하남자를 정확하게 만들어 낸 것, 현명한 밀러 부인의 손에 종종 책을 들게 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연출력에 놀라자빠질 뻔 했다. 서부영화인데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여성주의!!!
p.s. 밀러부인이 너무 예쁘고 또 어디선가 본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 검색해 보니 영화 <닥터 지바고>의 라라였다!!!!!!!!!!!!!!!!! kbs명화극장에서 했던 더빙 버전의 <닥터 지바고>를 비디오로 녹화해서 보고 또 보고 했던 어린 날의 내가 생각났다.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수십 년 전 영화들을 보다 보면 요즘 영화가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영화는 눈으로 보는 것이 메인인데, 요즘 영화는 귀로 듣기 위해서 만들어지나 하는 의심이 든달까. 현재 상영 중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를 완벽하게 상영하는 극장은 전 세계에서 서너 곳뿐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음향을 입체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극장이 미국에 몇 개 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훌륭한 영화라면 무릇 일반 극장에서 봐도 충분히 재미있어하는 것이고 음향적 기술력은 왼손처럼 거들 뿐인 거 아닌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계속 피아노 음이 깔렸던 게 거슬렸던 나로서는... 음악이나 음향이 과유불급이 될 수 있다는 걸 감독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다.
두 번째로 내가 요즘 영화에서 거슬려하는 건 지나치게 장황한 대사들이다. 다시 한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소환하자면 대사가 지나치게 빠르고 많고 반복된다. 특히 전화통화로 암호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반복. 대사를 과하게 빨리 소화해 내는 것이 연기력이라고 여기는 걸까? 비슷한 이유로 별로였던 영화는 최근 넷플릭스 화제작 <굿뉴스>. 이런 류의 아재개그, 화장실 개그(치질!! ㅅㅂ뭔데 재미있나??) 진짜 싫어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