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둔 현재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며 대통령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닐까. 그런 부분에 있어, 유시민의 저서 <국가란 무엇인가>는 가장 중요한 부분중 하나인 국가관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저자인 유시민은 자신을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규정하고 있기때문에, 그러한 자신의 국가관에 대한 변론도 꽤 흥미있기도 했고 그러한 결과로 도출되는 과정- 수천년동안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국가관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에 대한 과정을 쉽게 그렸는데 본인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을 담은 글쓰기를 통해 나온 책이어서 그런지 독자들이 읽기쉽게끔 써져있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책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면, 크게 4가지 국가관- 즉, 홉스의 이상국가인 전체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국가주의 국가관 (이념형 보수, 국가주의) 애덤스미스, 루소, 밀, 소로 등 여러 철학자들이 이상국가로 생각해온, 국가란 공공재 공급자에 지나지 않으며,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선 안되는 것을 강조한, 자유주의 국가관 (시장형 보수, 자유주의) ,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여겼던 맑스의 공산주의 국가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목적론적 국가관을 예로 들었다.

이러한 국가관의 나눔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국가’라는 것이 유시민이 말하듯,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모든 논의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맑스를 비롯해서 많은 사회주의 학자들, 아나키스트들이 ‘국가’는 선한 대상이 아니라,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을 비교하자면 그 간극은 너무도 깊다. 그렇기에 책에서의 김상봉 교수의 말처럼, 결국은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일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사유는 자유주의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박노자가 예견했듯, 국민참여당과 민노당의 한집살이는 필연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 책과는 다른, 박노자의 생각을 담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박노자의 국가론이 삐딱하게 보이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개념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할텐데, 이 책의 서문에서 김동춘 교수가 말하듯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가 불편함을 주는 까닭은 이책에 담겨 있는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국가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중적 모습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의 폭력성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국가의 기능에 기대를 걸고 있는 모순에 대해서 박노자는 사정없이 폭로해버린다는 것이다. 국가란 태생적으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 밖에 없기때문에, 국가를 합리적인 조절자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단언한다. 그의 말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냥꾼에게 불살삼계를 설법하는 일과 다를 게 없다.”며 피를 먹고 자라온 자본주의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는 대공황 때 23%에 달했던 미국의 실업률이 전쟁 특수와 대량 징병을 통해 1%로 떨어지고, 워싱턴 근로자들의 실질소득도 전쟁 호경기로 인해 42%나 늘어났다는 통계를 증거로 내놓기도 한다.

 

과연 어떤 국가론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내가 섯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현 정부에서 해온 폭력을 놓고만 본다고 한다면 그러한 폭력에 대한 비판은 모두가 같으리라 생각한다. 박노자의 비판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수 밖에 없다는 결과를 도출 할 수 밖에 없다”에서 그치는 반면, 유시민의 개량주의는 “정치를 통해 최악을 면하고 그보다는 나은 선을 추구하여 국가를 선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어야한다.”라고 말하고 있어,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나 변화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더 매혹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유시민이 말처럼 그것이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지젝의 말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어린이들이 죽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윤리의 부재가 지속될 수 밖에 체제다’고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과연 무엇이 옳은가. 그러한 논의에 대한 해답은 끝이 없겠지만 유시민이 말처럼, “ 마르크스 주의자는 선거(정치)를 통해 정부를 교체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적다”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뼈아프게 통감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선거는 어차피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 다툼이며, 민주주의 정치는 사회혁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오도하는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바꿔놓은 것이 없기때문에 대중들은 더욱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는 정치인이라면, 정당인이라면 어떤 행위가 진정 사회를 위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당의 내부인이 불합리하게 국회의원자리를 내려놓는 것을 막기위해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모두 버려가면서까지 자신들의 내부권력을 유지하고자하는 것이 ‘진보’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정치와 권력이 분리된 전지구적 ‘공백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며, 이 정치와 권력이 다시 만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인류가 마주한 최대의 과제”라고 말한다. 그에 있어 우리는 어떤 것에 희망을 가져야하는가. 국민 개개인이 가진 표를 활용하여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이에게 주어져야하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하는가. 그러한 논의는 끝이 없이 계속되어야하며 국민 개개인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ps. 국가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을 담은 <의자놀이>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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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23살 나이에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를 불태워 죽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한 노동자의 죽음은 전혀 중요한 사건이 되지 못했지만, 그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고, 평생을 주린 창자가 차토도록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드물었으며, 죽을 때까지도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았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존경받아보지 못하고 이름 없이 살아왔지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죽어간 그의 죽음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은 오늘 지금까지도 유효할 것이다.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아보지 못했기때문에 그 시대의 노동환경이 어땠는지 짐작하기는 힘들겠지만,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지 않나 한다. 엄연히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평등해야할 인권,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환경에 있던 피복재단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것 같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노동환경이 나아진 것에는 그의 투쟁과, 그의 숭고한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러한 환경에 살고 있을 수 있었을까. 자본가들은 더욱 착취하고, 노동자들은 더욱 착취당하는- 기본적 윤리가 부재한 세상에 살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타까운 생각이 앞서기도 한다. 박정희라는 우상화된 망령이 대한민국을 아직까지도 뒤흔들고 있음에도, 우리는 올바르게 전태일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고 있을까. 2008년 2월 지엠대우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명박 당선인은 비정규직의 절규를 들어라’며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고, 그해 여름 KTX와 새마을호 승무원들은 서울역 40m 조명철팝에 매달렸다. 뿐만아니라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8년 공장 옥상에 올라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94일이라는 사상 최장기간의 단식농성을 벌였다. 2009년 1월, 망루위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던 용산 철거민들은 용산참사 이후로, 아직까지도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뿐인가, 2010년 여름에 시작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포크레인 점거농성, 기아차 모닝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숙투쟁, 공장 정문 아치에 올라 영하 30도 동상 걸린 발로 64일 고공농성을 벌인 지엠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투쟁하며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화’를 요구했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송전탑에서 88일동안 싸운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 대학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투쟁들, 수백명의 사람들이 옥살이를 하며 투쟁했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22명이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이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힘없는 자들, 자본의 탐욕과 정리해고의 부당함에 의해 배제된 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너무도 많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들은 너무나도 차갑다.

-때문에, 우리가 읽은 이 책 <전태일 평전>의 뒷장의 신영복 교수의 말했듯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을 필요가 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속에 점철되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이 평전의 필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삶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전태일을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옮겨와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을 밝은 얼굴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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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이후로 읽은 책 중에서 나에게 영향을 끼친 책들은 많겠지만, 그 중에도 빼놓을 수 없는 책이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다. 2002년에 출간된, 파란눈의 한국인이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대한민국을 낱낱이 파해치는 책이이다. 그가 겪었고, 그가 아파했지만 우리는 그냥 흘려보냈던 것들에 대한 지적은 뼈저리게 날카롭다. 

이 책에서 그가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에 더욱이 그렇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사회가 그가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경화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그는 한국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우리 역사에 대해 한국인보다 더 나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책 읽기에 있어 굉장히 해박한 사례들을 소개되어 있어 읽기가 편했다. 특히 그가 겪었던 일화를 예로 들며, '스님'이 군대에 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던 부분에서는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 그러한 생각은 왜 하지 못했나,그런 것에 대한 논의는 왜 금기시되어있는가 라는 자기비판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또 이번에 이 책을 4년에 다시 읽으면서 다시 공부하게 된 부분이 많았는데, 국가주의, 파시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아진 것 같고 박노자의 칼럼을 분석하면서 그의 아나키즘적 사유가 한국사회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현안들에 있어, 합리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다시금 인식 할 수 있었는데 최근 문제가 된 올림픽 배트민턴 고의 패배에 대한 부분, 펜싱 신아람선수의 상대방 선수와 심판에 대한 사이버테러에 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것은 분명 그것이 우리나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를 벗어나서 생각한다면 굉장히 비합리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것인데, 인간은 그런 것들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기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의 여러국가들에 비하면, 우리의 윤리적 표준은 분명 아직까지도 발전해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권의 책이라도 더 읽어야 하지 않나한다.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서 언급하듯, 우리는 우리의 윤리적 표준을 정상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 '독서의 해'를 선정해서 "제발 책좀 읽으시오"라고 광고를 하는 사회가 아닌, 책을 읽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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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본 영화는 <이온 플럭스>와 <네버 렛미고>이다. 두 영화는 분명 장르도 다르고, 영화의 전개양상도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같지 않나 싶어서 함께 포스팅 한다.


영화 <이온 플럭스>의 배경은 한 바이러스가 세계 인구의 99%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고, 과학자 "트레버 굿차일드"에 의해 개발된 백신으로 생존한 5백만명의 사람들이 그가 건설한 도시 "브레그나"에서 살아간다. 사실 개발된 백신에 대해서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불임'이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면, 인간은 멸종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트레버는 '인간 복제'를 시도하고, 그것에 성공하여 죽은 인간의 DNA를 복제하여 새로운 아이를 탄생시키는 것에 이른다. 트레버의 동생 오렌은 '인간 복제'를 통한 영생의 추구를 갈망하며,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염원하는 트레버를 저지하여 '새로운 아이'를 임신한 여자들을 살해한다. 이온 플럭스는, 그러한 사회의 구성은 분명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인간은 한번의 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그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하며 인간복제의 세상의 종말을 선언한다. 영화의 말미에, 이온은 말한다. "마침내 우린 한번뿐인 삶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맡길 수 있게 됬다. 단 한번의 삶엔 희망이 있다."


영화 <네버 렛미고>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 복제'가 허용된 사회에 관한 이야기다. 기숙학교 '헤일셤'은 클론들을 수용하는 학교인데, 외부세계와 철저히 격리된 이 곳의 학생들은 다른 이에게 장기기증을 위해 태어난 아이들이다. 이들은 '인간'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로 의해 태어났으며, 도구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아파하고, 사랑하고, 욕망하는 '인간'일 뿐인데, 그들은 인간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말미에서 캐시의 말은 더욱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들의 신체를 원하던 그 사람들과 많이 달랐는가요?"


이 두 영화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영생을 원하며, 아프지 않기를 원한다. 과학기술은 우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며, 욕망은 윤리를 앞서고 있기에 윤리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영화도 그렇듯, 이 영화는 결코 허무맹랑하지 않다. 이것은 분명 가능한 세계다. 그렇기에 우리가 더욱 '윤리'를 강조해야 하지 않나싶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분명 '윤리'에 있다. 칸트가 이야기 했듯, '타자'를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얼마전 출간된 <인체 쇼핑>에서 언급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자와 난자 거래에서의 불균형과 착취,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연구에 있어서 지적되는 윤리적 문제, 장기 매매와 혈액 매매에서 신체의 일부가 누구의 소유인지 등 많은 문제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도나 디켄슨은 자유시장주의가 소비자에게 장기의 무한재생과 영원한 젊음에 대한 욕망을 발굴하고 부추기면서 다른 한변으로는 자금을 지원해 생명공학의 발전을 촉진해왔다고 말한다. 신화적 욕망에 가득 찬 소비자는 생명공학이 내 놓을 신비의 영약에 점점 기대가 부풀어가고, 시장과 소비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스스로 이익을 창출하는 데 혈안이 된 생명공학은 점점 더 오만해져 간다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충격적일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러한 욕망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온전히 감내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더이상 인간다울 수 없다면, 그것이 희망일 수 있는가? 


ps. 생명공학에 대한 경고를 다룬 영화나 책은 그 외에도 많다. 책으로는 <정의는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책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영화로는  <가타카>나 <아일랜드>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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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의 유명 블로거인, 로쟈 이현우씨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의 페이퍼는 항상 핫하게 떠오르곤 하는데, 그의 책에 대해 한번 써볼 필요가 있지 않나싶다. 내가 로쟈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군복무를 하던 2009년 무렵일텐데, 그 당시 독서를 하기에는 꽤 난감하던 시절이어서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입대 후 독서에 대해 거의 포기를 하고 있던지라, 책을 읽을 여유가 있을 떄에는 책을 읽기에 난감할 정도로 책이 잘 읽히지 않아서 괴로웠었고, 독서에 대해 흥미를 읽어가던 시점이라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많은 도움이 됬던 것 같다. 특히, 이름은 들어오곤 했었고 몇번 읽기를 시도했었던 지젝에 관한 글들에 대해 쉽게 풀이가 되어있어, 흥미를 가질 만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그가 블로그에 썼던 내용의 일부를 책에 닮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가 썼던 글들중에 가장 흥미로운 내용들을 엄선해서 뽑은 글들이기에 더 재미있는 점도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문학,예술,철학,지젝,번역에 관한 글들로 구성되어있는데 굉장히 아쉬웠던 것은, 400페이지가 넘는 책임에도 이 책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글을 접하고 싶다면, 알라딘의 서재에서 그를 만날 수 있겠지만 최근의 그의 글들을 본다면 청탁을 받은 글들이 대부분이기에 과거에 썼던 글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의 글은 예전에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다소 즉흥적으로 보여지는 점이 있다면, 로쟈의 책은 한가지의 주제에 대해 꾸준히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이 책이 '한국출판문화상', KBS tv 올해의 책 '눈부신 역작'에 수상할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 이후로 출판된 책이 <책을 읽을 자유>,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 된다>인데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마찬가지로 그가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옮긴 책인데 다소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 크다. 구성이 다른 책이기때문에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다는 느낌인데, 이러한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으리라 여기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그가 다른 책들에도 게속해서 언급하며 '지젝 전도사'로 활동해온 결과물이라고 볼 수 도 있을 것 같은데, 지젝을 읽기전에 읽어보면 좋을 법한 책이라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지젝에 관한 다른 입문서로는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인디고에서 펴낸 지젝 인터뷰집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이 있겠다.


ps. 그의 책으로 인해, '독서에 관한 책'의 소개가 굉장히 많이 됬는데,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라거나, 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 정도가 되지 않나 싶다. 그 외에도 많은 저서들이 있겠지만, 책을 읽는 다는 것을 '독서에 관한 책'으로 대체할 수 는 없는 일이기에, 이러한 책들이 독서에 대한 관심을 크게 했다면 본격적으로 독서에 관심을 가지고 그가 권하는 책을 읽어본다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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