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앞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아름다운 삶이란 내가 살고 싶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닌데, 많이 안다고 지적인 사람이 된다고 해서 내 삶의 앞글자에 '아름다운'이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을까?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여전히 저 의문은 남는다.

이 책이 가르쳐준 라틴어의 세계, 명확하고 정교한 언어와 의식의 세계를 엿보고 그 힘으로 잠시 시야의 확장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만한 책이고, 라틴어수업은 너무나 유익하고 기분좋은 수업이다. 이 수업에서 접한 지혜들을 살아가는 중에 발휘해보고, 그런 실습의 순간들이 쌓이면 '아름다운 삶'이라는 형태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려나?

 

요즘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잡설이 길었지만 어쨌든 이 책은 참 재미있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찬탄한 그 장면, 대나무 숲에서 장쯔이와 주윤발이 춤추듯 대결하는 씬에서 감독은 주윤발에 진정한 고수의 모습을 담았다. 대나무 가지 끝에 서더라도 나무가 부러지지 않고, 바람이 불면 잎사귀들이 눕는 방향으로 함께 기울이며 자연 속에 어긋남이 없이 어우러지는 것이 고수였다. 막힘이 없고 무해하고 부드러운 경지.


 라틴어의 단어와 문장을 가르치며 신학과 법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강의는 청명한 대나무 숲의 바람과 그 숲을 날듯이 거니는 고수를 연상케 했다.

 이 책이 유명한 줄은 진작부터 알았지만 왜 유명한지는 잘 몰랐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이 책이 소설인줄 알았다. 나의 무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의 강의 내용을 엮어 책으로 냈다는 첫 페이지 글을 읽고는, 이전에 읽었던 비슷한 부류(강의를 엮어 책으로 낸 것)의 서적들을 떠올렸다(지금은 그런 책들의 제목도 기억 못하는 주제에...). 그리고는 ‘뭐, 그냥 사색적인 이야기를 이리저리 잘 섞은 강의인가?’라며, 책 한 줄도 읽지 않은 채로 재단하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웃기지도 않지, 참.)

 


 이렇게 회개하는 내용으로 서평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저자의 용기에 탄복해서다.
 신을 섬기는 사제로서, 법조인으로서 그리고 끝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공부자(노동자)로서 저자 한동일은 정말 용기 있다. 인생이라는 긴긴 시간 속에 우리 각자가 응당 해야 할 ‘공부’라는 삶의 일부에 대한 저자의 철학(공부하는 노동자)이 대담하고, 신학자이면서도 ‘우리는 저마다 신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하는 그 고백이 용기 있다.

 

라틴어 각 단어의 원어와 파생어를 설명하며 여러 언어를 넘나든다거나, 언어는 곧 문화이기에 여러 언어만큼이나 드넓은 지구촌의 나라와 역사들을 아우르는 그의 식견에도 박수를 보내게 되지만, 이 방대한 양을 이토록 재미지게 설명하고서도 ‘나 역시 학생들에게 배운다’고 한 강의를 이 책의 첫 장으로 시작하는 그의 겸손함이 아름다워 내용이 더욱 의미 있게 읽힌다.

 


 요한복음 6장에 ‘말言이 영靈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구절이다. 전에 누군가 그랬다. ‘내 말은 나라는 존재의 실체’라는 말은 너무 관념적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말이 곧 그 사람이라는 것은 관념도 아니고 모호하지도 않다. 향을 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듯이, 비린 속을 가진 사람이 향을 낼 수 없고 향기로운 속을 가진 사람이 비린내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말의 체계인 언어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세상이 들어있겠지. (저자도 설명했지만) 아마 라틴어를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틴어라는 ‘말의 세계’에 오래도록 깃든 깊은 학문과 사유의 문화를 흠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라틴어 단어 겨우 몇 개를 읽어본 나조차 ‘정말 향기로운 언어’라고 느낄 정도이니. 아마 내가 지금 학부생이고 이 책을 읽고 강의 소식을 들었다면 나 역시도 저자의 라틴어강의를 청강하러 찾아갔을 듯하다.

 강의를 직접 찾아가 들을 상황은 되지 못하나, 이런 강의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단순히 ‘언어에도 온도가 있네, 인격이 있네’ 이런 주제의 강의나 책 말고. 언어의 본질적인 특성과 역할을 탐구하면서, 마치 거울처럼 그 언어에 비춰보이는 우리의 세상을 은근히 생각하고 성찰할 기회를 선사하는 그런 강의. 듣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조금이라도 씻어지는 듯한 그런 강의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 우트 데스’의 상호주의 원칙의 붕괴로 인해 인류가 겪어야 했던 인간의 추악함과 잔인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와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상호주의 원칙이 깨짐으로써 벌어진 인류의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역사였습니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라는, 이 단순해 보이는 믿음 없이는 개인과 사회, 국가와 국가는 존립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개인이든 국가든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요?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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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안녕하시다 2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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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모습이었으나 아직 소년의 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그게 진짜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는 것, 그게 당당한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야.”
 나는 왕이 진짜배기 임금이 되려면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왕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송시열을 죽이든 살리든 간에 모든 신하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문무백관과 수령과 만백성 모두가 왕을 우러러보고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1권 221쪽

 

“임금에게 신하란 장기판의 말과 같은 것이거늘, 때에 따라 총애하고 중용하기도 하지만 소용을 다하면 결국 버릴 수밖에. 혈육이든 처자든 백성이든 나라든 내가 있고서 있는 법.”
 나는 기가 막혀서 왕의 신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등을 돌렸다.
2권 402쪽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야기가 저잣거리에서 회자된다고 그 손자가 말했겠다. 그래, 지금도 조선 최고의 러브스토리라고 누가 물으면 성춘향이와 이몽룡이 커플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춘향이와 몽룡이는 그들의 손자에게 최고 러브스토리의 왕관을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미모와 수완, 잔머리(후에는 무술 고수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는)를 지닌 성형이와 저잣거리에서 그를 만나 단번에 의형제를 맺어버린 당돌한 꼬맹이 왕 이순과의 러브스토리를 과연 어떤 커플이 이길 수 있을까 싶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사실과 상상력을 교차로 촘촘히 엮은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독하고 시리고 진한.

 

 짐이 곧 국가라며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절대 왕정을 확립할 동안 조선에서 숙종 역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동양이나 서양이나 왕이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략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그럼 무얼 하고 지냈을까? 왕이 곧 나라라는, 왕이 없고서는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마어마한 위치를 왕이 차지해버렸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럼 어디를 차지해야 했을까? 하나밖에 없지. 왕의 마음이다.

 

 세자로 책봉되는 그 순간 아니, 왕실에서 태어나 언젠가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지위를 스스로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꼬마는 그냥 꼬맹이가 아니었을터다. 내가 안녕해야만 나라가 안녕하다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내가 세상의 법이라는 믿음에 따라 자기 자신이 안녕하기 위하여 필요한 온갖 것을 다 구축했겠지. 왕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때, 그러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어린 이순이 성형과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하여 순식간에 형제의 의를 맺어버린 그 순간에 꼬마가 발휘한 것이 아마 페로몬이 아니었을까. 그 페로몬에 취하여 왕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왕의 신하로서,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마다않는 충정을 다하고야 말게 되는 일이다. (훗날을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사고처럼 일어난다 하던가.) 그러고선 어떻게든 왕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왕의 마음에서 내쫓기지 않기 위하여 평생에 궂은 수고를 다한다. 왕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자가 왕과 비밀리에 의형제를 맺은 단 한 사람이면 그래도 팔자가 좀 나았으려나? 왕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왕의 마음을 구했다. 왕을 중심으로 때로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한 편이 되고 때로는 저 사람과 그 사람이 한 편이 되어 무당 굿하듯 한바탕 강강수얼래를 뛰고 뛰며 왕의 마음땅을 땅따먹기 하는 것이 궁이었고 왕국이었다. 그 속에서 왕을 사랑했던, 왕이 왕인 줄도 의형제를 맺고, 소녀보다 곱게 생긴 어린 꼬마 왕을 지켜주고 싶었던 순진한 청년은 저도 모르게 목숨을 건 강강수얼래를 같이 뛰고야 만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사랑했겠지만, 성석제의 신작 [왕은 안녕하시다]의 주인공인 성형의 사랑은 특별히 독하고 시리고 진하다. 애정愛情보다 독한 것이 애증愛憎인 법. 성형은 왕이 보위에 오를 때부터 줄곧 그의 최측근으로 곁에서 지켜주려는 사랑, 대견히 여기는 사랑,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 이제는 정이 들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관대하게 품는 사랑을 거쳐 아주 지긋지긋하고 질리고 밉고 미워서 멀리 얼굴만 봐도 배알이 틀리고 토악질이 나오는 사랑의 단계까지 두루 거친다. 그런 그의 사랑이 어떻게 특별하지 않을 수 있나? 이리 같은 신하들 속에서 외롭고 처연했던 꼬맹이가 껍질을 벗고 수탉이 되어 그 강한 부리를 아끼지 않고 신하들을 내치며 쪼아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았을 때, 왕의 손에 묻힌 돌이킬 수 없는 피를 (왕조차 안타까워하지 않을 때) 그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던지. 왕의 안녕을 지키기 위하여 벌어지는 소용돌이 속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그 속에서 사랑하는 왕의 순결한 마음도, 나라를 위하는 충신들의 명줄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성형은 얼마나 사무치게 마주해야 했던지.

 

 성형이 사모하던 장옥정을 끝내 왕의 품으로 보냈을 때보다, 성형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 읽을 때보다 성형과 왕이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이 몇 배는 더 안타깝고 슬펐다. 야당 장군, 미수 스승, 박태보 등 의로운 인물들이 덧없이 스러지는 비정한 조정의 풍경 속에 유일하게 산소 같은 사람이었을 성형을 떠나보내고 숙종은 얼마나 헛헛하였을까? 성형은 또 애증 속에 남아 있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얼마나 왕을 안쓰럽게 여겼을까? 아, 그런데 추월이는 결국 성형의 순전한 애정과 관심을 받게 되었을까? (여기서야 하는 말이지만 성형이는 저가 왕에게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해놓고 저가 그런다.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이 책의 말미에서, 글로는 더 이어지지 않는 그들의 뒷이야기를 혼자 추적하며 애달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저자 성석제 덕분이다. 저자는 흔적이 분명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생애를 솜씨 좋게 엮고 그 매듭 사이사이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필부필녀의 삶들을 섬세하게 겹치고 끼워 넣어 마치 세밀화 한편을 완성하듯 이 작품을 그려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송시열은 어떻게 필부필녀의 삶이 귀한 서책이 될 수 있냐고 의아하였으니 지금의 시대를 보게 된다면 기절할 판이겠지. 소박하고 조촐한 개인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온갖 이야기판을 가로지르는 이 세상을 보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저자는 책의 시작과 끝에,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넣어, 노량진 헌책방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갔다가 다시 노량진 헌책방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골목 끝에서 문득 마주친 신비한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의 기상천외한 풍경을 엿본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아이가 된 것처럼, 마치 놀이동산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침대에 걸터 앉아 숨을 고르는 것처럼, 나는 [왕은 안녕하시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후에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름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수많은 필부필녀들이 남기고 간 삶의 자락들을 내가 밟고 나 역시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성형처럼 갑자기 비수를 전수받아 무림의 고수가 되거나 왕의 최측근이 되거나 하는 일들은 바라지 않는다. 너무 고단하니까, 그런 삶은. 그러나 [왕은 안녕하시다]의 처음 화자로 등장하는 그 누군가처럼 아무도 모르는 역사 속 뒷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다면, 나 역시 노량진 헌책방을 누비며 손에 거미줄을 제법 묻혀 보고 싶다. 그 당시에는 필부였으나, 오늘날 나에게는 보물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임금에게 신하란 장기판의 말과 같은 것이거늘, 때에 따라 총애하고 중용하기도 하지만 소용을 다하면 결국 버릴 수밖에. 혈육이든 처자든 백성이든 나라든 내가 있고서 있는 법."
나는 기가 막혀서 왕의 신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등을 돌렸다.
2권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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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안녕하시다 1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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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모습이었으나 아직 소년의 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그게 진짜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는 것, 그게 당당한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야.”
 나는 왕이 진짜배기 임금이 되려면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왕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송시열을 죽이든 살리든 간에 모든 신하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문무백관과 수령과 만백성 모두가 왕을 우러러보고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1권 221쪽

 

“임금에게 신하란 장기판의 말과 같은 것이거늘, 때에 따라 총애하고 중용하기도 하지만 소용을 다하면 결국 버릴 수밖에. 혈육이든 처자든 백성이든 나라든 내가 있고서 있는 법.”
 나는 기가 막혀서 왕의 신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등을 돌렸다.
2권 402쪽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야기가 저잣거리에서 회자된다고 그 손자가 말했겠다. 그래, 지금도 조선 최고의 러브스토리라고 누가 물으면 성춘향이와 이몽룡이 커플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춘향이와 몽룡이는 그들의 손자에게 최고 러브스토리의 왕관을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미모와 수완, 잔머리(후에는 무술 고수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는)를 지닌 성형이와 저잣거리에서 그를 만나 단번에 의형제를 맺어버린 당돌한 꼬맹이 왕 이순과의 러브스토리를 과연 어떤 커플이 이길 수 있을까 싶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사실과 상상력을 교차로 촘촘히 엮은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독하고 시리고 진한.

 

 짐이 곧 국가라며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절대 왕정을 확립할 동안 조선에서 숙종 역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동양이나 서양이나 왕이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략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그럼 무얼 하고 지냈을까? 왕이 곧 나라라는, 왕이 없고서는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마어마한 위치를 왕이 차지해버렸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럼 어디를 차지해야 했을까? 하나밖에 없지. 왕의 마음이다.

 

 세자로 책봉되는 그 순간 아니, 왕실에서 태어나 언젠가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지위를 스스로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꼬마는 그냥 꼬맹이가 아니었을터다. 내가 안녕해야만 나라가 안녕하다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내가 세상의 법이라는 믿음에 따라 자기 자신이 안녕하기 위하여 필요한 온갖 것을 다 구축했겠지. 왕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때, 그러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어린 이순이 성형과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하여 순식간에 형제의 의를 맺어버린 그 순간에 꼬마가 발휘한 것이 아마 페로몬이 아니었을까. 그 페로몬에 취하여 왕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왕의 신하로서,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마다않는 충정을 다하고야 말게 되는 일이다. (훗날을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사고처럼 일어난다 하던가.) 그러고선 어떻게든 왕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왕의 마음에서 내쫓기지 않기 위하여 평생에 궂은 수고를 다한다. 왕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자가 왕과 비밀리에 의형제를 맺은 단 한 사람이면 그래도 팔자가 좀 나았으려나? 왕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왕의 마음을 구했다. 왕을 중심으로 때로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한 편이 되고 때로는 저 사람과 그 사람이 한 편이 되어 무당 굿하듯 한바탕 강강수얼래를 뛰고 뛰며 왕의 마음땅을 땅따먹기 하는 것이 궁이었고 왕국이었다. 그 속에서 왕을 사랑했던, 왕이 왕인 줄도 의형제를 맺고, 소녀보다 곱게 생긴 어린 꼬마 왕을 지켜주고 싶었던 순진한 청년은 저도 모르게 목숨을 건 강강수얼래를 같이 뛰고야 만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사랑했겠지만, 성석제의 신작 [왕은 안녕하시다]의 주인공인 성형의 사랑은 특별히 독하고 시리고 진하다. 애정愛情보다 독한 것이 애증愛憎인 법. 성형은 왕이 보위에 오를 때부터 줄곧 그의 최측근으로 곁에서 지켜주려는 사랑, 대견히 여기는 사랑,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 이제는 정이 들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관대하게 품는 사랑을 거쳐 아주 지긋지긋하고 질리고 밉고 미워서 멀리 얼굴만 봐도 배알이 틀리고 토악질이 나오는 사랑의 단계까지 두루 거친다. 그런 그의 사랑이 어떻게 특별하지 않을 수 있나? 이리 같은 신하들 속에서 외롭고 처연했던 꼬맹이가 껍질을 벗고 수탉이 되어 그 강한 부리를 아끼지 않고 신하들을 내치며 쪼아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았을 때, 왕의 손에 묻힌 돌이킬 수 없는 피를 (왕조차 안타까워하지 않을 때) 그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던지. 왕의 안녕을 지키기 위하여 벌어지는 소용돌이 속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그 속에서 사랑하는 왕의 순결한 마음도, 나라를 위하는 충신들의 명줄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성형은 얼마나 사무치게 마주해야 했던지.

 

 성형이 사모하던 장옥정을 끝내 왕의 품으로 보냈을 때보다, 성형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 읽을 때보다 성형과 왕이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이 몇 배는 더 안타깝고 슬펐다. 야당 장군, 미수 스승, 박태보 등 의로운 인물들이 덧없이 스러지는 비정한 조정의 풍경 속에 유일하게 산소 같은 사람이었을 성형을 떠나보내고 숙종은 얼마나 헛헛하였을까? 성형은 또 애증 속에 남아 있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얼마나 왕을 안쓰럽게 여겼을까? 아, 그런데 추월이는 결국 성형의 순전한 애정과 관심을 받게 되었을까? (여기서야 하는 말이지만 성형이는 저가 왕에게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해놓고 저가 그런다.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이 책의 말미에서, 글로는 더 이어지지 않는 그들의 뒷이야기를 혼자 추적하며 애달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저자 성석제 덕분이다. 저자는 흔적이 분명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생애를 솜씨 좋게 엮고 그 매듭 사이사이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필부필녀의 삶들을 섬세하게 겹치고 끼워 넣어 마치 세밀화 한편을 완성하듯 이 작품을 그려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송시열은 어떻게 필부필녀의 삶이 귀한 서책이 될 수 있냐고 의아하였으니 지금의 시대를 보게 된다면 기절할 판이겠지. 소박하고 조촐한 개인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온갖 이야기판을 가로지르는 이 세상을 보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저자는 책의 시작과 끝에,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넣어, 노량진 헌책방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갔다가 다시 노량진 헌책방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골목 끝에서 문득 마주친 신비한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의 기상천외한 풍경을 엿본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아이가 된 것처럼, 마치 놀이동산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침대에 걸터 앉아 숨을 고르는 것처럼, 나는 [왕은 안녕하시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후에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름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수많은 필부필녀들이 남기고 간 삶의 자락들을 내가 밟고 나 역시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성형처럼 갑자기 비수를 전수받아 무림의 고수가 되거나 왕의 최측근이 되거나 하는 일들은 바라지 않는다. 너무 고단하니까, 그런 삶은. 그러나 [왕은 안녕하시다]의 처음 화자로 등장하는 그 누군가처럼 아무도 모르는 역사 속 뒷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다면, 나 역시 노량진 헌책방을 누비며 손에 거미줄을 제법 묻혀 보고 싶다. 그 당시에는 필부였으나, 오늘날 나에게는 보물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모습이었으나 아직 소년의 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그게 진짜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는 것, 그게 당당한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야."
나는 왕이 진짜배기 임금이 되려면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왕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송시열을 죽이든 살리든 간에 모든 신하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문무백관과 수령과 만백성 모두가 왕을 우러러보고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1권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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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교육을 설계한다 - 문제 풀이 수업에서 문제 해결 교육으로, 개인적 성취에서 사회적 실현으로
마크 프렌스키 지음, 허성심 옮김 / 한문화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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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을 탁월하게 설명하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교육’을 뽑고 싶다.

 짐승은 어미를 따라하며 자란다. 발로 서는 법 혹은 달리는 법이나 먹이를 먹는 법 혹은 잡는 법 등등. 사람도 물론 부모를 비롯한 성인을 따라하며 자란다.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따라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체계적이고 분명한 학습을 한다. 교육. 사람을 사람 되게 만드는 행위이자 한 생애를 우주라고 했을 때,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과정이라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5~6살 아이부터 18세 가량이 될 때까지 연단위의 단계별로 과정을 구성하여 교육한다. 이 책에서는 그 과정은 ‘k-12’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본래 미국에서 시행되는 학제를 가리키고 우리나라의 초중고 과정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저자는 이 k-12 교육의 단점부터 꼬집으며 책을 시작한다. 이 교육 과정이 본래 아주 잘못되었거나 틀렸다는 게 아니라,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미래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인데도, 단 몇 년 사이에 세상은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방송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일정관리, 금융관리, 여가나 취미생활, 쇼핑, 놀이 그리고 교육.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으로 인강을 듣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방법으로 교육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인가? 아이의 학원 수강 현황과 상태 그리고 피드백들이 부모의 스마트폰으로 전송되고, 아이의 학습 상태를 다각도로 측정한 데이터들이 아이의 교육에 수시로 동원된다. 예전처럼 책을 읽고 칠판에 쓰고 시험을 쳐서 결과로 아이의 학습 상태를 측정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교육 과정도 바뀌어야 하는 법. 저자가 외치는 메시지도 바로 이 지점이다. 미래에는 미래에 맞는 교육을 해나가야 하고, 그 교육 방법은 지금부터 준비해야만 한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에 맞는 교육법을 들여야 한다. 당연한 말씀. 다만, 저자도 지적했듯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참교육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듯 하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성장하고, 학생이 일방적인 학습이 아니라 자율과 소통과 무한한 사유를 통하여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돕는 일. 과거의 서당이 그랬고, 그보다 더 옛날에 아테네 아카데미와 같은 철학자들의 교육기관이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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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
조던 B. 피터슨 지음, 강주헌 옮김 / 메이븐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법칙 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법칙 2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법칙 3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법칙 4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
법칙 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법칙 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법칙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법칙 8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
법칙 9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법칙 10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
법칙 11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법칙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온라인 서점 책 소개 페이지에서 목차를 읽었다.
 와우! 훌륭했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와, 이거 진짜. 진짜!! 내가 나한테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의 의미를 이렇게 한 줄로 정리해버리다니. 감탄했다. 공감했고 박수를 쳤다. 탄복하며 책을 주문했다.
고수다. 진짜 고수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책의 가장 첫 번째 챕터인 법칙 1을 읽을 때까지만해도 그랬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법칙8번에 부응하여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 책이 많이 팔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혼돈의 해독제라고? 글쎄..... 크고 작은 혼돈을 아주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대형 혼돈으로 뭉개버려서 혼돈의 해독제라고 부제를 붙인 것인가?

 이 책에 박수를 보내고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많은 독자들이 있기에 그 독자들의 눈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책에서 읽어내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법이니.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정말 위험한 책이구나, 라고 느낀 이유는 이 한 가지다. 성경은 사람의 도덕성을 설명하는 교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성경을 빌어 사람의 도덕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썼다. 신학도 했다는 양반이..... 왜요????
 우리집에 만들 때부터 잘못 만들어서 반듯하지 않고 0.2mm 정도 비스듬하게 그어지는 자가 있다. 이 자로는 어떤 펜으로 줄을 그어도 다 기이한 사선이 된다. 처음에는 직선으로 그어진 줄 알았는데 미묘하게 다 비틀려 있더라. 우리 아버지 등 긁개로 쓰려고 그냥 두었다. 
 


 이 책에 읽을만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게 아니라서 더 위험하다. 원래 가장 독한 거짓말은 10가지가 다 거짓인 거짓말이 아니라 10가지 중에 5~6가지가 거짓이고 그 나머지는 참인 거짓말이 진짜 독한 법이다. 구별이 안되니까. 특히 책의 제일 뒤에 노먼 도이지 교수가 이 책 해설이라고 쓴 내용이 있는데 그 부분이 참으로 내 마음에 와 닿고 동감이 되어서 더욱 무릎을 치며 안타까움을 금하질 못하겠다. 이렇게 좋은 말들이 있는데 좋은 책, 권할 만한 책이 아니라는 점이.... 원, 이런 세상에.... 저자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라고 하는 책을 내면서, 이 책이 주는 잘못된 내용을 수용하는 것도 오롯이 독자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마는 것인가? (그럴 요량이니 책을 냈겠지....... 라고 혼자 생각하고 말아버린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법칙이 있다면 당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503쪽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법칙이 있다면 당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5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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