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하나의 문명의 바다를 찾아서 가슴 한 구석에 유럽이라는 거대하고 살아 숨쉬는 문명과 선진 공업 국가들의 탐방에 대한 설레임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미지의 세계에 첫 디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두려움으로 밀려 왔다.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첫 발을 디디면서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심화되었고, 꼭 뭔가를 가슴에 심어오리라는 각오 또한 나를 감쌌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것은 여독을 풀어줄 숙소를 찾는 것이었고, 경비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호텔예약 창구는 눈에 많이 띄었건만 그야말로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이리 저리 숙소를 해결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왠 젊은 한국인이 "민박하지 않으실래요"하며 선뜻 말을 건네왔고, 그 순간 여기서 또한 두가지의 계산이 우리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우선 하나는 그래 20일 동안 만큼은 유럽에 푹 빠지는거야. 진정으로 유럽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 민박집보다는 외국인 숙소가 낫지 않나 하는 것과 두 번째는 십여시간동안의 기내속에서의 설레임에 대한 행복한 시달림, 8시간의 시차가 우리의 몸을 나약하게 만들었고, 살아있는 정보는 그대로 mouse to mouse(?)가 최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의 몸은 한국인의 민박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초라하고 볼품은 없었지만 지친 이 몸을 재충전하기엔 충분하였다. 내일 당장부터 탐방을 시작하기 위해 잠을 청해야 했지만 젊은 배낭객들이 모인 자리라서 말그대로 "정보의 홍수"에 흠뻑 젖었고 신나게 담소를 나누느라 피곤함도 잊은채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커다란 창가 너머로 눈부실 정도의 햇살에 새로운 날을 맞이했다. 밤 10시에서야 해가서야 5시면 벌써 해가 떠서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해가 유난히 길었다. 그 전날 밤에 준비한 식빵과 잼으로 화려한 진수성찬의 아침 식사를 했고, 우리는 탐방지로 발길을 옮겼다. 탐방지로 가는동안 런던 시내의 전통있고, 유서깊은 유적지와 유물에 흠뻑 취해 본연이 임무를 상실한 채 반나절을 보냈다. 나의 뇌리에는 아차 오늘 우리의 목적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 아쉬움과 함께 발길을 영국 방송대학교의 London Center로 향했다.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무방비 상태인 우리는 온 몸으로 그 비에 맞았고, 물에 빠진 생쥐꼴로 5시가 되서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충 몸을 추스리고 들어서는 순간 담당자의 퇴근하는 모습이 눈에 꽉차게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고, 하늘의 색깔이 달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래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얼굴에 환한 미소로 사정을 해서 약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건물내부를 견학하며 설명해 주셨다.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하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워 자위를 하면서 맥빠진 다리로 숙소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기대하시라. D-Day는 다름아닌 내일. 이날은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는 필사의 날이었다. 목적지는 영국 OU의 본부. 한국에서부터 수차례 e-mail를 통해 사전연락이 되어 있었고 런던에 도착해서도 전화를 통해 확인을 받아온터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전장에 나가는 기사들처럼 마음 가짐을 단단히 하고 영국 OU 교문을 개선문인양 의기양양하여 통과했다. 제일 먼저 값싸고, 질좋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운 후에 홍보담당관외 존 딜리씨를 만났다. 그는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어찌보면 그에게 우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손님일 수 있지만 그의 태도, 말씨 하나하나는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영력하였다. 영상실, 회의실, 도서관, 각종 자료실 등을 안내하면서 원격교육의 이해를 도와주셨고, 우리는 영국 OU를 방문한 것으로 가슴 뿌듯해졌다. 미리 준비해간 녹음기에 녹음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어느덧 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깃들었다. 성공이라는 두 글자가 뇌리속을 스쳤고, 우리는 존 딜리씨에게 진정으로 고마웠고, 그에 대한 작은 성의로 한국에서 준비한 합죽선과 민속 공예품을 드렸다. 아마 오랫동안 그의 친절함과 배려는 기억속에 자리잡힐 것이다. 그 다음날 하루는 못다한 런던을 관광하기 위해 발걸음을 이리 저리 재촉해야만 했다. 국회의사당, 버킹검궁, 하이드공원, 박물관, 고성 등을 모두 둘러 보기에는 하루는 너무 모자라는 시간이라 휴식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아쉬운 런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도버에서 1박을 할 생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버에서 영국신사의 도움으로 숙소에 무사히 도착해서 1박을 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도버를 거닐었고, 배편을 이용해 프랑스 칼레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에게 도버 해협에서 칼레로 오는 동안 잊지못할 에피소드 하나가 생겼다. 선박 승무원의 실수로 우리의 배낭이 우리가 도착한 뒤 2시간 후에야 도착한 것이었다. 아차 말로만 듣던 비닐족의 현실이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우리의 거센 항의에 의해 그들은 순순히 백기를 들었고, 자신들의 실수를 경허히 인정했다. 그로 인한 대가는 암스트르담까지 직행하는 Coach를 무임승차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우리는 풍차가 있는 나라,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나라, 네델란드에 도착했다. 아니 그런데 암스트르담에 도착한 나에게 작은 충격을 주었다. 그 번잡한 홍등가속에서 크리스찬 유스호스텔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다음날 성박물관을 들를 수 있었는데 그곳엔 각종 성기구 사진과 마네킹들이 관광객을 흥분시켰다. 여기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하나의 경험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네델란드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 풍차가 있는 교외로 빠져 나갔다. 그곳에는 우리는 독일에 사는 교포를 만났다. 비록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김치를 그리워하는 우리에게 김밥과 김치를 주셨다. 같은 민족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뜨거운 동포애를 느낄 수 있었다. 스위스의 인더라겐으로 향하는 도중 독일의 퀼른에서 잠시 목을 축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 그곳엔 축제가 열렸고,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그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었다. 왠지 약간 들뜨고, 붕 떠 있는 기분은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다시 기차에 몸을 실어 스위스에 이른 아침 도착한 우리는 발머 하우스라는 명성이 있는 유스호스텔에 머물렀고, 한국 배낭객이 하도 많은지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국 유학생을 만났다. 세계각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꽉차 용광로 같았고, 특히 기억에 남은 친구는 브라질 사람이었다. 그는 태권도를 배우고 있어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되었고 군대에서 배운 실력을 보이자 너무 좋아했고, 만난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금방 우리는 오래된 친구 같은 분위기를 졌다. 그 녀석의 화끈한 성격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첫날은 목적없이 그야말로 발길 닿는대로 기차에 몸을 싣고 스위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였고, 나도 모르게 요들송을 흥얼거렸으며 강의 짙은 물색깔은 오염되지 않은 신선함을 느끼게 하였다. 날씨가 흐린탓에 융프나우를 등반하지 못하고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알프스산맥을 올라갔다. 해발 2230m에 다다르니 만년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부터는 걸어올라가야 했다. 케이블카에 있는 동안 알프스 산맥의 산자락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수 있었고, 경사가 심한지라 밑을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 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한참을 걸으니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빗방울은 자꾸 굵어져 갔고, 그칠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인 우리로선 온 몸으로 비를 맞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하늘과 가까운 곳에 시원스럽게(?) 비를 맞는 것 또한 그리 큰 곤욕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하의 기온속에 비를 맞았기 때문에 나의 체감 온도는 급격히 낮아짐을 느낄 수 있었고 나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서둘러 내려와야 했다. 로마로 향하는 역으로 가면서 굶주린 허기를 채우기 위해 길가에 있는 말레이지아 음식점에 발을 멈췄고, 시장이 반찬이라고 밥알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그곳에서 스위스에서 유학하는 한국학생을 만나서 동병상현의 정을 느꼈고,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몇마디를 남긴채 제 갈길을 가야했다. 야간 기차속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로마의 정열적인 태양에 부시시한 얼굴로 눈을 떠야 했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의 영하의 날씨와는 사뭇게 이탈리아는 지중해 여름의 열기가 나를 감싸안았다. 로마의 고대 유물에 대해 서서히 얼은 나의 몸과 마음은 녹아 내렸다. 아니 벌써 기온적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언어의 장벽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손짓, 발짓으로 현지인과 친숙히 대화를 나눌수가 있었고, 현지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이천년이 다 되어가는 콜로세움과 방송을 녹화하던 스페인광장, 동정을 세 번 던지면 다시 로마에 돌아온다는 트레이생 등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치안상태가 좋지 않아서 무장 경찰들을 시내 곳곳에서 볼수가 있었고, 특히 환전을 하려고 은행을 가려면 몇 번의 복잡한 보안 장치를 거쳐야 했다. 종교에 대해서 무지한 나에게 바티칸 시티의 방문은 다시 한 번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고, 엄청난 크기의 면적과 웅장한 조각마다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원죄에 대한 용서를 내포하고 있어 나의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고 미래의 목표를 다시 설정하는 기회였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이곳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일어났다. 3일전부터 동행하던 배낭객 친구가 소매치기의 수작에 의해 여권과 카메라를 도난 당했다. 화가나기 보다는 어이가 없음을 느꼈다. 세상에 이런 죽일놈들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경우가 아닌가. 가난한 우리 배낭객에게 무엇을 착취할 게 있어서 그리 난리를 피우는가 말이다. 경찰서에가서 도난 신고를 하면서 느낀 감정은 우선 그들의 여유로운(?) 태도, 아니 뚝 까놓고 말해 외국인에 대한 무관심을 느껴 그리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중도포기할 수는 없는게 아닌가. 새로운 각오로 장도의 길을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황영조의 함성이 아직 꺼지지 않은 올림픽이 개최된 바르셀로나로 발길을 옮겼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참고 견딜지어다. 그리하면 그대에게 복이 있나니. 바로셀로나로 들르기 전에 프랑스 니스로 들렸다. 휴양의 도시, 젊음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곳 니스, 처음으로 해수욕장에 썬텐에 온갖 젊은이의 불꽃을 태웠다. 그렇게 즐기다 어느새 배고픔으로 캄보디안 음식점으로 향했고, 무아지경 속에 음식을 즐기는 가운데 카메라를 놓고 오고 말았다. 그곳에 다시 가보았지만 카메라는 찾을 수가 없어서 내 가슴만 더욱더 쓰라린 것이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 바로셀로나 민박집에 들렸고, 그 집에서 먹은 육계장은 아마 적어도 3년동안은 잊지 못할 그럴 미식이었다. 바로셀로나하면 가우디의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투우 플라멩고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먼저 가우디가 제조한 대성당은 커다랗게 점토로 빚은 듯이 아름답고 미묘한 디자인을 가졌고, 그 두 번째로 투우를 보았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약간 다른 투우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전에 투우사의 일대일 대결을 연상하였으나 투우사의 뒤엔 너무 많은 보조 투우사들이 진을 치고 있어 왠지 소에게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의 관광상품이라고는 하지만 잔인함의 그 하나의 뜨거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나도 왠지 투우의 보고난 후 왠지 개운치 못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플라멩고를 보지 못하여 아쉬움이 가득 들었으나 환상적인 분수쇼를 그 아쉬움을 채우기는 충분하였다. 오색 찬란한 화려한 불빛을 배경으로한 분수쇼는 만인의 사랑을 가득 앉기에 충분했다. 스페인의 수도 마르리드는 집시가 들끓는다는 소문과는 달리 쾌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는 관광이 아닌 또 탐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장을 풀자 마자 우리는 UNED라는 스페인의 원격 교육기관으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첫날은 영어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으나 용케 만난 비서중 한분이 영어를 할 줄 알아 정보센터를 듣고, 보고, 홍부부와 내일 만나기로 한 다음 실질적으로 원격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때 마드리드의 모든 대학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힘들게 찾은 UNED의 대학에 따뜻하게 한 사나이가 환영해 주었다. 그를 통해 UNED의 건물 내부를 돌아볼 수 있었고, 도서관 컴퓨터의 운영을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다음날 UNED 본부를 재방문하여 원격교육의 전반적인 내용과 중요성을 들을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개선문,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트의 언덕, 노트르담사원 말만 들어도 왠지 친숙할만큼 우리가 흔히들 들어온 곳을 견학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빠리는 단지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빈부의 격차가 심한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20일간의 바쁜 일정을 마치고 26일 아쉬움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공항으로 향했다. 집으로 오는 설레임을 가득앉고 말이다. 정말 이번 탐방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많은 물건을 보고, 느끼고, 들은 아주 좋은 시간들이었다. <전북대학교 무역학과 김창수> <이 페이지에 대한 저작권은 유니슨산업그룹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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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참으로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외국 여행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LG는 나에게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그저 보고 듣기만 하는 단순한 여행이 아닌 테마가 있는 여행으로 말이다. 첫 외국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 동안 힘들게 해 왔던 모든 작업이 말끔히 씻은 듯이 잊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그 동안 있었던 여행의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하자.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흔하거나 변변치 않은 여행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났던 일생의 한 획을 그었던 순간들이라고 기억될 것이다. 우선 우리가 갈곳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첫 번째 목적지는 San Francisco에 있는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 이다. 그리고 Fort Collins로 가서 미국 원격 교육의 산 역사인 NTU(National Technological University)를 방문하고 난 뒤에 Urbana-Champaign으로 가서 UIUC(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를 방문한 뒤 마지막 목적지인 Canada의 Vancouver로 가서 OLA(Open Learning Agency)와 UBC(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그리고 SFU(Simon Fraser University)를 방문함으로써 우리의 여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출발하는 날 아침 참으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KAL기가 괌에서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출국하는 비행기도 KAL기였다. 약간은 씁쓸함을 뒤로한 체 태어나서 두 번째 타 보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어쩌면 처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처음은 고2 수학 여행때 타 본 30여분의 비행이 고작이니까 말이다. 여하튼 공항의 복잡한 여러 가지의 절차를 마치고 출국을 하게 되었다. 최초의 해외 여행이라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몰라도 별로 설레지도 않았다. 10시간 넘은 비행 후에 꿈에 그렸던 San Francisco 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창문 너머로 Bay Bridge가 우리를 반겼다. 공항에서 내린 순간 썰렁했다. 사람이 없어서 썰렁한 게 아니라, 날씨가 약간 썰렁했다. 야자수가 우거지고, 이글이글거리는 날씨에 오렌지가 익어 가는 TV나 사진 속의 California가 아니 였다. 약간은 쌀쌀한 흡사 우리의 가을 날씨 같았다. 현지에 내린 우리는 잠시의 숨돌릴 틈도 없이 SFSU의 섭외에 들어갔다. 바로 다음날 방송 팀과의 촬영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San Francisco교외의 SFSU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원격 교육을 전담하는 시내에 있는 SFSU의 Downtown Center를 알게 되었고 곧장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는 내일 약속에 어긋나지 않게 완벽하게 사전 예약과 준비를 해 놨다. 그리고 밤이 되어 어렵사리 잡은 숙소에 방송 팀을 불러 들였고, 같은 숙소에 머물면서 내일 할 일은 약간이나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8월 7일이 되었다. 숙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우리는 별로 시간이 들지 않게 도착을 했고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는 일정 속에 촬영은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밤에 문제가 생겼다. 다음날도 촬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촬영은 전 팀보다 약간 많이 했지만 무언가 적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결과 팀내 회의를 통해 다음날 촬영은 않기로 결정을 봤고 관광을 하기로 했다. 8월8일 눈을 뜨자마자 우리는 금문교(Golden Gate Bridge)로 향하기로 했다. San Francisco에 왔는데 금문교를 건너지 못했다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는 도중 Twin Picks와 Lincoln Park를 들렀다. 그리고 금문교를 건너 Sausalito로 갔다. 그러고 나니 벌써 어둑어둑 해졌다. 그러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Bay Bridge로 향했다. 관광 책자에 나온 데로 Bay Bridge의 야경은 환상 그 자체였다. 낮에 본 금문교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이 다리를 마지막으로 이날의 관광을 마쳤다. 드디어 San Francisco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우리는 그냥 떠날 수가 없어서 관광 명물인 Cable Car을 타기로 했다. 그리고는 시내로 향했는데 우와! Cable Car를 타려고 선 줄이 한 블록을 넘게 서 있었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음 목적지인 Denver를 상상하며 공항으로 향했다. Denver에 도착한 첫날 어젯밤 일기예보에 보았듯이 우리를 환영하듯 부슬부슬 비가 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예약을 하지 안했기 때문에 호텔 방이 없었다. 비는 오니 무작정 돌아다닐 수도 없고, 정말 속수 무책이었다. 밤 10시정도 까지 수소문한 끝에 서부 영화나 나올 법한 오래된 여관을 제법 비싸게 얻었다. 그리고 피곤한 심신을 달랬다. 아침에 눔을 떠본 Denver시내의 모습은 중부 최대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정말 조용하고 깨끗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날이 주말이라서 사람들이 더욱 없었던 것이었다. 우선 차를 렌트를 한 후 NTU가 있는 Fort Collins로 향했다. Denver에서 약 3시간 정도의 거리인데 가는 도중 The Rocky National Park 있어서 그곳을 들렀다. 정말 거대하고 광활한 산지였다. 어제 내린 비가 그치지 않아서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비가 우리의 앞길에 방해가 되진 못했다. 비 때문에 낀 구름으로 인하여 산 전체를 보진 못했지만, 그 일부분으로도 우리를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거대한 자연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했고 그 맑고 깨끗한 환경을 보면서 우리의 국립공원의 현실과 비교를 안할 레야 안할 수가 없었다. 하룻밤쯤 이산자락 아래 통나무집 여관에서 자고 싶은 유혹을 뒤로 한 체 NTU탐방을 위해 Fort Collins로 향해서 NTU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Fort Collins는 딱 와 닫는 느낌이 Colorado State University에 딸린 조그만 대학 도시 같았다. 정말 조용하고 공부할 맘을 가지게 했다. 여유가 다면 한 번쯤 유학이라도 오고 싶었다. 대자연과 학문적 만남이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같았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를 또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NTU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아니!!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간 세계 최고의 원격 교육 기관이 조그마한 건물 한 체였다. 빌딩도 아닌 정말로 2∼3층 정도의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혹시나 해서 옆건물도 가보고 주위를 찾아보았지만, 눈 씻고 찾아봐야 이 건물 외엔 없었다. 어쩌면 한편으론 대단했다. 이 조그마한 건물에서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내다니……. 약간의 놀라움 반 실망 반을 가진 체 건물에 들어섰다. 들어서자 여러 복잡한 기기들이 있는 방과 각 개인의 칸막이로 된 방이라 할지 뭐라 할지 모를 공간이 고작이었다. 다행이 우리가 방문하던 날 방송을 송출 중이라 그것도 견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조그만 공간에서 미국 캐나다는 물론이고 서울 도쿄 등지까지 위성을 송출한다니까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탐방을 한 뒤 놀라움을 뒤로한 체 다시 Denver로 향했다. 그리고는 Rocky mountain 박물관을 보았다. 보고 나왔는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한 여름인데 눈이 내렸다. 고도가 1,000feet라고 했는데 우리가 쓰는 단위가 아니어서 그냥 높구나 정도 외엔 별로 실감이 않았는데 확실히 와 닿게 해 줬다. 정말 미국의 광대함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꼈다. 우리 나라 설악산이 높다고 해도 5월에 눈이 오면 화제인데, 한여름인 8월에 눈이 오다니 대단하다. 이런 엄청남을 보며 무언가 좋은 관광이 없나 생각하다가 우리는 Colorado Springfield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가 망설임이 많았는지 날은 그새 어두워졌고, 가도 가도 집도 없는 고속도로만 계속 갔다. 우리는 Colorado Springfield는 포기한 체 숙소를 찾아해맸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나온 곳에 묵기로 했다. 한참을 간 후에야 약간의 많지 않은 불빛을 보고 마을 아니 소도시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하여튼 이름도 모를 그곳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한참을 헤맨 끝에 숙소를 잡아 자게 되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그곳이 바로 Colorado Springfield였다. 어이가 없어 한참 동안 웃었다. 그리고 못내 아쉬워 약간의 시간을 내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오후에 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짬을 냈다. 그리고 주변의 Seven Falls를 갔다. 일곱 번의 굴곡을 지며 떨어지는 폭포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폭포 주위로 계단을 놓아 꼭대기까지 오르게 했다. 또한 옆 산에 엘레베이타를 설치해 올라가서 그 폭포를 더욱 잘 볼 수 있게 해 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람쥐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먹이를 주면 손바닥 위에 올라가서 먹는 것이다. 어찌나 신기하고, 귀엽던지 아직도 기억이 선하다. 이것 하나를 본 후 우리는 비행기 시간에 쫓겨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우리에게 성덕 바우만 때문에 잘 알려진 공군사관학교도 있었지만 시간상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는 Chicago로 향했다. Chicago에 도착 첫날 우리는 우연찬케도 Howard Johns 라는 호텔을 반값에 잘 수가 있었다. 어쩌면 종업원의 착오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일박을 한 후 이 호텔에 계속 묵기로 하며,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Chicago에서는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호텔 버스로 지하철역으로 나온 우리는 어디를 우선 갈까 고민하다가, 결정을 봤다. 아니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탐방을 온지 일주일 약 반절의 시간이 넘었다. 이쯤 되니 한국 음식이 생각나기는 당연한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의 목적지는 미국 내에서 LA다음으로 큰 Koreatown애 있는 Chicago Koreatown에 가기로 했다. 물어 물어 어렵사리 Koreatown에 온 우리는 시간이 벌써 2시를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아니 TV에서 보았던 그런 Koreatown이 아니었다. 도시 외각의 빈민가라 할까 그런 곳에 Koreatown이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집들도 약간은 허름허름했고 지저분해 보였다. 우리의 동포들이 머나먼 타국 땅에 와서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대충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밝고 친절하게 잘 대해 주었다.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신문 가판대를 보니 아니! 한국 신문이 있지 않은가 참으로 얼마만에 읽는 한국 신문인가? 기쁜 나머지 신문을 사 보았더니 역시나 별다른 소식은 없고, 조순씨 대선 출마 소식등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Chicago downtown에 갔다. 시간은 벌써 하루해가 거의 다 가고 있었다. 딴건 못해도 이것만은 보자며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시어스타워를 갔다. 전망대가 있는 110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현대 문명의 어마어마함을 느꼈다. 엄청나게 높은 빌딩이었다. 63빌딩이 높다고 생각한 우리에게 정말 대단했다. 그때 벌써 해는 석양 무렵이었다. 잠시 뒤 보이는 Chicago의 야경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예뻣다. 인간의 문명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문명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캄캄한 밤중이 되서야 우리는 돌아왔고, 다음날 UI탐방 계획을 짰다. 탐방 활동비의 부족으로 우리는 렌트카를 하루만 빌려야 했기에 내일 비행기 시간에 맞춰서 점심때 빌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우리는 UIUC가 있는 Urbana-Champaign으로 향했다. 이곳까지의 거리도 약3시간 정도 였고 무난히 우리는 도착할 수가 있었다. Urbana-Champaign은 쌍둥이 도시로 오른쪽 Urbana City 와 왼쪽의 Champaign City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Urbana는 UIUC그 자체인 것 같았다. 물론 여기도 조그만 대학 도시였다. 시간이 늦었으므로 탐방은 내일로 기약하고 숙소를 일찍 잡았다. 그리고 그날이 생일인 강준영 대원의 생일 파티를 해외에서 조촐하게나마 열어 주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UIUC를 찾은 순간 미안함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약속 날짜가 우리가 출국한 뒤 E-mail로 다시 통보를 해주는 듯 싶었다. 엄청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 날짜인 어제엔 타지에서 연구원도 초대가 되었다. 하루만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 아쉬움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체 탐방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학교 근처의 점심 먹을 만한 장소를 찾던 중 우리는 중국집을 찾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짬뽕과 짜장면을 팔지 않는가! 그것도 메뉴에 한글로 써 져서 말이다. 물론 주인은 중국인이었다. 신기해서 우리가 물어 보니 대답은 단하나. 한국인 유학생이 많아서 였다. 약 1000명쯤 UIUC에 다닌다고 했다. 물론 맛은 국내 짜장, 짬뽕과는 떨어졌지만, 우리 한국인 유학생이 외국에 얼마나 많은가를 실감케 해주었다. 그리고는 OHARA공항으로 향했고, 아쉽게 마음으로 미국을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부터는 Canada의 Vancouver였다. Vancouver의 첫날은 끔찍했다. 여름 휴가철이라 Vancouver는 관광객으로 넘쳤고 숙소는 없었다. 어렵사리 잡은 숙소는 아래는 노래를 부르는 곳이고 이층부터 숙소인데 새벽 2시까지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2층이 숙소인 우리는 대부분 잠을 설쳤다. 또한 침대 하나인 방이어서 대원 두명은 바닥에서 자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어떻게 잤는지 하여튼 하룻밤이 지나고 우리는 때가 주말인지라 관광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우선 숙소가 시급한지라 숙소를 우선 잡고 떠나기로 했다. 숙소를 어렵사리 찾았는데 다음날부터 된다기에 예약을 하고 당일날 잘곳을 찾기 위해 다니는데 아니 한글 간판들이 보이는 게 아닌가? Vancouver에는 Koreatown이 없다고 들었는데 한국인 가게는 상당히 많았다. 거리도 Chicago보다는 깨끗했다. 이곳에 내려 우리는 정보도 얻고, 식사도 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한인 여행사에서 알려준 Victoria Island로 가기로 했다. Vancouver에서 떠나 북쪽으로 산악 지대로 갔는데 아무데나 모두 관광지였다.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 왔다. 옆으로는 빙하호가 맑게 흘렀고 다른 한쪽으로는 만년설이 덮인 거대한 록키 산맥이 펼쳐졌다. 흡사 TV에서 본 스웨덴, 노르웨이등 북유럽의 모습이었다. 그리그의 페르퀀트 중 아침이 생각나게 하는 풍경이었다. 가는 도중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과 조그마한 호수가 있는 이름 모를 곳에 서서 우리는 쉬기로 했다. 그리고는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데 정말 따사로운 햇빛과 이 호수 주변에서 한가로이 일광욕과 조깅을 즐기는 이 나라 국민들의 여유가 한없이 부러웠다. 자연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원래 이런지 각박한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더없이 부러웠다. 웅장한 캐나다의 자연을 품은 체 우리는 하룻밤을 지새웠고, 다시 우리는 탐방을 위해 Vancouver로 향했다. Vancouver로 돌아온 우리는 그날이 미침 일요일인지라 시내 관광을 했고 하염없이 시내 중심가를 쏘다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엄청난 한국인이었다. 대부분이 유학 온 학생들 같았다. 그런데 한국인이라고, 되게 불친절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도피 유학생도 상당히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찌된 게 캐나다인 들보다 불친절하고 짜증을 냈다. 그래도 도시는 활력에 넘쳤고, 젊음의 도시 같았다. 이렇게 하루를 보낸 우리는 다음날 OLA로 갔다. 그런데 OLA에 간 우리는 상당히 실망했다. 탐방을 하러 갔더니 탐방은 고사하고 한 번 둘러보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분명히 E-mail답장이 왔건만, 예약이 안되어서 안되고 지금 예약하면 수요일쯤 즉 모레쯤이나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의 일정상 내일 가야 하기 때문에 정문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직업을 구하러 온 교포를 만나 식사나 한끼 하러 갔다. 그분과 대화를 하던 중 중국인의 막강함에 놀라 버렸다. 여행 중 가장 많이 실감한게 중국인 파워 였는데 Vancouver는 아예 Hongcouver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 했다. 정말 중국인은 엄청난 존재였다. 진정 세계가 12억 중국인을 주시하는 이유를 새삼 느꼈다. 점심을 먹은 뒤 내일 출국이 아쉬워 3시간 거리인 미국 Seattle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미국을 향했다. 외국인에 대해 심한 검문 검색을 통과하고 다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않아 Seattle에는 도착 못하고 먼발치서나마 본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돌아오는 도중 캄캄한 밤길을 달리는데 마치 우리 나라의 시골길을 달리는 듯 싶었다. 참으로 며칠 아니었지만 고향 생각이 나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Vancouver로 돌아와 마지막 밤을 지새웠다. 마지막날 아침 시간의 여유가 있어 UBC를 가기로 했다. 그리고는 UBC로 향했는데 별로 내용은 없었다. 탐방보다는 학교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조그만 반도 하나 전체를 학교로 쓰고 있는데 학교 안에 골프장, 해변(해수욕장)등이 있었고 정말 넓고 풍족해 보였다. 전북 대학교가 전국3위의 학교 부지라며 넓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비교가 되질 않았다. UBC를 끝으로 우리의 해외 탐방 일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서운함, 기쁨, 놀라움, 그리움 등을 뒤로한 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리운 고국으로 향했다. 참으로 짧지만 긴 시간이었다. 후일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또한 좁았던 나의 식견을 엄청나게 넓혀 준 것도 사실이다. 비행기로 오는 도중 곰곰이 나의 미래와 보고 느낀 것을 차례대로 생각해 보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뇌리 속을 떠나질 않았다. 또한 미래를 설계해 보았다. 정말 모기업 총수의 말처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았다."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노성봉> <이 기행문의 저작권은 LG그룹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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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가는 길 타이완가는 길은 쉽지않다. 한국에서 타이완에 가는 국적기가 없고, 일본에서 타이완 가는 길은 오키나와에서 배편, 오사카, 후쿠오카와 도쿄에서 많은 비행기가 있다. 하지만 타이완 가는 길은 멀다.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일본 재입국 비자, 타이완 비자, 항공권이 필요했고, 학생이기 때문에 지도교수의 허가도 필요했다. 무려 1달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오사카에서 카오슝가는길 (3월 31일) 비자를 받으러 타이베이 중화민국 재오사카 경제문화대표부에 갔을 때, 한국인이기 때문에 첫 번째 비자는 한국에서 직접 받으라는 영사의 말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92년 일방적인 단교에 대한 피해는 내가 가장 받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에 걸친 엉성한 영어와 일본어로 영사를 설득한 끝에 접수를 했지만, 걱정되었다. 경제문화대표부에서 타이완의 정치적 외침을 읽어보았다. 선거때마다 카오슝 앞바다에 떨어지는 중국의 로앛트 연습, 세계 1위의 외환보유국의 UN 가입의 불가 판정, 스포츠, 농산물등의 경제문화 외교의 실패 등을 읽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오사카 대표부에 갔는데, 비행기 이륙 2시간 전까지 비자 심사가 끝나지 않았다. 타이완에 가는데 비자가 필요한 나라는 한국과 북한뿐이다. 그때부터 지하철 역까지 배낭을 배고 지하철 역까지 뛰었다. 그 후 간사이 국제공항에 가는 기차를 갈아타는 역에서 16Kg의 배낭을 찾고, 뛰었다. 그리고 간사이에 이륙 1시간에 간신히 도착하여, 동북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사이 공항을 구경할 여유없이 수속을 마쳤다. 어딘지 모르게 외국인 등록증을 잊어버려 출국수속에 문제가 생겼다. 비행기가 이륙해서야 간신히 여유를 가졌다. 타이완의 인정 (4월 1일) 내 옆에는 오사카에서 공부하는 타이완 아가씨가 앉았는데, 엉성한 일본어로 많은 질문을 했다. 한국인이고, 관광으로 타이완에 간다고 하자 자기집에서 1박하라고 졸랐다. 간신히 친구가 기다린다는 말을 알아듣고는 더 이상 조르지 않았지만, 시골의 인정 같았다. 카오슝의 야경을 구경하며, 밤 9시에 4시간에 걸친 도착했다. 공항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서 너무 기뻤다. 친구는 아는 교수님과 그 분 제자와 3명이 같이 나왔는데, 그 교수님의 Lee's Hotel이라는 고급 호텔을 예약해 놓았다. 정말 놀랬다. 그 분의 태도는 외국에서 온 손님인데, 이정도야 뭘이어서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자동차로 카오슝의 야시장을 구경하고, 가장 잘 논다는 타이완 학생들과 잘 나간다는 카페를 데려갔는데,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모두 커피 한 잔씩 마시고 끝났다. 한국인이라는 요란한 카페에서 술과 담배를 썩어가며, 시끄럽게 떠들텐데 타이완 학생들은 마치 10년전의 한국의 대학생처럼 얌전했다. 친구와 호텔에 돌아가 긴 이야기를 하며,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타이완 학생 하나가 왔다. 오늘의 숙제는 카오슝 안내란다. 정말 타이완 사람의 사람 대접에 놀랐다. 후 일 알았지만, 타이완 문화에서 인간관계는 너무 중요하고, 비즈니스에서 가끔은 너무 많은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사회문제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 학생도 역시 자동차로 3시간만에 카오슝의 모든 것을 모여주었다. 나는 내 발로 걸으며, 눈으로 느끼고, 사진으로 남기는 여행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은 보았지만, 사진도 못 남기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타이완식 식사를 하면서, 그들의 손님 대접하는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손님맞이와 비슷한 듯 했다. 음식은 중국 음식 특유의 기름이 많았다. 내가 가진 타이완에 대한 선입관은 세계 제 1의 외환 보유고답게 홍콩이나 싱카포르처럼 고도로 발달된 모습이라고 생각했지만, 말레이시아나 태국의 야시장이나 차이나타운과 비슷했다.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도로는 차와 인간이 혼재되어 있고, 인간보다는 차가 우선했다. 한국과 비교하면, 정말 한국운전자가 안전의식이 있다고 자부해도 좋다. 일본 센다이의 버스 운전사 연봉은 7천만원 정도 인데, 거의 버스가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일본의 교통기관은 흔들리지도, 지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음식도 가족끼리도 반찬을 따로따로 먹는 일본과는 달리 종업원이 대충대충 음식을 손으로 나르기도 했다. 이런 타이완의 문화가 마치 올림픽을 전후한 우리의 모습 같아서 정말 정겨웠다. 몇 시간 뒤에는 또다른 타이완의 자부심을 알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 학생은 우리가 이미 지불한 돈을 되돌려주며 타이완에서는 화를 내다고 했다. 타이완에는 말한 사람이 모두 책임을 진다며 한사코 점심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수업이 있다면, 역까지 바래다 주었다. 버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여 맥도날드에서 갔는데, 디바의 노래가 나왔다. 그리운 한국 음악이 나오자 절로 몸이 흔들어졌다. 타이완에서는 한국 음악이 인기가 있었다. 우리를 줄곧 안내한 친구가 맥도날드로 뛰어와 여행계획도를 주었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감사를 표현할 시간도 없이 수업에 가버려 너무 미안했다. 중국의 실용적인 다도(茶道) (4월 2일) 버스로 타고 핀동(屛東)으로 가는 길은 열대의 대농장과 푸르른 벼가 익어가는 벼이 펼쳐졌다. 조그만한 타이완이 무척이나 큰 대륙처럼 느꼈졌다. 핀동 역에서 약속한 교수님이 마중나왔다. 그는 일본의 규슈대 심리학과에서 7년간 공부해서, 일본어가 능숙해서 반가웠다. 타이완에서 처음으로 통역없이 마음 편히 이야기를 했다. 그의 집은 4층으로 무척이나 켰다. 가구는 거의 없고 품위가 없어 보였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예술적 경지의 자개농이나 일본인의 원목, 호주인의 직접 만든 자연스러운 멋을 가구는 없고, 조잡한 플라스틱정도였다. 좋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 가구들이어서 타이완의 짧은 역사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높은 담에 철책이 쳐져있어, 중국인의 개방에 대한 수성(守成)을 느끼게 했다. 일본 생활에서 중국인과 일본인은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는데, 타이완 사람도 역시 일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많이 표현했다. 내가 아는 일본인의 관념에는 절대 타이완 사람의 지저분하고,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용서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타이완 사람의 대륙 기질에 따른 한 턱 내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낄 것이다. 타이완 사람은 제의한 사람이 전부 책임지는 문화에 대하여 일본사람의 와리깡 정신을 아마도 염치가 없어보일 수도 있다. 그 교수님 역시 일본문화론은 결코 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는 것이다. 그래도 교수님은 부부싸움은 일본어로 한다고 한다. 그래야 서로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없어 논리적인 전개를 한다는 우수개를 하였지만, 많은 타이완 사람이 일본어를 잘 했다. 저녁 식사는 이런 저런 그릇을 펼쳐놓고는 먹고 싶은 것을 자기의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정겨워보이기도 하고, 참 멋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음식맛도 중요하지만, 보는 맛도 중요한데. 식사중 맥주를 권해서 긴장했다. 중국 사람들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다는데 과연 나의 주량으로 감당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맥주 1잔으로 마쳤다. 전날의 까페에서와 같았다. 타이완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집 주변의 학교선생님 몇 몇을 초대하여 같이 다도를 했다. 일본인은 엽차라도 그 자리에 맞는 예의를 중시하고, 차가운 차도 호호 불어가며 마시고, 역거운 쓴맛을 없애려고 단 과자를 먹는 형식미를 중시하는데, 형식미를 중요하는 다도보다는 맛을 중시했다. 아무런 멋도 없는 주전자와 컵에 차를 마시는데, 온도를 정확히 맞추었다. 그래서 차중에 제일로 친다는 갈색 녹차가 우러나왔다. 연신 첫 번째 차는 버리고, 도기 주전자의 온도를 맞추려고 따뜻한 물을 주전자에 부었다. 그들이 말하는 타이완의 자존심은 국가와 국민의 모두 부강하는 것이다. 어떤 고급 일제차를 살 것인가는 고민하는 교수님이 자랑하는 타이완 드림은 일하면 곧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올림픽을 전후한 코리아드림과 IMF관리체제의 부도난 한국을 동시에 연상하게 했다. 그런 경제력에도 항상 중국의 군을 바탕으로한 외교력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조를 연발했다. 정말 타이완 사람은 아직은 세련미보다는 자본주의를 맛을 처음 본 시골 사람들처럼 가끔은 사치스럽지만 아직은 플라스틱 가구, 맛을 중시하는 다도 등 실용적이었다. 남국에서의 휴식 - 리틀 카오산 로드 (3월 3일) 아침 일찍 제일 아름다운 켄팅국립공원에 가는 기차 시간이 되었다고 친구가 소란스럽게 깨웠다. 교수님과 아쉬운 이별을 하며, 홈스테이를 마쳤다. 타이완의 제일 남부의 켄팅에 가는 가장 느린 기차는 한국의 비둘기호보다 조금 더 낡고, 편의 시설이 없었다. 그리고 중간에서 버스로 갈아탔다. 켄팅 중심부에 도착했을때는 조그마한 관광지였지만, 외국인이 더 많아 보였다. 무척 젊고 발랄한 인상이었다. 오토바이를 랜트하여 가이드북에 별이 세 개나 있는 켄팅 森林遊樂區에 갔다. 산위에서 보는 제일 남부의 타이완 바다는 검푸는 흑진주 빛처럼 검푸른 사람가 너무도 남국의 멋이 배여 있었다. 푸른 산림에서 사이를 오토바이로 달리며, 마음에 드는 곳에 멈춰 사진도 찍고, 여유있게 거닐기도 하였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역시 거닐기도 하고, 밤을 준비하려고 텐트를 치고, 기타를 치는 모습에 흥겨워졌다. 우리도 그들처럼 공원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여행 전문가 정도 되는 나는 그 공원안에 무엇이 있을지 보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장 남부의 등대 향하는데, 스쿠버, 스노클링, 다이빙하는 곳에 멎춰 바라다 보았다. 시간도 없고, 비행기를 탄지 얼마 안되어, 기압차 때문에 (이웉라이저) 귀에 무리가 될까봐 아무것도 할 수는 없었다. 그 곳의 바다는 연보라빛 애머랄드 같았다. 하얀 등대에서 타이완의 최남단까지 왔다는 증명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잔디공원과 용암이 흘러내린 앞바다를 거닐며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웠다. 무슨 영화속의 한 장면같았고, 근 몇 년이 이런 여유는 처음 같았다. 타이완은 나에게 17번째 나라인데, 줄곧 혼자서만 여행을 했는데, 둘이 하는 여행이 주는 편안함을 즐겼다. 타이완 최남단의 동지나해에서 석양을 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켄팅의 음식점은 타이완 음식을 서구인의 구미에 맞추어 준비한 집이 많았다. 음식맛이나 흥청내는 관광지의 멋이 무척이나 태국의 카오산로드를 그립게 했다. 나는 포장마차에서 훈제 닭고기, 베이컨, 버섯, 순대 등을 잔뜩 사들고, 하이네켄 맥주도 잔뜩 사서 저녁을 대신했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먹던 그 맛이었다. 그러나 폭음 덕북에 밤새 잠을 편히 잘수가 없었지만, 역시 여행은 술이 있어야 맛이 난다. 다음 날은 기암절벽으로 猫鼻頭에 가는데, 바람이 세어 오토바이가 균형을 자꾸 잃었다. 그 곳에서 보는 자연 그대로의 바다는 새로운 인상이었다. 줄곧 타이완의 원시 그대로의 바다는 어디에서나 다른 인상으로 나에게 느껴졌다. 일본은 어디를 가도, 자연미가 없다. 무엇인든지 인간의 문명이 손길이 느껴진다. 공원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화살표로 걸어가는 길이 표시되어있고, 그 길안에서는 안전이 보장된다. 누구도 다른 길에 갈 생각은 하지도 않지만, 금방 질려버린다. 입장료로 낸 10.000원 정도는 20분에서 2시간정도 걷다보면 끝나버린다. 일본인의 아름다운 자연미라고 찬미하는 사이에, 수묵화에 여백은 두는 한국인은 인공미에 질려버린다. 타이완의 대륙적인 기질은 사람이 걸을 수 있다면, 자유롭게 걸으며 사색을 즐길 수 있다. 자유로운 만큼 낭떠러지 절벽과 안전한 길은 혼재되어 있어, 각자 알아서 주의해야한다. 다음은 오토바이를 타고, 제국주의 일본을 저지하기 위여 1875년에 청조에서 건설한 성을 구경하러 恒春에 갔다. 일본인들이 남은 성문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나, 타이완 사람이 식민지시대에 일본인의 교육제도, 도로, 철도등 건설 등을 칭찬하며,일본어를 배우는 모습은 언뜻 한국인에게 어색해보일수 있다. 우리는 일본 침략을 문명과 문명의 충돌을 무력에 의해 잠시 굴복당한 것으로 본다면,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있는 타이완의 입장은 좋은 지배자라면 어느쪽 이든 상관이 없는 상황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오키나와와 비슷하게 봐도 당시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에서는 설명이 가능할수도 있다. 그 성앞에서 포카리스웨트 맛의 코코아를 통째로 마시는데, 정말 열대에 왔다는 것을 다시 인식되었다. 오후에는 華蓮에 가는 가장 빠른 기차를 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무궁화정도 되었다. 타이완의 봄방학기간이라서 발 디딜틈 없는 기차는 설날과 추석 전후의 우리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너무 정겨웠다. 도시락을 먹는 사람, 신문을 보는 사람, 고향에 빨리 가고 싶은 학생을 비집고,우리 자리에 앉았다. 퇴폐화 되어가는 원시의 타이완과의 대화 ( 4월 5일 ) 대륙적인 기암절벽을 보러, 太陸閣에 가는 버스는 곡예운전의 연속이었다. 100M 위의 절벽은 시속 80에서 급정거까지 경주차 선수처럼 운전하는 운전사의 곡예운전에 승객들은 바깥경치를 구경할 수가 없었다. 모두 자기의 운명을 걱정하는지, 수십미터의 아래의 절벽을 보며 자연의 웅장함에 감명을 받았는지 숙연해졌다. 머리 노란 외국인들의 놀란 모습은 확실했고, 나도 너무 무서웠지만, 중국과 타이완의 생활에 익숙한 친구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푸른디 푸른 절벽 밑은 강물이나 흔들리는 다리도 아름웠다. 특히, 太陸閣은 대륙을 닮아서 그런지, 寧安橋에서 보는 중국 궁전을 보뜬 長春祠는 거대한 폭포 어우러져 중국에 온듯한 착각을 만들었다. 그 곳에서 히치하이킹에 성공하여, 나는 마음 조리는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어 기분이 좋았다. 친구는 담배는 피우는 여행을 하는 두 아가씨에 조금 놀랐다. 타이완에서는 별로 여자들이 남자를 피우지 않는다고 하고, 그들은 대학 강사와 조교라서 무슨 최첨단을 걷는 신촌의 샌님이나 도쿄 긴자의 마마(mother)를 연상하게 했다. 그들은 친절하게 역앞의 숙소까지 데려다주어, 한국 엽서를 기념으로 주었는데, 너무 기뻤했다. 택시를 타고, 아미애 원주민의 민속춤을 보러 갔다. 택시 운전사는 중독성분이 있는 각성제같은 타이완 특유의 음료를 많이 먹어 이빨이 빨간색이었다. 그러나 다른 타이완 사람처럼 친철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돈이 없다며, 100위엔에 가자고 조르자 그는 150위엔 이하는 안된다고 했지만, 우리 고집에 못 이겨 100위엔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미터기에 180위엔이 나와서 정말 미안했다. 더구나 공연 2시간 전쯤 도착했는데,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그래서 그는 택시 안에서 2시간 동안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 엽서를 주었는데, 한국말로 인사도 하며 호감을 보였다. 그리고 너무 피곤해서 돈보다는 한적한 곳에서 쉬고 싶어 그냥 따라왔다고 한다. 원주민은 공연은 민속음악, 무사들의 전쟁의식, 사냥, 추수, 구애, 결혼 등을 주제로 나누웠졌다. 추수의 풍습은 농경 문화답게 우리와 너무 비슷했다. 그리고 전쟁과 사냥은 역시 조그만한 원주민답게 방어적이고, 격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혼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느 나라나 같지만, 원주민들은 하나의 관광산업이 되고 있어 슬펐다. 그들의 문화보다는 서구적 상업주의에 맡게 각색된 연극에 몰두하고, 모든 삶의 터전은 전시품이 되는 것은 북미, 동남아나 일본이 모두 같았다. 공연후 타이완 사람이 어디까지 가냐며 친근해 보이는 인사를 했다. 타이뻬이까지 간다면, 자기들 차에 같이 가자고 졸랐다. 우리도 심심하여 같이 가기로 했는데, 역에서 기차표 환불하고, 시내에서 짐을 찾는 것을 도와주는 모습이 벌써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운전하는 남자는 간판 수리공인데,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고, 부인은 미인이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 그 집은 아들과 주로 보딩랭귀지로 친해졌다. 몇 시간의 자동차안에서 내가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말도 잘못하는 그 꼬마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 하는지, 친구가 통역을 짧게 하여 너무 답답했다. 타이완은 동해안의 개발이 전혀 되지 않아 한국의 강원도 같은 인상이었다. 그도 역시 제 2차 대전 당시 일본 군부가 건설한 도로와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건설한 군용도로를 곡예운전을 했다. 확장공사를 하고 있어, 더욱 위험해 보였다. 그래도 자동차 안에서 보는 원시 그대로의 타이완 동해안은 아름다웠다. 그는 羅東의 고향에서 머문다면, 같이 머물자고 졸랐다. 그와 그의 친척과 야시장을 걷는데 타이완의 서민들의 삶이 너무 재미있었다. 담배나 인형을 건 도박은 한국의 난장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의 집은 교수의 집처럼 아주 커다랬지만, 가구는 모두 조잡했다. 첫 번째 홈스테이는 타이완의 지식인과 정치이야기를 했고, 두 번째 홈스테이는 말도 통하지 않는 타이완의 서민과 인간미를 느낄수 있었다. 그 역시도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는 타이완 드림을 성취하는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친구와의 재회 (3월 6일) 다음 날은 늦게 타이뻬이에 도착하여 동북대에서 같이 종종 금요일 밤마다 술을 같이 마신 친구 카즈라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타이완에서 일본인 친구와의 재회를 색다른 맛이었다. 같이 야시장에서 식사를 하는데, 그가 초 두부를 추천했다. 두부인데, 담백한 맛에 식초맛이 썩여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식초는 썩은 음식인데, 두부를 썩혀서 냄새가 마치 시궁창 같았다. 냄새에 찔렸지만, 입안에 넣자 두부의 담백한 맛이 느껴졌다. 먹기 시작해서 30분 정도 지나자, 다름대로 맛을 느꼈지만, 한국인의 미감으로는 더 먹는 것이 힘들었다. 그 친구는 보통의 구미가 까다로운 일본인과는 달리 잘도 적응했다. 하기야 동북대에서 타이완맨으로 통하니깐. 다음날은 고궁박물관과 중정기념관(장개석)에 갔다. 고궁은 세계 4대 박물관이지만, 소장품은 많지만 건물이 협소해 얼마 전시가 되지 않았다. 주로 옥, 청동기의 예술이 전시되어 있어, 처음으로 옥을 주제로한 예술 볼 기회여서 재미있었고, 카즈 역시 3번째지만, 모두 전시품이 달라서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역으로 돌아가 중정기념관에 걸어 가는데, 228평화공원이 지나쳤다. 제주43항쟁처럼 본토인의 불균등한 상태에서 무력으로 점령한 것에 대한 데모를 47년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수많은 역사의 순간들이 눈앞에 어른거려진만, 여행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중정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정기념관에서도 역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과연 무엇이 옳은 길인지 알수가 없었다. 장개석에 대한 연민과 한국의 독립 인사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자리였다. 밤 늦게 가차를 타고, 타이뭗에 가서, 타이완 학생집에 갔다. 타이완 학생은 전북대에 교환학생으로 공부를 해서 너무 반가워했다. 일본인이 온다고 아사히(朝日)맥주, 우동, 초밥(스시)를 준비하여, 카즈와 오랜만에 기름기 없는 음식을 먹는 다고 기뻐서 잔뜩 먹었다. 그리고 자정이 될 무렵 타이완에서 공부하는 전북대 교환 학생 정승조 형이 와서 한국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은 천천히 타이뭗 대학을 걷기도 하고, 학교내 노천 카페와 일본풍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본인의 한국인과 타이완 사람에 대하여, 3국의 젊은 사람 문화의 비교, 중국과 대만 문제(양안문제)'들을 이야기 했다. 한참 한국어와 일본어를 통역하다보니, 종종 한국사람에게 한국말로 통역을 하기도 하고, 헷갈려졌다. 그날 밤에도 타이완 학생 기숙사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나누웠지만, 그들이 가진 고민은 비슷한 듯 했다. 양안문제에 대하여서는 모두 자기들은 타이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내년 총독 선거에서 운명을 결정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중요 선거시 중국의 미사일 포격에 대한 불만과 공산당, 국제 사회에서 타이완 보이코트는 스스로 절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인식의 차이는 군대를 제대한 사람과 너무 달랐다. 밤새도록 친구와 대학 캠퍼스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웠다. 새벽에 교환학생 형과 다른 학생이 오토바이로 역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리고 카오슝역에서는 다른 타이완 학생이 차로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안녕! 추억속의 고향! 타이완 (4월 9일) 타이완에 대한 인상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으로 가슴 깊이 각인되었다. 친구와 짧지만 서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눈 여행을 처음이라서 새로운 여행관을 심어주었다. 마지막으로 타이에서 즐거운 점이 있다. 공항에서 자리가 없었다. 일본이 단체 관광객이 너무 많았다. "미안하지만, 1등석도 괜찮게 싶습니까?" 자리가 없는 관계로 1등석에 앉아서 일본에 돌아오면 따뜻한 타이완의 정을 가슴깊이 다시 한 번 각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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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연구기관

중앙연구원

도서구입시 40%할인

한국

대륙에서의 중화민국시기의 한국관련 자료 많음.

2. 주요대학-정치학의 경우

대만대학, 정치대학

3. 서점 - 전공서적

중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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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사

거리를 걷다보면 자조찬이라서 써진 대만풍 혹은 중국풍 식당이 많다.

대략 50가지 정도의 반찬이 있고, 반찬을 발포 스티로폼이나 종이로된 1회용 접시에 담아 먹는다.

가격은 대략 50원에서 100원정도 한다. 상당히 저렴하다. 그리고 특히 가 식당마다 설탕을 가득넣은 홍차나 국을 먹을 수있다.

대만에서 필히 맛볼 서민적인 음식이지만, 대부분의 한국사람을 배탈을 앓거나 심하면 설사를 한다.

2. 여행을 주로 원을 그린다.

타이페이-타이중-핀동-아리산-카오슝-화련-타이페이 으로 원을 그리듯한다.

 

3. 대만주변의 주요 여행지

기륭-

 

4. 요요카

 

5. 여행연수

각 대학 어학원

사설 어학원

6. 숙소

7.교통

대만에서 홍콩은 10만원에서 20만원

한국은 20만원에서 35만원

일본, 동경, 오키나와,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25만원에서 35만원

선박 오키나와 1일 대략 10만원 학생은 8만원내외

가장 저렴한 여행사.

www.eztravel.com.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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