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감독과 함께 한 다큐 데이트


▲ 할머니에게 보여드리려고 만들었다는 문정현 감독의 <할매꽃>은 개봉되지 못할 뻔했다. 문 감독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영화가 주인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문 감독은 영화를 접을까도 깊이 고민했다고 한다. <할매꽃>은 (당시)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말못할 사연을 알아보기 위해서 손자인 감독이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 속에서 현대사와 가족, 이웃, 인간의 비극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다큐멘터리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다큐멘터리를 즐겨 본다. 소설가로서 감정 이입이 잘 되며 스크린 바깥, 그리니까 찍지 않은 부분과 다큐가 말하지 않는 부분이 상상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극 영화는 스크린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우리나라는 할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는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하지 못할 이야기가 많다. 3월 18일 저녁 알라딘과 인문사회과학출판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할매꽃>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러 갔다 왔다.(홍대 KT&G 상상마당) 이미 DVD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소설가 김연수 작가가 힘을 보태기 위해 흔쾌히 자리에 동석했다. 그의 최근 작품인 <밤은 노래한다>의 상황을 한 마을의 한 가족에게 대입한다면 <할매꽃>과 비슷하게 그려졌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팜플렛을 통해서 현대사와 가족의 문제를 다룬 다큐라는 설명을 보고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은 대개 극적인 부분을 과장하거나 너무 진지해서 지루한 일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는 다른 종류의 난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김연수에 의하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객관적인 위치가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고 작업을 하는 내내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문정현 감독 본인도 "앞으로 다시는 가족에 관해 찍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다.
이 난제들을 어떻게 녹여낼 수 있었을까? 영화는 문 감독의 감미로운 나래이션으로 시작되었다. 문 밖에만 나가도 쉽게 볼 수 있는 사람 좋은 할머니의 인생이 그 비밀을 드러냈다. 임종을 앞둔 할머니에게 바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던 감독은 결국 영화를 할머니의 영정 앞에 바칠 수밖에 없었다.

문 감독은 우선 작품의 범위를 자신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로 철저히 한정했다. 전쟁 상황에서 학살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갈등과 국내의 상황은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 당대의 상황은 마을 안에서도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그 동안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치 상황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얼키고 설킨 인간적 감정들이 정치적으로 반영돼 비극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현대사를 둘러 보면 개인의 사적 감정이 국가 대사에 공공연하게 개입되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예컨대 제주 4.3 당시 제주민들을 가장 가혹하게 괴롭혔던 사람들은 북한에서 쫓겨난 부잣집 자식들로 이루어진 서북청년단원이었다. 이들은 반동분자 색출이라는 명분을 개인적 감정과 구분하지 않았다.


새벽 3시에 미친 사람 같이 몸부림쳤던 그의 외할머니와 나의 외할머니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폐부 깊숙이 찌르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나의 개인사 속으로 다큐멘터리가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인데, 나아가 나의 비밀까지도 들춰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가 좋던 동네 친구에 의해서 동생이 즉결처형되고 또 다른 동생은 고문으로 잃고, 면회간 다른 동생은 경찰이 쏜 공포탄에 의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가세가 완전히 기울고 남은 전답을 마저 팔아야 하는 날 새벽 3시 외할머니는 산발차림에 신발도 신지 않고 자신의 소유였던 밭을 헤매며 죽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우물에 몸을 던지려고 우물 안으로 고개를 쳐드는 순간 달빛에 비친 우물물 속에 자식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떠올라 끝내 죽지는 못했다고 한다. 새벽 3시에는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와 추억이 겹친다. 제주도민이라면 누구나 4.3 당시 희생된 친척이 있는데, 지식인이었던 외할아버지가 영문도 모르게 잡혀간 이후에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책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제주도에 살던 지식인들은 제거대상 1호였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감춰야 했다. 외할아버지의 책이 문제였다. 할머니는 새벽 3시마다 남몰래 책을 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이 끝도 없어서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어머니는 만약 그 때 책을 태우지 않고 남겨 두었더라면 골동품 가치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마을과 중대마을은 예로부터 양반들이 살던 마을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대마을'이라고 불리던 '풍동마을'은 하인이나 천민들이 거주하던 마을이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의 감정의 골은 깊을 대로 깊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 감정의 골은 여지없이 비극을 낳았다. 비극으로 인해 선량한 한 가족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데,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의 가족을 만나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다큐멘터리는 영화 내내 고민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할매꽃>은 '현대사'를 다루고 있지만, 작품의 주제는 철저히 '인간'이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작용한 결과가 현대사의 비극이며 <할매꽃>의 주변을 이루는 이야기일 뿐이다.

워낭소리가 인생의 큰 의미를 알게 해주는 훈훈한 다큐멘터리라면 <할매꽃>은 이제 당신의 고민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물음을 던진다. 문정현 감독은 시사회가 끝난 후 나눈 인터뷰에서 "고민하지 않고 완결되는 다큐멘터리는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 안에 담긴 깊은 질문과 서사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 영화와 인터뷰가 끝나고 밖에서 서성대다가 문정현 감독을 만나 사진을 찍었다. 나에게도 아직 시작하지 못한 4.3 이야기가 가슴 한켠에 남아 있는데, 문정현 감독은 소설이 되었건 영화가 되었건 지금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작품으로서뿐만 아니라 인생으로서도 '해원'할 것은 반드시 해원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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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3-25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좋았던 작품입니다.

승주나무 2009-03-25 15:30   좋아요 0 | URL
네.. 워낭소리가 열어준 길에서 좋은 다큐들이 하나씩 걸어나오는 모습이 기분 좋네요..
<똥파리>도 보고 싶어요~~
다큐 전성시대!!!

무해한모리군 2009-03-26 08:47   좋아요 0 | URL
아 똥파리라.. 제목 기가 막히는 군요.. 메모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