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알리바마에서 생긴 일>이란 흑백영화를 책보다 먼저 보았다. 어릴때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명배우 그레고리 팩이 변호사로 나와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대 남부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해결하려는 모습이 무척 멋졌다. 사실 그것이 더 주요한 사건이긴 한데 그의 두 자녀 스카웃과 젬이 겪는 성장기의 일면이 또다른 사건전개로 엮어져있었기에 두 번 세 번 보고서도 계속 흥미로왔다. 그런데 역시 글이란, 단지 문학적 가치의 차원을 넘어서서 시각적인 영상이 보여줄수 없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명화이든 명작을 대변할수 없다는 말이 있나 보다.

뻔히 무죄가 입증되는 데도 백인 우월주의라는 사회적 편견이 선량한 흑인 톰은 최악의 강간범으로 몰아간다. 모두들 백인 부녀의 평소 삶에 혀를 차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거기에 흑인이 개입하자 비난의 화살이 모조리 흑인에게로 향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변호가 따른다 하더라도 편견과 군중심을 이길 수 없는 부조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개탄이 새삼 다가온다. 내 안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 분노와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띈 타인을 평가절하하는 못난 모습들이 얼마나 많이 현존하는가.

책의 서두에, 화자인 스카웃은 오빠의 부상으로부터 얘기를 풀어나간다.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는 딱 두 번 절묘하게 서로 교차한다. 갈등이 최고조로 달한 두 번의 순간, 어이없게도 갈등을 푸는 이는 모두 엉뚱한 인물이다. 범죄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처단하고자 모여든 마을 주민앞에서 홀로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핀치변호사. 그가 자신의 방어에 한계를 느낄때 그를 구원해준 이는 어린 딸 스카웃이었다. 천진한 아이의 밤인사 몇마디가 어른들의 손에서 분노의 횃불을 거둬드린 것이다. 핀치변호사의 위력적인 법정변호가 있은 후 복수심에 불타 스카웃과 젬을 헤치려 범인이 은밀히 다가왔을 때도 마찬가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문제아로 외면되고 있던 아서 아저씨가 편견 가득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이들을 구하는 도우미로 등장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정상적>이고 <객관적>인 <성인>들은 위기의 순간에 어디에 있는가. 누가 누구를 방치할수 있고 무시할 수 있을까. 결국 신은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과 스스로 건장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섞어 두심으로 날카로운 대립속에서 그나마 눈물과 화해와 엉뚱한 카타르시스들을 엮어가시는 게 아닐까...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사회적 불평등과 특정 군중의 오만에 항거하는 마음이 일지만, 사실 그 분노들은 내 안에도 똑같은 요소들이 심겨져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 진다.

성장기 소설과 법정 소설의 두 영역을 조화롭게 엮은 <앵무새 죽이기> 핀치 변호사의 가르침 - 아무런 방어 능력 없는 앵무새와 그것을 죽일 힘을 가진 나 사이에서 권력자인 내가 가져야할 도덕경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강한 자는 연약한 자를 돕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성경의 말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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