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 - 우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경제학에 관한 진실
조너선 앨드리드 지음, 강주헌 옮김, 우석훈 해제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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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다도 이런 사이다가 없다. 이렇게 속 시원한 경제학 서적을 읽게 될 줄이야! 경제 뉴스를 잘 이해하게 해준다거나 경제학 자체를 가르쳐주겠다는 서적은 많았지만 경제와 경제학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걸어온 길을 대놓고 까는 이런 책은 처음이다.

 

 서점가에도 그렇고 내가 자주 가는 포털 게시판이나 인터넷 카페에 올라오는 글이나 인친들이 올리는 내용을 보면 ‘주식, 부동산, 투자’ 따위의 키워드가 들어가는 것들이 많아졌다. 정말 부쩍 많아졌다. 코로나19이후 불확실성에 대한 경계와 험난한 경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큰 폭으로 높아졌기 때문인지 다들 경제 사정을 제대로 알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주식 부스러기도 모르시고 관심도 없던 우리 아버지마저 주식 좀 한다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시며 주식 시장을 기웃기웃 거리실 정도니.... (그러나 내가 철벽 방어 중. 주식 하시려거든 차라리 그 돈 나를 달라며...)

 

 자본주의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고 느껴온 지 수년인 나는 실은 돈 버는 데에는 큰 애착도 관심도 없다. 그냥 올해 적당히 끼니 챙겨먹고 입을 것, 바를 것, 신을 것 구색만 맞췄어도 잘했다고 살아오기를 수십 년째라. 돈 버는 데에 재능이 없어서 일찌감치 마음을 비웠다. 내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이런 책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일테다. [경제학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는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시장경제 이론들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떤 영향을 받아 태어나고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쓴 책이다. 경제학사 정도로 여겨지기 쉬운 책이지만 저자가 시장경제 이론들(그리고 그 이론을 발표한 경제학자들)의 맹점과 허점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역사책을 탈피한다.

 

 경제학은 있으나 경제는 없다.
 경제학자들은 현실이 이론과 다르면 이론을 조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왜곡한다.
 결국 사람들의 심리(인간은 효율울 추구한다든가 하는 뭐 경제학 이론들이 전제하는 그런 것들)가 경제학 내지는 경제를 만들어온 게 아니라 정치와 학자들의 콜라보 속에서 우리는 오늘의 시장경제 관념으로 세뇌되기에 이르렀다.

 

 시장경제가 전적으로 틀렸다, 나쁘다, 뭐 이런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학 관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많은 것들이 나쁜 경제학 관념에 물들어버렸다. 예를 들면 법, 인권, 도덕, 기후변화 같은 것들. [경제학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는 이 점을 통렬히 꼬집는다. 우리의 보편적인 관념 속에 나쁜 경제학으로 인해 정도를 벗어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꼬집고, 효율이니 이득이니 경제니 하는 숫자 놀음으로 가치를 판단해선 안 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잊은 채로 멍청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꼬집는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가 맞지만 욕심에만 매몰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존재가 맞지만 합리성만이 인간이 추구하는 전부는 아니다.
 [경제학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는 경제학자가 쓴 경제학 오류에 대한 책으로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합리적 인간‘과 ’부의 극대화‘가 우리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보여준다. 다른 말은 모두 사족이고, 그냥 이 책은 정말 읽어볼만한 책이다. 경제학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잘못 걸어온 것들이 어디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바로보고 더 이상 나쁜 경제학에 휘둘리지 않는 좋은 경제학의 세상으로 가기 위하여. 무엇보다 조안 로빈슨 여사의 아래의 말처럼 되기 위하여.

 

경제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경제에 대한 질문에 일련의 준비된 답변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책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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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액션 - 기회를 성공으로 이끄는 행동력 훈련 37
하재준 지음 / 라온북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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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운이 좋은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뭘 해도 일이 참 잘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잠시잠깐 불운이나 악운을 겪기도 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런 일들이 도리어 새옹지마로 작용하는 행운 역시 그런 사람들의 몫이다.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아무래도 그들이 알게 모르게 겪는 어려움이나 애로사항보다는 그들이 누리는 좋은 운세만 주목해서 보게 된다. 그들이 남들 안 보이게 쏟아 붓는 노력은 주변사람들에게는 아웃오브안중....

 

 아마 이 책 [미라클액션]의 저자도 주변 사람들에게 억세게 운 좋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다. 스스로 영업을 참 잘한다는 자신감의 소유자이며 여러 법인체를 운영하고 있는 성공한 사업가인 그를 두고 운이 나쁘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심지어 그는 금수저, 은수저도 아니고 부모님 찬스가 준비된 사람도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했으면 진짜 행운아잖아’라고, 그의 성공의 몫을 그에게 다가온 행운에게만 돌리기 쉽지만 그건 안될 말이다. [미라클액션]은 운동선수의 길을 가려던 저자가 부상을 겪은 후 급하게 진로를 바꾸고, 바꾼 인생의 행로에서 예상치 못한 많은 고비를 만나며 그것을 뛰어넘어온 과정을 담은 책이다.

 

 

 

 서른 중후반에 암선고를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십여년 전에는 인생이 바뀔 정도의 커다란 부상도 당했던 나에게 이런 시련이 또 왔다면? 나는 참 지지리도 운이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들만도 한데 역시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람이 절대 이기지 못할 건 절대 없다. ‘절대는 절대 없다’는 말을 이 책에 쓴 저자는 자기의 인생으로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강력한 원동력이 되는지를 증명한다.

 

 

 

 [미라클액션]은 자기계발서다. 저자는 민첩한 실행과 과감한 결단으로 만만치 않은 생을 종횡무진해왔다. 행동이 없으면 내일도 없다. 그의 이러한 신조는 그의 삶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신조에는 분명한 바탕이 있어야 한다. 치밀한 분석과 통찰이다. 저자는 [미라클액션]에서 자신의 인생 과정을 따라 그가 체험했던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해왔는지를 설명하는데, 이때 위기를 기회로 이어지게 만든 원동력은 모두 분석과 결단, 실행에서 왔다.

 [미라클액션]은 기왕이면 자영업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상권을 분석하고 경쟁자에 대응하고 영업에 나서야 하는 분들이 이 책을 본다면 꽤 괜찮은 노하우를 읽게 될 듯하다. 운이 억세게 좋은 주변인을 부러워만 하는 입장이었다면 저자의 노하우를 따라 이제는 운이 나에게 다가와 붙는 인생으로 바뀐다면 더욱 좋겠다.

 

 

 운은 우리의 믿음에서도 오지만 우리의 생활 패턴 속에서도 온다. 사람은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삶에 충실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운은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 오게끔 설계되어 있다.
 자기계발서에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 말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말과 동의어이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과 동의어이며, 사람에게 정도에 어긋난 거짓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과도 동의어이다.
 내가 내 삶에 충실하지 않으면 절대 운이 붙지 않는다.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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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리처드 플레처 지음, 박흥식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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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세기,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으면서 이슬람교가 시작된 이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중세의 질서를 나눠가진 사이였다. [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은 정신적, 문화적으로 커다란 주류가 되어 유럽 문명과 역사를 구성한 두 종교의 관계와 서사를 설명하는 책이다.

 [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의 부재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다. 이 책은 이 부제를 명명백백하게 따른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거의 교류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두 종교가 너무 다르고 무엇보다 십자가 전쟁이라는 악독한 전쟁사가 끼어 있기 때문에. 그러나 7세기부터 17세기까지, 두 종교와 이 두 종교에 편입된 유럽과 중동의 세계는 저러한 생각보다 잦은 교류와 친밀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막연히 파워 밸런스 정도로만 두 종교의 역사적 관계를 해석하고 있었던 나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이 책 [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을 읽었다. 신앙적 측면이 아니라 오로지 문화적 측면으로 종교사를 바라보고 해석한 저자의 견해가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두 개의 종교 중 어느 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입장, 저 두 개의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입장, 종교가 없는 입장. 어떤 입장의 독자가 읽어도 이 책을 저자의 견해와 관점 덕분에 부담없고 흥미로우리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꾸란과 성서, 두 종교 경전의 특징과 그 내용을 근거로 두 종교가 서로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관점을 정리한 부분이다. 아주 명쾌하게 두 종교의 입장이 드러난다.

 

 

동시대 그리스도인 작가인 히에론무스는 386년에서 420년 사이 베들레헴에 장기간 거주했기에 아랍인들과 가까운 이웃이었지만 암미아누스의 견해에 동의했다. 당시 그리스도교 권위자들은 이 독특한 민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내용은 [성서]에서 이스마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창세기 16장에는 그의 출생과 운명을 서술하고 있다. 이스마엘은 “들나귀 즉 난폭한 자가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26-27쪽
 
600년경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비잔티움 제국이 질서 및 권위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이슬람은 아랍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기록된 경전을 근거로 본토에 성지를 두고 그들의 방식으로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고유한 일신교를 제시했다.
 [꾸란]은 무슬림들에게 아흘 알 키타브, 즉 성서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꾸란 29장 46절)
45쪽

 

 

 저자가 서문에 쓴대로 유대교와의 관계까지 함께 서술되었다면 이 책은 훨씬 재미있어졌을텐데. 하지만 두 배로 두꺼워지고 책의 방향도 달라졌을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의 서문을 쓴지 18년이나 지났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역시 이런 책들을 통해 불통이 낳은 오해가 해소되고 오해에서 오는 소란함이 잠잠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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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연설 - 역사의 순간마다 대중의 마음을 울린 목소리의 향연
에드워드 험프리 지음, 홍선영 옮김 / 베이직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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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등장하는 남녀 연설가 서른네 명은 각기 당대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들 모두 역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중 9명은 자신의 신념을 표출한 대가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공인으로 사는 삶이 위험천만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이들 연설은 암살, 사형, 전쟁 등과 연계되면서 등장하는 단어와 문구들을 더욱 깊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책 6쪽 머리말 중에서

 

 윈스턴 처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정치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흔히 ‘불독’에 비유되는 저돌적이고 집요한 투쟁력에 대한 존경도 있고 당장의 안정과 인정보다는 모두에게 긍정적인 장래를 내다본 정치인이기에 갖게 되는 선망도 있다. 무엇보다 겁나 부지런한 양반이었다는 사실에 리스펙트.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난세 속에 백성이 도탄에 빠진 우리나라에는 윈스턴 처칠 같은 인물이 절실하다.

 

 [위대한 명연설]을 읽어보자고 마음 먹게 된 건 윈스턴 처칠의 연설문들 때문이었다. 영국의 민심을 하나로 규합하고 혼란의 시대에 가느다란 희망을 바라보게 만든 처칠의 연설문들을 보기 좋은 책으로 가지고만 있어도 넘 뿌듯한 일이다. 그렇게 시작한 [위대한 명연설] 독서는 예상치 못한 명문들을 잔뜩 건지게 해주었다. 월척의 연속. 만선이다.

 

 아주 멀리는 400년 전의 엘리자베스 1세의 연설로부터 가장 최근으로는 2008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연설까지가 이 한 권의 책에 실려 있다. [위대한 명연설]은 고금의 34명을 추려 그들의 명연설을 한 권으로 엮었는데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인물도 있지만 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인물들도 적지 않다.

 

 

 저기 검은 옷을 입은 작은 신사분이 여성은 남성만큼 권리를 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럼 당신의 그리스도는 어디서 왔습니까? 당신의 그리스도는 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신과 여성에게서 오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와 아무 관련이 없었던 것은 바로 남성입니다.
 신이 창조한 최초의 여성이 힘이 센 나머지 혼자 힘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면, 세상을 원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 것도 바로 그 여성들입니다! 지금 그런 요구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남성들은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55쪽 
소저너 트루스의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오하이오주 애크론, 애크론 총회, 1851년 5월 29일 연설

 

 

 굉장히 인상적인 연설들은 미국 내 흑인 인권과 여성 인권에 대한 것들이었다. 소저너 트루스(이사벨라 바움프리)는 흑인 여성으로 노예였다가 탈출한 후 인권운동가로 활약했다고 한다. 그가 1851년에 한 연설인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는 구구절절 팩폭으로 꽉차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이중고를 겪었을 흑인 여성으로서 그녀가 목도하고 체험한 온갖 부조리와 부당함과 불의를 타인인 나는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연설에 담은 한 문장, 한 문장에는 그 답답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잘 드러난다. 마치 뜨거운 물에 티백을 우려내 하 모금, 한 모금 찻잎의 생전의 기억을 오롯하게 느끼게 되는 것처럼.

 

 이 책의 엮은이는 남성 정치가들이나 인권운동가 등의 연설문 뿐 아니라 여성들의 연설문도 균형있게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역사 속에서 가치 있는 궤적을 그린 연설문들을 시간 순으로 차례로 정리하면서 각 연설문의 주제 역시 다채롭게 구성했다.

 

 

 여러분 역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 채 일시적인 구원만 생각하는 무수한 군중 틈에 서려는 것입니까? 저는 어떠한 정신적 고통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아낼 것입니다. 최악의 사태를 파악하여 이에 대비할 것입니다.
 제 발길을 인도해줄 등불은 단 하나, 바로 경험의 등불입니다. 미래를 판단하는 길은 과거를 비추는 것밖에 없습니다.
37쪽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 윌리엄스버그, 세인트 존 성당, 1775년 3월 23일 연설

 

 

 미래를 판단하는 길은 과거를 비추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과거에 현재였을 수많은 시간을 밝혔던 그 언어들을 읽는 것이다. 혼란과 불확실의 현재 속에서 경험의 등불을 굳세게 지피고 길을 찾는 일이다. 오늘 밖에 모르는 우리는 오늘날이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혼란한 시대인 것처럼 느끼지만 실상은 어느 때나 인간들의 삶은 혼란했다. 그 와중에서 이미 길을 찾은 과거이기에 우리에게는 지나간 역사가 명료하게 보일 뿐. [위대한 명연설]을 읽는 건 과거를 비추는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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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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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가 사시던 온양의 시골집은 항상 나무먼지 냄새가 났다. 그냥 먼지도 아니고 오래된 나무에서 나는 나무먼지. 여섯 살의 나는 할아버지 댁에 가자고 하면 항상 그 집의 풍경이나 집 앞 벌판의 소리 대신 냄새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 대청마루의 반들반들한 바닥에 볼을 대고 있으면 '50년 전에도 이런 냄새가 났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50년 전에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시계 장인이었다고 했다. 만주로 도망치듯 가서 기술을 배웠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시계 만지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골집에는 녹슨 시계 부속들이 마구잡이로 굴러다니곤 했다. 엄마에게 젊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는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고 시골집 구석에서 시계판이나 굵은 바늘이라도 마주치면 엄마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의 화석을 발굴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궁금함은 다 풀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자기를 뭐라고 소개했을까? 왜 만주에서 하던 시계 일을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그만두셨을까? 할아버지는 아버지(증조 할아버지)를 싫어해서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과 고향 밖에서는 온양 출신이라고 밝히기를 꺼렸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할머니에게 들어서야 알았다.

 

 이승우 소설가는 최근의 에세이집([소설가의 귓속말])에서 '고향이란 사람'이라고 썼다. 할아버지에게 고향은 엄격하고 뜻이 안 맞는 아버지, 답답한 어머니, 온갖 참견을 늘어놓는 동네사람들이었던 걸까. 고향 밖에서는 자기 출신을 일절 밝히지 않았던 건, 자기 입으로 출신을 뱉었을 때 의도치 않게 함께 소환되는 수많은 사람,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 때문이었을까.

 

 

 사샤 스타니시치는 독일에서 소설을 발표하고 독일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출신지는 독일이 아니다. 그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나 14년을 살았다.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나자 부모님을 따라 고향을 떠나 독일로 이주했다. 고향이 싫어서도 아니고 고향의 사람들이 갑갑해서도 아니었던 그는 그렇게 고향을 떠나 독일에 정착했고 아마 출신에 대한 그의 험난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터였다.

 

 "당신은 어디 출신인가요?" 이 질문을 받는다는 건 내가 나의 태어난 곳, 자란 곳, 내가 속한 곳을 떠나 있다는 증명이다. 떠나지 않으면 이런 질문을 받을수도 없고 출신에 대한 고민도 시작되지 않는다. "저는 서울 사람이에요." 이렇게 쉬운 답은 조금 미안하고 시시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세상에서 지워진 도시라면 얼마나 대답하기가 난감할까. 그 도시의 추억, 풍경, 도시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신화와 전설들, 역사들이 지워졌다면 도시의 이름을 말한들 그걸 출신에 대한 완전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가 뿔뿔이 흩어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친척들의 이야기를 자청해서 듣고 그걸 쓰기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물이 높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그 물길이 정해져 있듯이 저자의 글의 길도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일생에 언제든 한번은 꼭 '나는 누구인가'를 뿌리 깊이 고민하게 마련이고, 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하여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고조 할아버지를 따라 좇아가기 마련이고, 소중한 걸 잃어버렸다면 반드시 찾아나서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진부하고 고리타분하다고? 너무 당연해서? 그게 인간 아닌가. 그토록 당연한 존재.

 

 하지만 이 작품 [출신]은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하게 흘러가는 소설이 아니다.  사샤 스타니코비치의 '출신'에 대한 고찰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내가 겪은 경험치와는 사뭇 달랐다. 

 

 

 

 어디서 왔냐는 말이 암시하는 바가 뭔지부터 정확히 따져봐야 해요. 분만실이 위치한 언덕의 지리적인 위치를 암시하는지, 마지막 진통이 시작되는 순간에 머물고 있는 나라의 국경을 암시하는지? 부모님 혈통인지? 유전자, 조상, 방언인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출신이 창조물이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한번 입으면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하는 옷 같은 거죠. 그건 저주예요! 아니면 약간의 운이 들어 있는 능력이랄 수 있어요. 재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장점과 특권을 만들어내는 능력말이죠.

 책 44쪽

 

 

 전쟁을 피해 살 곳을 찾아들어온 난민의 문제는 난민의 입장에서도, 난민을 수용하기로 한 국가와 국민의 입장에서도 양측 모두에게 원만하게 풀기가 만만치 않은 어려운 일이다. [출신]에는 내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출신'의 문제들이 가득하다. 이력서를 쓰는 것처럼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이 나의 정체성 전부를 고찰하게 만드는 어려운 일이 된다. 갈기갈기 찢겨진 가족들, 전설로 남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들. 출신은 사람인데,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나의 세계를 하나하나 꿰어맞춘 퍼즐처럼 수많은 사람이라, 그 퍼즐 중에 하나만 없어도 나의 출신은 미완성의 볼품없는 것이 되고야 만다.

 

 

 

 할아버지가 거실로 나왔다. 임무를 수행하는 주인공인 두 요원을 한동안 지켜보더니 질문이 있다면서 방해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방금 그게 뭐냐?" 나는 대답햇다. "외계인요."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나 같구나!" 그러고는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책  102쪽

 

 

 외국인이 아닌, 외계인일 수 밖에 없는 출신의 난민들. [출신]은 난민의 현주소를 세밀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저자는 난민 출신으로서 발견한 사회적 부당함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대신에  훨씬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더듬어 찾으려는 정성을 들여서.

 

 뉴욕에서 태어난 사람이 두바이에서 자라다가 상하이에서 일하게 되는 '집시'가 흔한 우리 시대에 출신을 정체성으로 전환해서 바라보는 관점은 너무 오래되어 진부해보일 수 있다. 출신을 한 곳으로 집어 말할 수 없는 우리는 모두 '글로벌 시대'의 집시들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샤 스타니시치가 쓴대로 사람이, 나를 이끄는 우연이, 전쟁과 그 불똥이 모두다 나의 출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출신에 담긴 정체성의 깊이도 변하지 않는다. 사샤 스타니시치는 어쩌면 밀레니얼세대 모두가 하는 정체성의 고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주인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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