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미션 없는 러닝타임 338분짜리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굳은살을 확 잡아 뜯어 버렸다. 필리핀 군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시대적 배경인 흑백영화였다. 5시간 38분의 길고 긴 영화의 길고 긴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서야 극장에 조명이 들어왔다. 그제야 내 엄지 손가락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상태는 심각했다. 내가 굳은살을 뜯어낸 쪽은 오른손 엄지의 왼쪽이었다. 다시 말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부위였다. 예를 들어 키보드를 칠 때 스페이스바를 터치하는 면. 이 일기를 쓰는 지금도 스페이스를 터치할 때 미세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래도 지금은 거의 다 나은 것이다. 처음에는 오른손 검지로는 스페이스를 터치할 수 없었다. 터치는 고사하고 엄지를 사용하지 않을 때도 주기적으로 통증이 느껴졌고 열이 나서 화끈거렸다. 왼쪽 엄지에 비해서 과도하게 부어 있는 오른쪽 엄지를 보면서 병원에 가서 항생제라도 처방받아야 하나, 이대로 손가락이 곪아서 고름이 생기면 고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풍선 터지듯 빵!! 터지기도 했다. 손톱과 피부 경계에서는 수시로 피가 스며 나왔다. 굳은살이 없어진 부분의 살이 시뻘겋게 부풀어올라 이대로 피부가 고정되어 버리면 네일 아트 받을 때 곤란하겠다 싶었다. 벌건 피부살이 손톱 위까지 올라와 핏기를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징그러웠다. 처음 며칠간은 얼굴 뾰루지나 여드름에 붙이는 작은 원형 반창고를 붙였는데 그 반창고가 오히려 더 상처를 부추기는 거 같아서 사용하지 않고, 상처연고만 핸드크림 바르듯 수시로 발랐다. 이대로 안 나으면 어쩌나 오만가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내 몸은 치유력을 십 분 발휘해서 세균들을 죽이고 다시금 굳은살을 만들어 냈다. 내 평생에서 가장 긴 러닝타임 영화였고, 흑백영화였고, 독재자 마르코스에 대한 미시적 암시가 가득한 영화였다. 굳은살을 뜯을 이유가 충분했다. 

p.s. 내가 아는 가장 긴 영화는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 438분(=7시간 18분). 아쉽게도 보지 못했고, 벨라 타르의 은퇴작 <토리노의 말>은 개봉했을 때 극장에 보러 갔다가 필름 끊겨서 못 보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사탄탱고 작가의 2025 노벨상 수상 축하!


최근 극장에서 본 독재 or 쿠데다 소재의 영화를 언급해 본다.


<악마의 등뼈>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프랑코 시절 스페인 내전이 배경이다.


<카노아: 부끄러운 기억> 감독: 펠리페 카잘스. 1968년 멕시코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 극우 성향의 성직자가 무고한 청년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성직자를 맹신하는 무지한 산골 동네 사람들이 그 청년들을 곡괭이 같은 걸로 때려죽인 사건이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광장 싸움 씬의 실화 버전. 


<아임 스틸 히어> 감독: 월터 살레스. 일단 실화다. 1971년 브라질 군사 독재 정권 하에 발생하는 실종 사건이 주요 내용이다. 이때 군사 정권에 반대한 전 국회의원(현 변호사던가)이 군부에 잡혀 가고 석방되지 못한 채 실종된다. 영화 속에서는 경비행기가 사막인가 바다에 사람을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온다(어쩌면 아닐 수도. 최근에 이런 류의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어떤 영화인지 헷갈린다). 노상원이 기획했던 처단의 구체적인 장면이 나오는 영화다.


<그때 그 시절> 감독: 젝 네오. 정치 풍자 코미디 영화. 싱가포르 정부의 말도 안 되는 정책에 반대하여 정당을 만들고 반정부 시위를 하는 내용이 영화의 절반쯤 된다. 시대는 1980년대 싱가포르.


<승리>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내연녀(이다 달세르)와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알비노 달세르)에 관한 실화 바탕의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무솔리니의 혼외자 아들이 자신이 무솔리니의 아들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면서 무솔리니 연설을 행동까지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이 혼외자 아들은 정신병원에서 자살(1942년, 26세)한다. 무솔리니는 1945년(61세) 총살형을 받았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도망 중인 무솔리를 잡고, 그날 어쩌면 다음날 재판, 같은 날 어쩌면 다음 날 총살형으로 처형받았다. 총살형 집행까지 최대 72시간 걸린 듯. 윤서결 왜 아직 살아 있지????????????? 무솔리니 시대의 야만을 잠시 빌려 쓰면 안 되나? 


<굿모닝, 나잇>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 1987년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 이탈리아 붉은 여단(네이버 ai 브리핑에 의하면 극좌 테러 조직이라고 한다)이 저지른 모로 총리 납치 살인이 내용이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그래서 너무나 가지고 싶어 하는 극단적 정치 조직(극좌든 극우든)이 어떤지 보여주는 영화. 과거엔 극좌의 폭력이, 요즘은 극우의 폭력이.


<공화국의 독수리> 감독: 타릭 살레. 이집트의 독재 정권 풍자 영화다. 이집트 출신인 감독은 정권을 비판하는 다수의 영화를 찍었다는 이유로 이집트에서 추방되었고 현재는 가족들과 함께 스웨덴에 거주 중이다. 이집트 입국 금지라던가.


<크렘린의 마법사>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러시아의 독재자 푸틴이 주인공인 영화다. 놀랍게도 무려 푸틴 역의 배우는 주드 로!!!!!!!!!!!!!!! 이 섭외에 푸틴도 매우 흡족했으리라! 주드 로 정도의 배우가 아니었다면 아사야스 감독은 암살당했을 지도. 문화 금수저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필모에 이런 정치 풍자 영화가 있게 될 줄이야!! 그것도 현존하는 존엄 블라디미르 푸틴 풍자 ㄷ ㄷ . 이런 영화를 도널드 트럼프가 부러워합니다. 트럼프 역에 디카프리오 써야 할 듯 ㅋㅋㅋㅋㅋㅋ


<쇼아1> <쇼아2>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독: 클로드 란즈만. 히틀러의 유대인 인종 청소에 대한 다큐 영화. 총 러닝타임 10시간 넘음. 


<나폴레옹 1, 2, 3, 4부> 감독: 아벨 강스. 총 러닝타임은 5시간 30분이지만 장면과 대사자막이 따로 나오기 때문에 대사 장면을 다 편집하면 2시간 남짓 길이의 영화. 실망스럽게도 내용은 프랑스 국뽕이었다. 특히 영화 끝부분에 프랑스 삼색기 총 출동한다. bgm으로 프랑스 애국가가 깔렸다면 더 완벽하고 웃겼을 텐데!! 난 나폴레옹의 몰락에 대한 영화라고 예상하고 보러 갔는데, 나폴레옹의 영웅적 일대기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는 나폴레옹의 어린 시절부터 영웅의 시작 혹은 절정까지에서 끝난다. 다 보고 난 후 소감은 프랑스판 이순신 3부작 <명랑> <노량> <한산>이었다. 아무튼 나폴레옹도 전형적인 독재자 몰락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니 이 목록에 추가해본다. 


<아 프리오리> 감독: 라브 다이즈. 러닝타임 338분(5시간 38분). 필리핀 군부 독재자 페르디난디 마르코스 시절이 배경인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 감독: 자파르 파나히. 현재도 진행 중인 이란 독재 정치 상황에 대한 영화. 감독이 실제 투옥된 경험을 픽션으로 만듦. 


<신성한 나무의 씨앗> 감독: 모함마드 라술로프. 이란 정치 판사가 주인공인 영화. 히잡 시위가 배경. 


내 엄지 손가락이 낫듯이, 아주 천천히 나을 거라고, 이 나라의 정치도 나을 거라고 믿어 본다. 


남의 나라 쿠데타 또는 독재자 영화와 내 나라의 법사위 국정 감사가 옴니버스 다큐 영화로 감상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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