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피어오른 마음은 아직도 꺼지지 않아서 룸투어 홈투어 영상들을 보면서 멍 때리는 요즘이다. 십 년전 나는 체리색 몰딩에 대한 항의로 모던&화이트&그레이&에센셜 오일 한 방을 처럼 블랙을 포인트로 힘주는 유행하는 인테리어를 하고 싶었고, 했다. 모던 & 북유럽 화이트 스타일에 대한 반작용인지 뭔지 요즘은 레트로&앤티크 스타일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감수성이 1도 없던 시절, 철저한 인간중심시대에 제작된 피아노의 찐 원목의 짙은 갈색은 보면 볼수록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중고로 팔려고 했을 때 아는 지인이 그 시절에 만들어진 피아노의 건반과 원목은 정말 좋은 거라고, 요즘은 그런 건 (자연훼손에 대한 여러 규제 때문에) 제작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집에 공간이 있다면 소장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어차피 집에 공간은 많으니까 하면서 뒀는데 팔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집에 산지도 얼추 십 년이 되어간다. 그래서일까, 변화를 좀 주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일렁일렁이고 있다. 인테리어 공사를 할 순 없으니 커튼 같은 소품이나 가구 정도로 약간의 변주를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중 가장 큰 야망은 화단 공사이다. 마당의 콘크리트를 뜯어내어 화단을 두 배로 확장하고 화단 둘레에 나무 휀스를 두르고 상추, 고추, 호박을 심고. 야생 장미도 심고 싶다. 여름에 피는 야생장미를 좋아한다. 영화 <백만엔걸 시즈코>에서 복숭아를 따던 아오이 유우룩을 하고 화단에서 풀도 뽑고 돌도 줍고 상추도 캐고 하는 상상만 해본다. 


일렁이는 내 마음을 피아노 다음으로 오래된 이 집의 가구가 눈치를 챈 걸까, 나흘 전 책장에 슬라이딩으로 설치되어 있던 거울이 낙하했다. 거울을 반대쪽으로 미는 찰나 거울이 책장과 분리되어 떨어졌다. 떨어지던 순간에는 내 발등으로 떨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발등은 피했다. 발등에 떨어졌다면 거울 무게로 인한 골절과 거울 유리 파편으로 인한 자상으로 인해 쉽지 않은 치료 과정이 필요했을 터였다. 내 발등 대신 파손 된 것은 거울이 낙하하면서 1차로 떨어진 책장 옆에 있던 파쇄기 뚜껑에 구멍이 생겼고(ㅜㅜ), 2차로 마루 3곳이 움푹 파였다. 마루 블록의 여분이 20여 장쯤 있는데, 내가 셀프로 할 수 있을지는 의문. 깊이 파인 마루의 홈을 보면서, 거울의 모서리가 마루대신 내 발등을 찍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내 몸 다치는 건 보단 마루와 파쇄기가 조금 부서지는 게 훨씬 낫지. 


슬라이딩 거울이 설치된 책장은 일룸 알투스 제품 중 1개로 나는 이것을 책상과 다른 책장들과 함께 2010년에 구매해서 여전히 소중하게 잘 쓰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본 좋은 책상 세트였다. 아마도 평생 사용하지 싶다. 그런데 나름 책장 도어 역할을 했던 거울이 떨어져서 금이 간 것이다. 화장대가 없던 시절, 나의 화장대가 되어 주었던 소중한 책장이었다. 일룸에 AS 신청하면 거울교체 정도는 해 줄 거 같은데, 어쩌면 거울 교체 비용이 이 책장 전체 당근 가격보다 비쌀 것도 같다. 너무 구형이라 당근에 매물이 없을 거 같지만. 일단 거울은 다락에 올려두고, 거울 뒤에 지저분하게 숨어 있던 잡동사니들을 다 꺼냈다. 신발 상자에 넣어둬도 될법한 깃털처럼 가벼운 잡동사니들이 대백과사전도 거뜬히 수납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책장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잡동사니들(여분의 휴대폰 케이스, 휴대폰 액정필름, 각종 크기의 파우치들 등등)은 다 꺼내서 버리기 아까워서 가지고 있던 각종 명품상자(디올, 미우미우 그리고 우영미 모자 상자(이건 뚜껑 마감에 자석까지 있음!) 등등)들 속에 넣었다. 잡동사니가 비워진 책장 한 칸에는 민음사 세계문학 중 얇은 책들을, 또 한 칸에는 시집들, 또 한 칸에는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를 넣었다. 이렇게 시작된 책장 정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연휴 내내 정리하지 싶다. 보존 서가(다락)로 보내야 할 책 혹은 작가들이 또 발견되는 중. 현재 보존 서가에 있는 작가는 움베르토 에코와 무라카미 하루키(아련...)


(ps. 내가 얼마나 한심한 수납을 하고 있었냐면, 알라딘 굿즈로 구입한 연약한 플라스틱 본투리드 3단 트롤리에는 책을 꽉꽉 채워 넣어서 책 무게로 인해 트롤리가 앞으로 쏠려 있었고, 책 100여 권은 수납해도 될 정도로 튼튼한 책장에는 가볍디 가벼운 잡동사니들과 여분의 문구류를 수납하고 있었던 것. 현재는 책장에 있던 잡동사니는 트롤리와 예쁜 상자들에, 책장에는 트롤리에 있던 책들을 옮겨 넣었다! 이 책장의 하부도 문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픈형 책장의 하부에 있던 지저분한 서류와 파일들을 넣어 두었다. 서류 중에는 이 집을 지을 때 여러 번 수정해서 받았던 집 설계도 꾸러미, 각종 파일에는 몇 년 치의 나의 병원 영수증이 ㅜㅜ)


일렁이는 마음으로 본 홈투어 영상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을 소개해 본다. 그것은 채널명 문나잇의 5평 원룸 옥탑 / 인생 첫 자취방 영상이다. 에릭 로메르 영화라도 된 듯 나는 이 영상에 홀리고 말았다. 홀린 데에는 집주인의 인테리어 솜씨와 영상 제작 실력도 큰 몫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의 첫 자취방을 떠올리 게 하는 작은 현관과 작은 싱크대 때문이었다. 여자 운동화 세 켤레 정도를 나란히 놓으면 꽉 찰 거 같은 초미니 현관과 완벽하게 잊고 있었던 상판이 스텐으로 되어 있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높이만큼 낮은 가스레인지용 싱크대를 보는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아련함... 지금 나는 현관 한쪽에는 가로 1미터 정도 되는 벤치를 두고 벤치에 앉아서 거대한 택배 상자도 해체할 수 있을 정도의 너른 현관을 두고 있다. 현관이 좁은 집들에 살면서 내 집을 가지게 되면 현관만은 기필코 넓게 하리라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던 탓. 실제로 집의 평수에 비해서 현관이 넓음. 그릇 건조대를 올려놓고 남은 A4용지 보다 작아보이는 공간에 도마를 올려두고 요리를 하는 그녀와 10배 정도는 더 넓고 좋은 주방에서 요리를 거의 하지 않고 지내는 내가 비교되었다. 각종 요리 재료로 꽉 찬 그녀의 냉장고와 양배추, 방울토마토, 삶은 렌틸콩, 삶은 계란 정도만 들어 있는 텅 빈 나의 냉장고가 비교되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세련되고 비싼 인테리어의 넓고 좋은 집보다는 좀 낡은 구식의 오래된 좁은 집에서 저렴하지만 나름의 멋이 있는 것들로 장식한 집의 룸투어가 더 재미있고 좋았다. 위에 언급한 5평 원룸 옥탑 같은 집이 한강뷰의 60평대 아파트 보다 만 배는 재미있었다. 또 같은 5평 원룸이라도 오피스텔은 재미가 없었다. 가장 재미없는 룸투어는 신축 아파트 신혼부부의 집이었다. 재미없는 이유는 너무 뻔해서. 신축 아파트는 대체로 재미가 없었고 구형 주택이나 빌라가 재미있었다. 넓은 평수의 4인 가족이 사는 집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도시탐구라는 채널의 부암동 68평 빌라였다. 구식이라고 남들이 다 뜯어버리는 것을 그대로 두고 재치 있게 살려두고 활용하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5평 원룸(채널명 문나잇)도 마찬가지인데 모두가 혐오하는 체리 몰딩을 기적처럼 살려서 예뻐 보이게 한다. 내 평생에 체리몰딩이 예쁘다고 느꼈던 건 제주도 해비치 호텔이 유일했다. 그때 알았다, 체리 몰딩은 대형 평수의 고급 주택의 고급 진짜 체리목 가구(mdf에 체리색 시트를 붙인 게 아닌)에서 빛이 난다는 걸. 이 견고했던 생각을 깨 준 게 유튜버 문나잇이었다. 체리색 시트를 바른 몰딩도 꾸미기에 따라 예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상하게도(또!!) 최신 인덕션레인지에서 브랜드 제품의 유행하는 냄비로 요리하는 장면보다는 낡은 가스레인지에 재래시장의 그릇 가게에 팔 법한(다이소 말고 천냥 마트) 먹색의 작은 편수 냄비로 하는 자취생 요리 영상이 그렇게나 재미있다. 예를 들면 5평에 살던 문나잇 요리씬들. 하지만 문나잇도 점점 구독자가 늘고 광고 협찬도 생겨서 요리 도구들이 세련되어짐에 따라 재미는 줄어들고 있다. 예전에도 그런 일상 브이로그 유튜버가 있었다. 인기가 늘어날수록 초창기의 소박함이 없어져서 영 안 보게 되다가 요즘 다시 생각나서 초창기 영상 몇 개를 봤다. 지금의 화려함보다는 초창기의 소박함이 백 배 정도 잼났다.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발전하는 게 동기부여가 될 것이고 지금의 화려함이 좋을 테지. 나 역시 그러할 테니. 나보고 지금보다 작은 집, 작은 차 등 모든 걸 다운그레이트 하라고 하면 할까? 


나는 내가 더 많은 부를 누릴 능력이 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더 소박한 삶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좋은 집의 좋은 인테리어로 채워진 집에서 아파트 광고 속 인물처럼 사는 사람보다는 작고 오래된 집에서 정갈하고 개성 있게 사는 사람을 봤을 때 경의와 감탄을 하게 된다. 승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내가 졌네.'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소박함을 즐기는 자들이 종종 있다. 그것은 마치 권여선의 소설 <레몬>에서의 주인공 한만우 남매의  1인 두 개의 계란 후라이처럼. 한 개는 맛소금, 한 개는 케첩으로 먹는 근사할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반찬이 유명 셰프의 예술 작품 같은 요리와 소스들보다 더 먹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처럼. 영화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이 작은 캠핑카의 공간을 늘리기 위해 매트리스 아래에 서랍을 두고, 남편의 목재 낚시 상자를 벽에 달아서 뚜껑을 열어 작은 초미니 테이블로 사용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굉장한 부러움과 경의를 느끼곤 한다.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다. 오늘 아침에도 봤다. 요즘 제일 자주 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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