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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ㅣ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님의 성장소설을 읽고나면 한 문장으로 느낌이 압축된다.
<위대한 문학의 힘!>
내가 자란 마을은 도회지도 아니고 한적한 시골 읍내였다. 그럼에도 대도시 인근에 접해있어서 시골 다운 모습이 별로 없었다. 새벽이면 소달구지를 끌고 나가시는 윗 골목 아저씨도 계셨고 정월 초하루부터 동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전통 행사들이 마을 곳곳에서 벌어졌건만 막상 성장기를 추억할만한 시골 내음은 기억에 없다. 그런데도 박완서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없던 고향에 대한 향수가 뭉글뭉글 올라온다. 마치 내 고향에서 엿을 고으는 것 같고 내 고향 뒷간도 그랬었던 것 같다. 사진으로만 낯을 익힌 할아버지의 두루마기가 손끝에서 만져지는 것 같고 뭔지도 모르는 싱아란 것이 입에서 씹히는 것만 같다.
박완서님은 글에서 은근히 이상님의 글한수를 꼬집고 있다. 도회지 소년은 알 수 없는 시골의 분주함과 다양한 먹거리 놀이거리들을 바삐 늘어놓으시면서. 그랬다. 내가 코박고 책보는 일외에 할 일 없어 할때 창문너머에서는 동,리에 사는 또래 친구들이 언제나 발걸음을 멈출 새가 없이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바쁘게 오고갔다. 그래서일까. 세돌이 되어가는 아들녀석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가는 걸 보노라면 내가 괜히 행복해진다. 철봉이나 그네에 매달리는 재미보다 나무나 풀을 보고 행복해하는 아들녀석에게서 뿌듯함을 느낀다. 어머니의 교육열로 외로운 학창기를 보내며 홀로 고개를 넘는 박완서님의 단발머리를 그려보노라면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길가에 심겨진 환한 개나리 무리밖에 없었던 나의 학령기가 뚜렷하게 떠오르면서 말이다.
<그 많던 싱아..>는 시댁에서 형님이 보내주신 책이다. 미국생활의 적막함과 낯설음을 잠시나마 잊어보라고. 물론 형님의 쪽찌 속엔 은근히 동서를 약올리는 재미도 엿보이지만. 밤새읽고 후권도 보내주십사 전화를 드렸을때 형님은 그 이후의 글들은 ‘슬프다’고 언지를 주셨다. 왜요? 라고 묻기도 전에 ‘그 사람들이 변해 가거든..’하고 말꼬리를 흘리신다. 격변기에, 제 옷 입은 듯 제 위치와 제 역할이 있던 사람들이 역사보다 더 빠르게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해가는 장면 장면들....생존문제와 도덕률의 GAP에서 직면해야 하는 갈등들.. 그 낯선 시대적 환경이 강원도의 힘 아니 문학의 힘에 의해 거실 한구석에서 숨죽이며 남의 가족사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까지 살갑게 전달되어 왔다.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자초하지 않은 불행을 짊어지고 고통받아야 했을까. 한두사람의 결정으로 인한 전체의 고통은 비단 우리 민족의 일만은 아닐것이다. 링컨 기념관을 중심으로 한쪽엔 일그러진 얼굴의 수많은 병사들의 얼굴들이 , 또 다른 편에는 희생자들의 이름만이 적힌 기념 공원이 각각 세워져 있다. 전쟁의 상흔을 일면 보여주는 한국전당시 참전 병사들의 얼굴도 가슴 시리게 하지만, 검은 대리석에 이름만 빽빽이 남은 베트남전 기념비석이 더 깊은 아픔은 느끼게 한다. 감정이 빠진 글자들에서 느끼는 비애. 책은 덮었지만 절망은 그치지 않았다. 전후에는 희망의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