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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 (리커버) - 인간을 완성하는 12가지 요소
제롬 케이건 지음, 김성훈 옮김 / 책세상 / 2020년 3월
평점 :
미셸 드 몽테뉴는 불과 서른여덟의 나이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기 성으로 들어가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고, 그 에세이는 400년 이상 지난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58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가 거짓말쟁이에서 식인 풍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망라하여 쓴 에세이들은 <수상록>이라는 세 권의 수필집으로 남았다. 나는 2013년 3월 어느 추운 토요일에 이 에세이집을 다시 꺼내 읽다가 이번 세기에 대해 나도 그와 비슷한 책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몽테뉴와 비교하면 나이도 많고, 성도 없지만, 최대한 가식적이지 않게, 그리고 애매하지 않게 써볼 생각이다.
책 4쪽 저자의 프롤로그, 가장 첫 문단
몽테뉴의 에세와 비슷한 글을 써보겠다는 저자의 머리말을 읽으면 절로 웃음이 터진다. 몽테뉴보다 많이 가진 건 나이요, 적게 가진 건 성(城)? 저자 제롬 케이건은 아예 성이 없다고 하니 적게 가졌다고 하는 건 맞지 않는 말이겠다. 본문을 차근차근 읽으면서 이 프롤로그를 떠올려보니 ‘최대한 가식적이지 않게, 그리고 애매하지 않게 써보겠다’는 저자의 시도는 성공한 듯 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이 쓴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는 무슨 책이라고 딱히 짚어서 말하기 어려운 책이다. 아마 몽테뉴의 ‘에세’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독자의 반응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몽테뉴의 에세는 다른 어떤 책과도 비슷하지 않았기에 에세이라는 고유명사가 되고야 말았지.) 언어, 지식, 배경, 사회적 지위, 유전자, 뇌, 가족, 경험, 교육, 예측, 감정, 도덕의 12개 주제에 따라 저자는 그의 생각을 정리해 썼다.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안다는 건 무엇인가? 배경은 어떻게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가? 인간은 왜 남과 비교할까? 성격도 타고나는 걸까? 뇌로 정신을 설명할 수 있을까? 가족은 꼭 있어야 할까? 어린 시절 형성된 특성은 평생 갈까? 교육은 왜 필요할까? 예측은 힘을 갖고 있을까? 느낌과 감정은 다른가?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적으로 행동할까?
목차에 나란히 줄지어 앉은 질문들만 읽어도 딱 감이 온다. 이 책 범상치 않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와인 한잔을 곁에 둔, 여유로운 저녁 시간에 읽으라고 권했는데 아마 그럴 수 있는 독자는 몽테뉴의 에세 3권을 모두 다 읽고 소화하여 그걸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토론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하리라 싶다. 즉, 저자와 식견이 비슷한 수준의 독자 말이다.
저자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지적했듯이 ‘고릴라가 자기 먹이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했을 때의 ‘안다’와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느낌과 감정의 상태를 안다’고 했을 때의 ‘안다’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20년차 수목원지기가 소나무를 ‘안다’는 것과 고작해야 등산 몇 번 다녀본 내가 소나무를 ‘안다’는 것 역시 동일한 ‘안다’가 아니다. 이 책은 무엇을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실제적으로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저자가 언어, 지식, 유전자, 가족, 경험 등에 대하여 꺼내어 놓는 문장들은 내가 꺼낼 수 있는 것과 다르다.
이 책은 특정한 사상이나 이론 등에 대하여 설명하는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전체에 대한 통찰을 쓴 에세이다. 이제까지 읽은 에세이가 그냥 커피라면 이 책은 레알 TOP다. 독자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와 토론을 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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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폐렴으로 사망한 17세 고교생의 구체적인 사인이 ‘사이토카인 폭풍’으로 추정되면서 사이토카인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사이토카인’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5장 유전자와 11장 감정, 두 개의 꼭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중에 포털 검색어로 사이토카인이 올라와서 굉장히 신기했다. 동시에 이 책이 심리학, 철학, 사회학, 과학 뿐 아니라 의학의 영역과도 걸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가난, 일자리 불안, 만성 신체질환, 사회적 배제 등이 있으면 사이토카인이라는 단백질이 분비된다. 이 단백질은 상처의 치유, 감염과의 싸움을 돕고, 근육이 찢어지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독감에 걸렸을 때 동반되는 피로감이나 불쾌감을 만들어내는 뇌 영역을 활성화시킨다. 이런 느낌을 당사자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기분이 우울해질지가 결정된다. 대부분의 성인은 피곤한 느낌이나 불쾌한 느낌은 자기가 아프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특히 부상을 입었거나 감염의 신호가 있는 경우에 그렇다.
218쪽 5장 유전자 중에서
5장에서 지속적인 가난, 학대, 잦은 질병은 사이토카인이라는 단백질의 생산을 자극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이토카인은 질병과 함께 찾아오는 피로감이나 무관심함을 만들어내는 뇌 영역을 활성화한다. 이런 느낌을 감지했지만, 자신이 아프다고는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해석을 찾아내려 한다. 자기가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도 한 가지 흔한 해석이다. 사이토카인 단백질은 우울한 기분을 직접 야기하지 않는다. 이 단백질이 만들어낸 느낌이 우울증으로 해석됐을 뿐이다.
416쪽 11장 감정 중에서
진정될 줄 모르는 코로나19 사태(전 세계가 다 영향권이라 한 국가, 한 도시에서 잡는다고 안심할 수 없는 전염병) 속에서 ‘사이토카인 폭풍’에 대한 염려까지, 엎친데 덮친 느낌이라 마음이 더 불안해지는 시기다. 다만, 무분별한 즉 근거 없는, 추상적인, 모호한 염려는 없던 병도 만들 수가 있으니 이런 때에는 감정과 느낌을 단속하는 일도 무척이나 중요해 보인다.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를 읽고 나서 무엇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가 참으로 조심스럽고 겸손해졌는데, 이와 동시에 애매하지 않게, 피상적이지 않게 알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생각을 정리해나갈 것인지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한 번에 다 읽으려 하지 말고 저자와 독서토론하듯이, 주의깊게 읽게되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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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뇌의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이다. 똑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일란성 쌍둥이라도 똑같은 경험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생각이 행동과 감정에 핵심적인 기여를 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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