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안녕하시다 2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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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모습이었으나 아직 소년의 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그게 진짜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는 것, 그게 당당한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야.”
 나는 왕이 진짜배기 임금이 되려면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왕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송시열을 죽이든 살리든 간에 모든 신하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문무백관과 수령과 만백성 모두가 왕을 우러러보고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1권 221쪽

 

“임금에게 신하란 장기판의 말과 같은 것이거늘, 때에 따라 총애하고 중용하기도 하지만 소용을 다하면 결국 버릴 수밖에. 혈육이든 처자든 백성이든 나라든 내가 있고서 있는 법.”
 나는 기가 막혀서 왕의 신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등을 돌렸다.
2권 402쪽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야기가 저잣거리에서 회자된다고 그 손자가 말했겠다. 그래, 지금도 조선 최고의 러브스토리라고 누가 물으면 성춘향이와 이몽룡이 커플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춘향이와 몽룡이는 그들의 손자에게 최고 러브스토리의 왕관을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미모와 수완, 잔머리(후에는 무술 고수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는)를 지닌 성형이와 저잣거리에서 그를 만나 단번에 의형제를 맺어버린 당돌한 꼬맹이 왕 이순과의 러브스토리를 과연 어떤 커플이 이길 수 있을까 싶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사실과 상상력을 교차로 촘촘히 엮은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독하고 시리고 진한.

 

 짐이 곧 국가라며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절대 왕정을 확립할 동안 조선에서 숙종 역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동양이나 서양이나 왕이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략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그럼 무얼 하고 지냈을까? 왕이 곧 나라라는, 왕이 없고서는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마어마한 위치를 왕이 차지해버렸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럼 어디를 차지해야 했을까? 하나밖에 없지. 왕의 마음이다.

 

 세자로 책봉되는 그 순간 아니, 왕실에서 태어나 언젠가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지위를 스스로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꼬마는 그냥 꼬맹이가 아니었을터다. 내가 안녕해야만 나라가 안녕하다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내가 세상의 법이라는 믿음에 따라 자기 자신이 안녕하기 위하여 필요한 온갖 것을 다 구축했겠지. 왕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때, 그러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어린 이순이 성형과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하여 순식간에 형제의 의를 맺어버린 그 순간에 꼬마가 발휘한 것이 아마 페로몬이 아니었을까. 그 페로몬에 취하여 왕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왕의 신하로서,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마다않는 충정을 다하고야 말게 되는 일이다. (훗날을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사고처럼 일어난다 하던가.) 그러고선 어떻게든 왕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왕의 마음에서 내쫓기지 않기 위하여 평생에 궂은 수고를 다한다. 왕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자가 왕과 비밀리에 의형제를 맺은 단 한 사람이면 그래도 팔자가 좀 나았으려나? 왕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왕의 마음을 구했다. 왕을 중심으로 때로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한 편이 되고 때로는 저 사람과 그 사람이 한 편이 되어 무당 굿하듯 한바탕 강강수얼래를 뛰고 뛰며 왕의 마음땅을 땅따먹기 하는 것이 궁이었고 왕국이었다. 그 속에서 왕을 사랑했던, 왕이 왕인 줄도 의형제를 맺고, 소녀보다 곱게 생긴 어린 꼬마 왕을 지켜주고 싶었던 순진한 청년은 저도 모르게 목숨을 건 강강수얼래를 같이 뛰고야 만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사랑했겠지만, 성석제의 신작 [왕은 안녕하시다]의 주인공인 성형의 사랑은 특별히 독하고 시리고 진하다. 애정愛情보다 독한 것이 애증愛憎인 법. 성형은 왕이 보위에 오를 때부터 줄곧 그의 최측근으로 곁에서 지켜주려는 사랑, 대견히 여기는 사랑,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 이제는 정이 들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관대하게 품는 사랑을 거쳐 아주 지긋지긋하고 질리고 밉고 미워서 멀리 얼굴만 봐도 배알이 틀리고 토악질이 나오는 사랑의 단계까지 두루 거친다. 그런 그의 사랑이 어떻게 특별하지 않을 수 있나? 이리 같은 신하들 속에서 외롭고 처연했던 꼬맹이가 껍질을 벗고 수탉이 되어 그 강한 부리를 아끼지 않고 신하들을 내치며 쪼아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았을 때, 왕의 손에 묻힌 돌이킬 수 없는 피를 (왕조차 안타까워하지 않을 때) 그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던지. 왕의 안녕을 지키기 위하여 벌어지는 소용돌이 속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그 속에서 사랑하는 왕의 순결한 마음도, 나라를 위하는 충신들의 명줄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성형은 얼마나 사무치게 마주해야 했던지.

 

 성형이 사모하던 장옥정을 끝내 왕의 품으로 보냈을 때보다, 성형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 읽을 때보다 성형과 왕이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이 몇 배는 더 안타깝고 슬펐다. 야당 장군, 미수 스승, 박태보 등 의로운 인물들이 덧없이 스러지는 비정한 조정의 풍경 속에 유일하게 산소 같은 사람이었을 성형을 떠나보내고 숙종은 얼마나 헛헛하였을까? 성형은 또 애증 속에 남아 있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얼마나 왕을 안쓰럽게 여겼을까? 아, 그런데 추월이는 결국 성형의 순전한 애정과 관심을 받게 되었을까? (여기서야 하는 말이지만 성형이는 저가 왕에게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해놓고 저가 그런다.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이 책의 말미에서, 글로는 더 이어지지 않는 그들의 뒷이야기를 혼자 추적하며 애달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저자 성석제 덕분이다. 저자는 흔적이 분명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생애를 솜씨 좋게 엮고 그 매듭 사이사이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필부필녀의 삶들을 섬세하게 겹치고 끼워 넣어 마치 세밀화 한편을 완성하듯 이 작품을 그려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송시열은 어떻게 필부필녀의 삶이 귀한 서책이 될 수 있냐고 의아하였으니 지금의 시대를 보게 된다면 기절할 판이겠지. 소박하고 조촐한 개인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온갖 이야기판을 가로지르는 이 세상을 보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저자는 책의 시작과 끝에,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넣어, 노량진 헌책방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갔다가 다시 노량진 헌책방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골목 끝에서 문득 마주친 신비한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의 기상천외한 풍경을 엿본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아이가 된 것처럼, 마치 놀이동산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침대에 걸터 앉아 숨을 고르는 것처럼, 나는 [왕은 안녕하시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후에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름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수많은 필부필녀들이 남기고 간 삶의 자락들을 내가 밟고 나 역시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성형처럼 갑자기 비수를 전수받아 무림의 고수가 되거나 왕의 최측근이 되거나 하는 일들은 바라지 않는다. 너무 고단하니까, 그런 삶은. 그러나 [왕은 안녕하시다]의 처음 화자로 등장하는 그 누군가처럼 아무도 모르는 역사 속 뒷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다면, 나 역시 노량진 헌책방을 누비며 손에 거미줄을 제법 묻혀 보고 싶다. 그 당시에는 필부였으나, 오늘날 나에게는 보물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임금에게 신하란 장기판의 말과 같은 것이거늘, 때에 따라 총애하고 중용하기도 하지만 소용을 다하면 결국 버릴 수밖에. 혈육이든 처자든 백성이든 나라든 내가 있고서 있는 법."
나는 기가 막혀서 왕의 신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등을 돌렸다.
2권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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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안녕하시다 1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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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모습이었으나 아직 소년의 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그게 진짜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는 것, 그게 당당한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야.”
 나는 왕이 진짜배기 임금이 되려면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왕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송시열을 죽이든 살리든 간에 모든 신하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문무백관과 수령과 만백성 모두가 왕을 우러러보고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1권 221쪽

 

“임금에게 신하란 장기판의 말과 같은 것이거늘, 때에 따라 총애하고 중용하기도 하지만 소용을 다하면 결국 버릴 수밖에. 혈육이든 처자든 백성이든 나라든 내가 있고서 있는 법.”
 나는 기가 막혀서 왕의 신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등을 돌렸다.
2권 402쪽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야기가 저잣거리에서 회자된다고 그 손자가 말했겠다. 그래, 지금도 조선 최고의 러브스토리라고 누가 물으면 성춘향이와 이몽룡이 커플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춘향이와 몽룡이는 그들의 손자에게 최고 러브스토리의 왕관을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미모와 수완, 잔머리(후에는 무술 고수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는)를 지닌 성형이와 저잣거리에서 그를 만나 단번에 의형제를 맺어버린 당돌한 꼬맹이 왕 이순과의 러브스토리를 과연 어떤 커플이 이길 수 있을까 싶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사실과 상상력을 교차로 촘촘히 엮은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독하고 시리고 진한.

 

 짐이 곧 국가라며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절대 왕정을 확립할 동안 조선에서 숙종 역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동양이나 서양이나 왕이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략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그럼 무얼 하고 지냈을까? 왕이 곧 나라라는, 왕이 없고서는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마어마한 위치를 왕이 차지해버렸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럼 어디를 차지해야 했을까? 하나밖에 없지. 왕의 마음이다.

 

 세자로 책봉되는 그 순간 아니, 왕실에서 태어나 언젠가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지위를 스스로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꼬마는 그냥 꼬맹이가 아니었을터다. 내가 안녕해야만 나라가 안녕하다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내가 세상의 법이라는 믿음에 따라 자기 자신이 안녕하기 위하여 필요한 온갖 것을 다 구축했겠지. 왕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때, 그러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어린 이순이 성형과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하여 순식간에 형제의 의를 맺어버린 그 순간에 꼬마가 발휘한 것이 아마 페로몬이 아니었을까. 그 페로몬에 취하여 왕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왕의 신하로서,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마다않는 충정을 다하고야 말게 되는 일이다. (훗날을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사고처럼 일어난다 하던가.) 그러고선 어떻게든 왕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왕의 마음에서 내쫓기지 않기 위하여 평생에 궂은 수고를 다한다. 왕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자가 왕과 비밀리에 의형제를 맺은 단 한 사람이면 그래도 팔자가 좀 나았으려나? 왕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왕의 마음을 구했다. 왕을 중심으로 때로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한 편이 되고 때로는 저 사람과 그 사람이 한 편이 되어 무당 굿하듯 한바탕 강강수얼래를 뛰고 뛰며 왕의 마음땅을 땅따먹기 하는 것이 궁이었고 왕국이었다. 그 속에서 왕을 사랑했던, 왕이 왕인 줄도 의형제를 맺고, 소녀보다 곱게 생긴 어린 꼬마 왕을 지켜주고 싶었던 순진한 청년은 저도 모르게 목숨을 건 강강수얼래를 같이 뛰고야 만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사랑했겠지만, 성석제의 신작 [왕은 안녕하시다]의 주인공인 성형의 사랑은 특별히 독하고 시리고 진하다. 애정愛情보다 독한 것이 애증愛憎인 법. 성형은 왕이 보위에 오를 때부터 줄곧 그의 최측근으로 곁에서 지켜주려는 사랑, 대견히 여기는 사랑,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 이제는 정이 들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관대하게 품는 사랑을 거쳐 아주 지긋지긋하고 질리고 밉고 미워서 멀리 얼굴만 봐도 배알이 틀리고 토악질이 나오는 사랑의 단계까지 두루 거친다. 그런 그의 사랑이 어떻게 특별하지 않을 수 있나? 이리 같은 신하들 속에서 외롭고 처연했던 꼬맹이가 껍질을 벗고 수탉이 되어 그 강한 부리를 아끼지 않고 신하들을 내치며 쪼아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았을 때, 왕의 손에 묻힌 돌이킬 수 없는 피를 (왕조차 안타까워하지 않을 때) 그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던지. 왕의 안녕을 지키기 위하여 벌어지는 소용돌이 속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그 속에서 사랑하는 왕의 순결한 마음도, 나라를 위하는 충신들의 명줄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성형은 얼마나 사무치게 마주해야 했던지.

 

 성형이 사모하던 장옥정을 끝내 왕의 품으로 보냈을 때보다, 성형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 읽을 때보다 성형과 왕이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이 몇 배는 더 안타깝고 슬펐다. 야당 장군, 미수 스승, 박태보 등 의로운 인물들이 덧없이 스러지는 비정한 조정의 풍경 속에 유일하게 산소 같은 사람이었을 성형을 떠나보내고 숙종은 얼마나 헛헛하였을까? 성형은 또 애증 속에 남아 있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얼마나 왕을 안쓰럽게 여겼을까? 아, 그런데 추월이는 결국 성형의 순전한 애정과 관심을 받게 되었을까? (여기서야 하는 말이지만 성형이는 저가 왕에게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해놓고 저가 그런다.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이 책의 말미에서, 글로는 더 이어지지 않는 그들의 뒷이야기를 혼자 추적하며 애달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저자 성석제 덕분이다. 저자는 흔적이 분명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생애를 솜씨 좋게 엮고 그 매듭 사이사이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필부필녀의 삶들을 섬세하게 겹치고 끼워 넣어 마치 세밀화 한편을 완성하듯 이 작품을 그려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송시열은 어떻게 필부필녀의 삶이 귀한 서책이 될 수 있냐고 의아하였으니 지금의 시대를 보게 된다면 기절할 판이겠지. 소박하고 조촐한 개인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온갖 이야기판을 가로지르는 이 세상을 보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저자는 책의 시작과 끝에,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넣어, 노량진 헌책방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갔다가 다시 노량진 헌책방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골목 끝에서 문득 마주친 신비한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의 기상천외한 풍경을 엿본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아이가 된 것처럼, 마치 놀이동산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침대에 걸터 앉아 숨을 고르는 것처럼, 나는 [왕은 안녕하시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후에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름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수많은 필부필녀들이 남기고 간 삶의 자락들을 내가 밟고 나 역시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성형처럼 갑자기 비수를 전수받아 무림의 고수가 되거나 왕의 최측근이 되거나 하는 일들은 바라지 않는다. 너무 고단하니까, 그런 삶은. 그러나 [왕은 안녕하시다]의 처음 화자로 등장하는 그 누군가처럼 아무도 모르는 역사 속 뒷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다면, 나 역시 노량진 헌책방을 누비며 손에 거미줄을 제법 묻혀 보고 싶다. 그 당시에는 필부였으나, 오늘날 나에게는 보물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모습이었으나 아직 소년의 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그게 진짜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는 것, 그게 당당한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야."
나는 왕이 진짜배기 임금이 되려면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왕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송시열을 죽이든 살리든 간에 모든 신하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문무백관과 수령과 만백성 모두가 왕을 우러러보고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1권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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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교육을 설계한다 - 문제 풀이 수업에서 문제 해결 교육으로, 개인적 성취에서 사회적 실현으로
마크 프렌스키 지음, 허성심 옮김 / 한문화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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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을 탁월하게 설명하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교육’을 뽑고 싶다.

 짐승은 어미를 따라하며 자란다. 발로 서는 법 혹은 달리는 법이나 먹이를 먹는 법 혹은 잡는 법 등등. 사람도 물론 부모를 비롯한 성인을 따라하며 자란다.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따라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체계적이고 분명한 학습을 한다. 교육. 사람을 사람 되게 만드는 행위이자 한 생애를 우주라고 했을 때,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과정이라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5~6살 아이부터 18세 가량이 될 때까지 연단위의 단계별로 과정을 구성하여 교육한다. 이 책에서는 그 과정은 ‘k-12’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본래 미국에서 시행되는 학제를 가리키고 우리나라의 초중고 과정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저자는 이 k-12 교육의 단점부터 꼬집으며 책을 시작한다. 이 교육 과정이 본래 아주 잘못되었거나 틀렸다는 게 아니라,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미래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인데도, 단 몇 년 사이에 세상은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방송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일정관리, 금융관리, 여가나 취미생활, 쇼핑, 놀이 그리고 교육.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으로 인강을 듣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방법으로 교육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인가? 아이의 학원 수강 현황과 상태 그리고 피드백들이 부모의 스마트폰으로 전송되고, 아이의 학습 상태를 다각도로 측정한 데이터들이 아이의 교육에 수시로 동원된다. 예전처럼 책을 읽고 칠판에 쓰고 시험을 쳐서 결과로 아이의 학습 상태를 측정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교육 과정도 바뀌어야 하는 법. 저자가 외치는 메시지도 바로 이 지점이다. 미래에는 미래에 맞는 교육을 해나가야 하고, 그 교육 방법은 지금부터 준비해야만 한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에 맞는 교육법을 들여야 한다. 당연한 말씀. 다만, 저자도 지적했듯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참교육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듯 하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성장하고, 학생이 일방적인 학습이 아니라 자율과 소통과 무한한 사유를 통하여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돕는 일. 과거의 서당이 그랬고, 그보다 더 옛날에 아테네 아카데미와 같은 철학자들의 교육기관이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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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
조던 B. 피터슨 지음, 강주헌 옮김 / 메이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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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 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법칙 2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법칙 3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법칙 4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
법칙 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법칙 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법칙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법칙 8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
법칙 9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법칙 10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
법칙 11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법칙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온라인 서점 책 소개 페이지에서 목차를 읽었다.
 와우! 훌륭했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와, 이거 진짜. 진짜!! 내가 나한테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의 의미를 이렇게 한 줄로 정리해버리다니. 감탄했다. 공감했고 박수를 쳤다. 탄복하며 책을 주문했다.
고수다. 진짜 고수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책의 가장 첫 번째 챕터인 법칙 1을 읽을 때까지만해도 그랬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법칙8번에 부응하여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 책이 많이 팔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혼돈의 해독제라고? 글쎄..... 크고 작은 혼돈을 아주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대형 혼돈으로 뭉개버려서 혼돈의 해독제라고 부제를 붙인 것인가?

 이 책에 박수를 보내고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많은 독자들이 있기에 그 독자들의 눈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책에서 읽어내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법이니.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정말 위험한 책이구나, 라고 느낀 이유는 이 한 가지다. 성경은 사람의 도덕성을 설명하는 교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성경을 빌어 사람의 도덕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썼다. 신학도 했다는 양반이..... 왜요????
 우리집에 만들 때부터 잘못 만들어서 반듯하지 않고 0.2mm 정도 비스듬하게 그어지는 자가 있다. 이 자로는 어떤 펜으로 줄을 그어도 다 기이한 사선이 된다. 처음에는 직선으로 그어진 줄 알았는데 미묘하게 다 비틀려 있더라. 우리 아버지 등 긁개로 쓰려고 그냥 두었다. 
 


 이 책에 읽을만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게 아니라서 더 위험하다. 원래 가장 독한 거짓말은 10가지가 다 거짓인 거짓말이 아니라 10가지 중에 5~6가지가 거짓이고 그 나머지는 참인 거짓말이 진짜 독한 법이다. 구별이 안되니까. 특히 책의 제일 뒤에 노먼 도이지 교수가 이 책 해설이라고 쓴 내용이 있는데 그 부분이 참으로 내 마음에 와 닿고 동감이 되어서 더욱 무릎을 치며 안타까움을 금하질 못하겠다. 이렇게 좋은 말들이 있는데 좋은 책, 권할 만한 책이 아니라는 점이.... 원, 이런 세상에.... 저자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라고 하는 책을 내면서, 이 책이 주는 잘못된 내용을 수용하는 것도 오롯이 독자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마는 것인가? (그럴 요량이니 책을 냈겠지....... 라고 혼자 생각하고 말아버린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법칙이 있다면 당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503쪽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법칙이 있다면 당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5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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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사고의 힘 5W1H
와타나베 고타로 지음, 안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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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단순한 사고의 힘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쉬울 거라 생각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단순했나? 너무 과하게 단순한 나머지 단순한 사고를 쉬운 사고라고 혼자 정의 내려 버리곤 '어맛! 이것은 나처럼 단순한 독자를 위한 책!'이라 기대해버렸다.

 

 실무에 바로 적용 가능한 프레임워크, 효과적이고 쉬운 그래서 누구라도, 어떤 분야에도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발상법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일이든 내년이든 아마 언젠간 이 책을 꼭 한 번은 읽게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육하원칙’이라고 부르는 5W1H(who, when, where, what, why 그리고 how)를 이토록 효과적이고 분석적인 전략 체계로 수립하여 높은 활용도를 보여주는 책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솔직히 육하원칙을 기사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글쓰기 원칙 정도로만 인식했다. 그런데 [단순한 사고의 힘 5W1H]의 저자는 마치 ‘너, 어디까지 해봤니?’라고 묻는 것처럼, 육하원칙이 얼마나 성능 좋은 발상 엔진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러하다보니, 이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독자가 단순하게, 바꿔 말하면 대충 혹은 쉽게 생각하며 이 책을 읽어서는 절대 저자가 제시하는 프레임워크를 십분 활용할 수 없다. 제목에서 사용한 ‘단순한 사고’은 군더더기를 쳐내고 본질(핵심)만 남길 수 있는 간결한 사고(능력)을 뜻한다.

 

 단순하다와 쉽다를 동의어로 착각한 나의 실수처럼, 사람은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면 쉽게 쉽게 해결해보려고 한다. 그 자체가 이미 실수다. 문제가 발생한 상황 자체가 쉽지 않은데, 쉽게 가자는 태도나 자세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저자는 목적과 수단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눈을 가지고 가장 표면에 드러나는 ‘무엇을, 어떻게’ 보다 ‘왜’로 거슬러 올라가 볼 것을 제안하고 나아가 ‘왜’보다 더 높은 곳 (어쩌면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왜? big-why’를 생각해보라고 충고한다. ‘가장 본질적인 왜?’는 어떻게 되고 싶은가(be)를 의미한다. 매일 저녁 외국어공부를 하는 사람의 ‘왜’는 외국어를 잘하고 싶다거나 시험 점수를 따야겠다(취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지만, 그 ‘왜’보다 더 높은 (혹은 더 깊은) 곳에는 ‘가장 본질적인 왜?’에 해당하는 ‘취업하고 싶다(be) 혹은 여행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는 것을 보면 저자가 제시한 회귀 분석 사고 모델이 금방 이해된다.

 

 책은 작고 페이지는 많지 않으나 이 책을 읽는 데에는 한참 걸렸다. 저자가 제시한 분석 사고 모델들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에 적용해보면서 스스로 솔루션을 찾아보며 읽다보니 한 챕터를 넘어가는 데에만 몇 시간이 걸리곤 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낚였다. 단순한 사고의 힘이라더니...

 

 하지만 조금 품이 들더라도 진짜 단순한 사고(쉬운 사고 아님 주의)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런 당신에게 추천
쉽게 생각하는 습관에 젖어 전략 사고가 어려운 사람
전략 혹은 분석적 사고를 하고 싶지만 적당한 도구를 찾지 못해서 난감한 사람
업무나 생활 환경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사람


 

우리는 전동 드릴이라는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구멍을 뚫어 아이의 사진을 벽에 걸고 행복을 느끼는 일’이 가능해지도록 돕는다. 이와 같이 BIg-Why에 접근하고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는 사고를 도약,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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