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본 영화는 <이온 플럭스>와 <네버 렛미고>이다. 두 영화는 분명 장르도 다르고, 영화의 전개양상도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같지 않나 싶어서 함께 포스팅 한다.


영화 <이온 플럭스>의 배경은 한 바이러스가 세계 인구의 99%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고, 과학자 "트레버 굿차일드"에 의해 개발된 백신으로 생존한 5백만명의 사람들이 그가 건설한 도시 "브레그나"에서 살아간다. 사실 개발된 백신에 대해서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불임'이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면, 인간은 멸종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트레버는 '인간 복제'를 시도하고, 그것에 성공하여 죽은 인간의 DNA를 복제하여 새로운 아이를 탄생시키는 것에 이른다. 트레버의 동생 오렌은 '인간 복제'를 통한 영생의 추구를 갈망하며,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염원하는 트레버를 저지하여 '새로운 아이'를 임신한 여자들을 살해한다. 이온 플럭스는, 그러한 사회의 구성은 분명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인간은 한번의 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그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하며 인간복제의 세상의 종말을 선언한다. 영화의 말미에, 이온은 말한다. "마침내 우린 한번뿐인 삶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맡길 수 있게 됬다. 단 한번의 삶엔 희망이 있다."


영화 <네버 렛미고>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 복제'가 허용된 사회에 관한 이야기다. 기숙학교 '헤일셤'은 클론들을 수용하는 학교인데, 외부세계와 철저히 격리된 이 곳의 학생들은 다른 이에게 장기기증을 위해 태어난 아이들이다. 이들은 '인간'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로 의해 태어났으며, 도구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아파하고, 사랑하고, 욕망하는 '인간'일 뿐인데, 그들은 인간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말미에서 캐시의 말은 더욱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들의 신체를 원하던 그 사람들과 많이 달랐는가요?"


이 두 영화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영생을 원하며, 아프지 않기를 원한다. 과학기술은 우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며, 욕망은 윤리를 앞서고 있기에 윤리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영화도 그렇듯, 이 영화는 결코 허무맹랑하지 않다. 이것은 분명 가능한 세계다. 그렇기에 우리가 더욱 '윤리'를 강조해야 하지 않나싶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분명 '윤리'에 있다. 칸트가 이야기 했듯, '타자'를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얼마전 출간된 <인체 쇼핑>에서 언급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자와 난자 거래에서의 불균형과 착취,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연구에 있어서 지적되는 윤리적 문제, 장기 매매와 혈액 매매에서 신체의 일부가 누구의 소유인지 등 많은 문제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도나 디켄슨은 자유시장주의가 소비자에게 장기의 무한재생과 영원한 젊음에 대한 욕망을 발굴하고 부추기면서 다른 한변으로는 자금을 지원해 생명공학의 발전을 촉진해왔다고 말한다. 신화적 욕망에 가득 찬 소비자는 생명공학이 내 놓을 신비의 영약에 점점 기대가 부풀어가고, 시장과 소비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스스로 이익을 창출하는 데 혈안이 된 생명공학은 점점 더 오만해져 간다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충격적일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러한 욕망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온전히 감내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더이상 인간다울 수 없다면, 그것이 희망일 수 있는가? 


ps. 생명공학에 대한 경고를 다룬 영화나 책은 그 외에도 많다. 책으로는 <정의는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책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영화로는  <가타카>나 <아일랜드>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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