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향기 - 전2권 세트
김하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운명은 없다.

그래서 살짝 표지만 넘겨보구서 하아~ 그렇고 그런내용이겠구나. 서른넘은 아줌마가 읽기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겠군. 하고서 한참을 서재에 꽂아 두었다. 그런데 나날이 나날이 메말라가는 내 가슴이 안스럽기도하고 작가의 이름이 곱기도 하고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 비록 그것이 가상공간이라 할지라도- 모습을 엿보고 싶기도했다.

그러나 책을 들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고국에 남겨두고운 사람들의 향기때문이리라.

어느날 계절갈기를 하려고 붙박이 장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상한데? 고국을 떠난지 수년세월이 흘렀는데.. 엄마 냄새라니? 분명히 친정엄마 체취였다. 결혼전, 한번씩 겉옷이라도 걸칠량이면 묘하게 코끝을 아리던 엄마의 체취. 얼른얼른 벗어버리고 로션 담뿍 바르곤했었는데. 그런데 엄마냄새라니? 남편의 옷과 내 옷이 뒤섞인 장속에 들어가 킁킁대며 옷 하나하나의 냄새를 맡아가기 시작했다. 와이셔츠며 바지며.. 남편의 옷에서 나는건 분명히 아니고.. 그렇다면? 나는 깜짝놀라 서랍까지 열어가며 내 옷들에서 나는 엄마냄새를 맡기시작했다. 그렇게 싫었던 냄새인데. 향수까지 선물할 정도로. 엄마에게서 수백수천 떨어진 내 옷장속에서 엄마냄새가 나다니!!

그것은 사실 나의 체취였다. 이십대 생화같은 향내가 아니라, 주부 6년차의 숨길수없는 살냄새였다. 기묘할정도로 엄마를 닮아있는..... 성격도 얼굴도 하나도 엄마를 닮은 구석이 없었던 나였는데..... 나는 엄마의 체취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것이다. 장을 뒤지다 말고 나는 그만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말았다. 내게서 엄마냄새가 난다는 이상함때문도 아니고, 그렇게 싫던 냄새가 나의 것이 되어서도 아니었다. 이론적으론 분명히 내 체취였지만, 나는 나이 들어가는 내게서 엄마의 몸냄새를 맡고있었던 것이다... 그리운 엄마의 품냄새를.

다행이었다.

국화꽃향기는 그런 경험 이후에 읽었음으로. 삼일이나 감지않은 여대생의 머리에서 평생 지울수없는 국화꽃 향기를 맡을수있다니. 나는 국화향을 잘 안다. 감성이 세밀하던 여중생시절, 우리 학교 뒷편에는 고 우장춘 박사님이 연구를 하셨던 원예 고등학교가 있었고 해마다 가을이면 국화축제가 열렸다. 등하교 길에 차도에서 올라오는 매연보다도 더 강하고 분명하게 맡아지던 국화꽃 향기. 그것은 미주의 머리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그녀의 삶에서 나오는 향이었겠지?

김하인의 소설은  계란말이 같다. 특별히 들어간 재료도 없이 둘둘말아 상에 놓였는데도 늘 손이 가는 계란말이처럼, 앞뒤도 분명치않고 깊이있는 정보도 주지 않은채, 그런데도 계속 읽어내려가게하는 심심한 맛이 있다. 나는 아직도 삼일감지않은 여대생의 머리냄새때문에 평생을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되어준 주인공이 이해가 되지않는다. 결혼이란, 열정이란, 인생이란 그런 허상에게 무조건적으로 퍼부어야할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의 삶에 끌리는 것은...

실상 국화꽃 향기를 뿜어대고 있는 것은 미주의 머리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 맡으면 취할정도로 어지러운 깊은 국화향은 승우, 본인이 내고 있는 향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자신의 온전한 향을 인지하게 해주는 매게체일까?

그런것 같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서, 내가 알지못하던 나의 숨은 부분이, 숨어있던 성격이, 숨어있던 상처가, 숨어있던 낮은 자존감이, 숨어있던 버릇들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들을 보면....

얻지못한 사랑을 구하며 모든 에너지를 쏟을때보다, 함께 있던 사랑이 사라질때 더 힘이 빠지는 법. 소망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동시에 두배로 생산해내지만, 소망의 상실은 몸속에 있던 모든 기운을 소멸시켜버린다. 그래서 나는, 미주의 미련한 결정에 찬성할수밖에 없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은, 암에 대한 처절한 투병생활에 대한 공포도 아니고, 자신의 초췌해질 모습을 보는 두려움도 아니고..... 승우였다. 미주를 잃고난후 완전히 기가 소멸될 승우. 그이에게 삶의 의미를 줄수있는길, 오리온성좌저편에서 항상 그이를 바라볼 미주자신의 눈길을 가까이서 느낄수있는길, 그녀의 호흡을 그녀의 살결을 남길수있는 유일한 것을 남겨야만 했다. 그것이 적에 대한 단순한 반기보다 더 강한 인내를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계절은 가더라도 승우의 계절을 찬란하게 해주기위해...

운명은 없다.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승우는 미주에게 운명을 걸었다. 그리고...

승우는 주미에게서 미주를 맡는다. 아니다. 승우는 주미에게 자신의 진한 국화향을 매일매일 느끼게 해줄것이다. 강하고 분명한 사랑의 향기를. 또한 그는 주미에게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되어줄것이다. 주미의 인생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줄것이다....엄마가 내게 해주셨던 것처럼. 만추의 끝, 엄마에게 국화꽃 한다발을 보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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