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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안녕하시다 1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모습이었으나 아직 소년의 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그게 진짜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는 것, 그게 당당한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야.”
나는 왕이 진짜배기 임금이 되려면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왕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송시열을 죽이든 살리든 간에 모든 신하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문무백관과 수령과 만백성 모두가 왕을 우러러보고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1권 221쪽
“임금에게 신하란 장기판의 말과 같은 것이거늘, 때에 따라 총애하고 중용하기도 하지만 소용을 다하면 결국 버릴 수밖에. 혈육이든 처자든 백성이든 나라든 내가 있고서 있는 법.”
나는 기가 막혀서 왕의 신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등을 돌렸다.
2권 402쪽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야기가 저잣거리에서 회자된다고 그 손자가 말했겠다. 그래, 지금도 조선 최고의 러브스토리라고 누가 물으면 성춘향이와 이몽룡이 커플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춘향이와 몽룡이는 그들의 손자에게 최고 러브스토리의 왕관을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미모와 수완, 잔머리(후에는 무술 고수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는)를 지닌 성형이와 저잣거리에서 그를 만나 단번에 의형제를 맺어버린 당돌한 꼬맹이 왕 이순과의 러브스토리를 과연 어떤 커플이 이길 수 있을까 싶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사실과 상상력을 교차로 촘촘히 엮은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독하고 시리고 진한.
짐이 곧 국가라며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절대 왕정을 확립할 동안 조선에서 숙종 역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동양이나 서양이나 왕이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략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그럼 무얼 하고 지냈을까? 왕이 곧 나라라는, 왕이 없고서는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마어마한 위치를 왕이 차지해버렸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럼 어디를 차지해야 했을까? 하나밖에 없지. 왕의 마음이다.
세자로 책봉되는 그 순간 아니, 왕실에서 태어나 언젠가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지위를 스스로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꼬마는 그냥 꼬맹이가 아니었을터다. 내가 안녕해야만 나라가 안녕하다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내가 세상의 법이라는 믿음에 따라 자기 자신이 안녕하기 위하여 필요한 온갖 것을 다 구축했겠지. 왕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때, 그러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어린 이순이 성형과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하여 순식간에 형제의 의를 맺어버린 그 순간에 꼬마가 발휘한 것이 아마 페로몬이 아니었을까. 그 페로몬에 취하여 왕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왕의 신하로서,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마다않는 충정을 다하고야 말게 되는 일이다. (훗날을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사고처럼 일어난다 하던가.) 그러고선 어떻게든 왕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왕의 마음에서 내쫓기지 않기 위하여 평생에 궂은 수고를 다한다. 왕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자가 왕과 비밀리에 의형제를 맺은 단 한 사람이면 그래도 팔자가 좀 나았으려나? 왕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왕의 마음을 구했다. 왕을 중심으로 때로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한 편이 되고 때로는 저 사람과 그 사람이 한 편이 되어 무당 굿하듯 한바탕 강강수얼래를 뛰고 뛰며 왕의 마음땅을 땅따먹기 하는 것이 궁이었고 왕국이었다. 그 속에서 왕을 사랑했던, 왕이 왕인 줄도 의형제를 맺고, 소녀보다 곱게 생긴 어린 꼬마 왕을 지켜주고 싶었던 순진한 청년은 저도 모르게 목숨을 건 강강수얼래를 같이 뛰고야 만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사랑했겠지만, 성석제의 신작 [왕은 안녕하시다]의 주인공인 성형의 사랑은 특별히 독하고 시리고 진하다. 애정愛情보다 독한 것이 애증愛憎인 법. 성형은 왕이 보위에 오를 때부터 줄곧 그의 최측근으로 곁에서 지켜주려는 사랑, 대견히 여기는 사랑,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 이제는 정이 들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관대하게 품는 사랑을 거쳐 아주 지긋지긋하고 질리고 밉고 미워서 멀리 얼굴만 봐도 배알이 틀리고 토악질이 나오는 사랑의 단계까지 두루 거친다. 그런 그의 사랑이 어떻게 특별하지 않을 수 있나? 이리 같은 신하들 속에서 외롭고 처연했던 꼬맹이가 껍질을 벗고 수탉이 되어 그 강한 부리를 아끼지 않고 신하들을 내치며 쪼아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았을 때, 왕의 손에 묻힌 돌이킬 수 없는 피를 (왕조차 안타까워하지 않을 때) 그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던지. 왕의 안녕을 지키기 위하여 벌어지는 소용돌이 속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그 속에서 사랑하는 왕의 순결한 마음도, 나라를 위하는 충신들의 명줄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성형은 얼마나 사무치게 마주해야 했던지.
성형이 사모하던 장옥정을 끝내 왕의 품으로 보냈을 때보다, 성형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 읽을 때보다 성형과 왕이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이 몇 배는 더 안타깝고 슬펐다. 야당 장군, 미수 스승, 박태보 등 의로운 인물들이 덧없이 스러지는 비정한 조정의 풍경 속에 유일하게 산소 같은 사람이었을 성형을 떠나보내고 숙종은 얼마나 헛헛하였을까? 성형은 또 애증 속에 남아 있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얼마나 왕을 안쓰럽게 여겼을까? 아, 그런데 추월이는 결국 성형의 순전한 애정과 관심을 받게 되었을까? (여기서야 하는 말이지만 성형이는 저가 왕에게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해놓고 저가 그런다.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이 책의 말미에서, 글로는 더 이어지지 않는 그들의 뒷이야기를 혼자 추적하며 애달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저자 성석제 덕분이다. 저자는 흔적이 분명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생애를 솜씨 좋게 엮고 그 매듭 사이사이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필부필녀의 삶들을 섬세하게 겹치고 끼워 넣어 마치 세밀화 한편을 완성하듯 이 작품을 그려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송시열은 어떻게 필부필녀의 삶이 귀한 서책이 될 수 있냐고 의아하였으니 지금의 시대를 보게 된다면 기절할 판이겠지. 소박하고 조촐한 개인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온갖 이야기판을 가로지르는 이 세상을 보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저자는 책의 시작과 끝에,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넣어, 노량진 헌책방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갔다가 다시 노량진 헌책방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골목 끝에서 문득 마주친 신비한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의 기상천외한 풍경을 엿본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아이가 된 것처럼, 마치 놀이동산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침대에 걸터 앉아 숨을 고르는 것처럼, 나는 [왕은 안녕하시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후에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름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수많은 필부필녀들이 남기고 간 삶의 자락들을 내가 밟고 나 역시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성형처럼 갑자기 비수를 전수받아 무림의 고수가 되거나 왕의 최측근이 되거나 하는 일들은 바라지 않는다. 너무 고단하니까, 그런 삶은. 그러나 [왕은 안녕하시다]의 처음 화자로 등장하는 그 누군가처럼 아무도 모르는 역사 속 뒷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다면, 나 역시 노량진 헌책방을 누비며 손에 거미줄을 제법 묻혀 보고 싶다. 그 당시에는 필부였으나, 오늘날 나에게는 보물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모습이었으나 아직 소년의 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그게 진짜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는 것, 그게 당당한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야." 나는 왕이 진짜배기 임금이 되려면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왕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송시열을 죽이든 살리든 간에 모든 신하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문무백관과 수령과 만백성 모두가 왕을 우러러보고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1권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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