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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역사 - 말과 글에 관한 궁금증을 풀다
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서순승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6월
평점 :
한국어,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우리는 모두 언어를 듣고 말하고 쓸 줄 안다. 문맹률이 높은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더라도 그 나라의 언어를 듣고 말하는 정도가 가능하다. 언젠가 다른 서평에서 ‘언어는 산소’라고 썼던 게 기억난다.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기가 어디에나, 어느 순간에나 있듯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언어 역시 그러하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죽은 뒤에조차 사람은 누구나 언어라는 공기 안에서 호흡한다.
언어는 인류 역사 속에서 사람이 배워온 (그리고 배우고 있는 것들을 포함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복잡하다. 영국의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그의 신간 [언어의 역사]에서 우리는 저마다 역사상 가장 복잡한 체계인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음을 짚어준다. 기술로서의 언어가 낯설고 어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언어 그 자체에 대해 제대로 배우거나 아는 사람은 적다. 마치 매 순간 공기로 호흡하고 있지만 공기의 분자와 구성, 부피, 무게 따위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처럼. [언어의 역사]를 한국어로 옮긴 서순승 역자는 ‘옮긴이의 말’ 서두에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언어 일반을 아는 것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서 ‘아하, 그렇지.’라는 무릎 탁!과 함께 이 책에 대한 기대감도 탁!하고 높아진다. (번역서의 경우 거의 대부분 역자의 말을 먼저 읽어보고 책 본문을 읽는 습관이 있다.)

[언어의 역사]는 기대에 부응하는 책이다. 언어의 역사와 생성, 사용, 현황 등 언어 일반에 대한 총 40개의 주제로 구성한 이 책의 모든 챕터가 재미있다. 마치 생물을 분석하듯 언어 이곳저곳에 현미경을 대고 그 모양과 변형 상태를 살펴보는 책이다.
공기 없는 지구를 상상할 수 없듯 언어 없는 인류세계 역시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언어로 지은 세상이다. 의사를 소통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인 언어. 의사를 소통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기호나 수단은 다른 생물들에게도 있지만 감정과 창의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건 오직 사람의 언어뿐이다. 그래서 언어는 사람을 사람답게, 사람 되게 하는 유일한 도구다. [언어의 역사]는 언어가 지닌 독보적인 기능과 가치를 조망하고 이를 이해한 독자들을 통하여 더 나은 언어 세계를 짓기 위한 바람으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본문에 잘 나온다. 이 한 장의 사진이 수많은 추천사를 대신한다)
흔히들 지구의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그리고 이 말은 식물, 동물, 기후변화와 마찬가지로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중략) 나는 여러분도 이들 문제에 관심을 가져, 언젠가는 여러분의 언어 세계를 보다 살기 좋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리라 기대한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대상은 나의 세계이자 여러분의 세계이니까.
422쪽 마지막 챕터 <여러분의 언어 세계> 중에서
기원전 8천년 경이 되어서야 인류가 언어능력을 갖추었다고 단언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10만 년 경 혹은 그보다 더 전에 원시적인 형태로서 말이 시작되었다고 추정하는데 가히 9만 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서야 말(리듬, 억양, 음파 등이 나타나는)이라고 할 만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에 문자의 탄생까지 계산해보면 인류가 말과 글이라는 고도의 언어 체계를 사용하게 된 건 6천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언어의 역사] 챕터 15,16 참조)
우리나라 역사를 반 만년이라고 하는데 딱 우리나라 역사 정도가 말과 글의 실질적인 역사인 셈이다. 6천 년의 시간이 흘러 현재 6천 개의 언어가 지구상에 존재하고 (그러나 이 역시 추정) 앞으로 100년 내에 세계 언어의 절반이 사멸할 것이라고 언어학자들은 전망한다. 언어 역시 살아있는 것이고 생물다양성(다양한 생물이 공존할 때 더 오래, 건강하게 생존하는 성질)의 측면에서 보자면 언어다양성 역시 보존되어야 할 가치다.

그렇다고 [언어의 역사]는 어디 먼 원시 부족의 언어를 배우자고 독려하거나 언어가 흘러온 역사와 정통성, 전통적 언어만을 설명하는 데에 주력하진 않는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언어의 속성을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데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말과 글의 속성(소리, 발음, 억양, 예절, 전문어, 형태, 문법 등등)은 우리의 현재 생활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구당 독서량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일상 속에서 영상 미디어가 차지하는 지분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언어가 점차로 우리 생활과 멀어져 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더 절대적으로 언어에 기대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공기로 숨쉬면서도 공기의 분자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과학도서처럼, 쉴새 없이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교양도서다.
첨단기술이 도입된다고 언어로 할 일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스타일의 수가 오히려 두 배로 늘어났다. 과거에는 반드시 우체국을 거쳐야 했던 업무 중 많은 부분이 지금은 온라인으로 처리된다. 지면 서식과 온라인 서식을 채우는 것은 비슷한 면도 많지만 다른 점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따라서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가려면 누구나 지면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다 컴퓨터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까지 익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390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