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하나의 문명의 바다를 찾아서 가슴 한 구석에 유럽이라는 거대하고 살아 숨쉬는 문명과 선진 공업 국가들의 탐방에 대한 설레임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미지의 세계에 첫 디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두려움으로 밀려 왔다.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첫 발을 디디면서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심화되었고, 꼭 뭔가를 가슴에 심어오리라는 각오 또한 나를 감쌌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것은 여독을 풀어줄 숙소를 찾는 것이었고, 경비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호텔예약 창구는 눈에 많이 띄었건만 그야말로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이리 저리 숙소를 해결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왠 젊은 한국인이 "민박하지 않으실래요"하며 선뜻 말을 건네왔고, 그 순간 여기서 또한 두가지의 계산이 우리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우선 하나는 그래 20일 동안 만큼은 유럽에 푹 빠지는거야. 진정으로 유럽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 민박집보다는 외국인 숙소가 낫지 않나 하는 것과 두 번째는 십여시간동안의 기내속에서의 설레임에 대한 행복한 시달림, 8시간의 시차가 우리의 몸을 나약하게 만들었고, 살아있는 정보는 그대로 mouse to mouse(?)가 최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의 몸은 한국인의 민박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초라하고 볼품은 없었지만 지친 이 몸을 재충전하기엔 충분하였다. 내일 당장부터 탐방을 시작하기 위해 잠을 청해야 했지만 젊은 배낭객들이 모인 자리라서 말그대로 "정보의 홍수"에 흠뻑 젖었고 신나게 담소를 나누느라 피곤함도 잊은채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커다란 창가 너머로 눈부실 정도의 햇살에 새로운 날을 맞이했다. 밤 10시에서야 해가서야 5시면 벌써 해가 떠서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해가 유난히 길었다. 그 전날 밤에 준비한 식빵과 잼으로 화려한 진수성찬의 아침 식사를 했고, 우리는 탐방지로 발길을 옮겼다. 탐방지로 가는동안 런던 시내의 전통있고, 유서깊은 유적지와 유물에 흠뻑 취해 본연이 임무를 상실한 채 반나절을 보냈다. 나의 뇌리에는 아차 오늘 우리의 목적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 아쉬움과 함께 발길을 영국 방송대학교의 London Center로 향했다.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무방비 상태인 우리는 온 몸으로 그 비에 맞았고, 물에 빠진 생쥐꼴로 5시가 되서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충 몸을 추스리고 들어서는 순간 담당자의 퇴근하는 모습이 눈에 꽉차게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고, 하늘의 색깔이 달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래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얼굴에 환한 미소로 사정을 해서 약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건물내부를 견학하며 설명해 주셨다.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하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워 자위를 하면서 맥빠진 다리로 숙소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기대하시라. D-Day는 다름아닌 내일. 이날은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는 필사의 날이었다. 목적지는 영국 OU의 본부. 한국에서부터 수차례 e-mail를 통해 사전연락이 되어 있었고 런던에 도착해서도 전화를 통해 확인을 받아온터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전장에 나가는 기사들처럼 마음 가짐을 단단히 하고 영국 OU 교문을 개선문인양 의기양양하여 통과했다. 제일 먼저 값싸고, 질좋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운 후에 홍보담당관외 존 딜리씨를 만났다. 그는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어찌보면 그에게 우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손님일 수 있지만 그의 태도, 말씨 하나하나는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영력하였다. 영상실, 회의실, 도서관, 각종 자료실 등을 안내하면서 원격교육의 이해를 도와주셨고, 우리는 영국 OU를 방문한 것으로 가슴 뿌듯해졌다. 미리 준비해간 녹음기에 녹음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어느덧 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깃들었다. 성공이라는 두 글자가 뇌리속을 스쳤고, 우리는 존 딜리씨에게 진정으로 고마웠고, 그에 대한 작은 성의로 한국에서 준비한 합죽선과 민속 공예품을 드렸다. 아마 오랫동안 그의 친절함과 배려는 기억속에 자리잡힐 것이다. 그 다음날 하루는 못다한 런던을 관광하기 위해 발걸음을 이리 저리 재촉해야만 했다. 국회의사당, 버킹검궁, 하이드공원, 박물관, 고성 등을 모두 둘러 보기에는 하루는 너무 모자라는 시간이라 휴식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아쉬운 런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도버에서 1박을 할 생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버에서 영국신사의 도움으로 숙소에 무사히 도착해서 1박을 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도버를 거닐었고, 배편을 이용해 프랑스 칼레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에게 도버 해협에서 칼레로 오는 동안 잊지못할 에피소드 하나가 생겼다. 선박 승무원의 실수로 우리의 배낭이 우리가 도착한 뒤 2시간 후에야 도착한 것이었다. 아차 말로만 듣던 비닐족의 현실이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우리의 거센 항의에 의해 그들은 순순히 백기를 들었고, 자신들의 실수를 경허히 인정했다. 그로 인한 대가는 암스트르담까지 직행하는 Coach를 무임승차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우리는 풍차가 있는 나라,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나라, 네델란드에 도착했다. 아니 그런데 암스트르담에 도착한 나에게 작은 충격을 주었다. 그 번잡한 홍등가속에서 크리스찬 유스호스텔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다음날 성박물관을 들를 수 있었는데 그곳엔 각종 성기구 사진과 마네킹들이 관광객을 흥분시켰다. 여기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하나의 경험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네델란드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 풍차가 있는 교외로 빠져 나갔다. 그곳에는 우리는 독일에 사는 교포를 만났다. 비록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김치를 그리워하는 우리에게 김밥과 김치를 주셨다. 같은 민족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뜨거운 동포애를 느낄 수 있었다. 스위스의 인더라겐으로 향하는 도중 독일의 퀼른에서 잠시 목을 축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 그곳엔 축제가 열렸고,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그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었다. 왠지 약간 들뜨고, 붕 떠 있는 기분은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다시 기차에 몸을 실어 스위스에 이른 아침 도착한 우리는 발머 하우스라는 명성이 있는 유스호스텔에 머물렀고, 한국 배낭객이 하도 많은지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국 유학생을 만났다. 세계각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꽉차 용광로 같았고, 특히 기억에 남은 친구는 브라질 사람이었다. 그는 태권도를 배우고 있어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되었고 군대에서 배운 실력을 보이자 너무 좋아했고, 만난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금방 우리는 오래된 친구 같은 분위기를 졌다. 그 녀석의 화끈한 성격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첫날은 목적없이 그야말로 발길 닿는대로 기차에 몸을 싣고 스위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였고, 나도 모르게 요들송을 흥얼거렸으며 강의 짙은 물색깔은 오염되지 않은 신선함을 느끼게 하였다. 날씨가 흐린탓에 융프나우를 등반하지 못하고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알프스산맥을 올라갔다. 해발 2230m에 다다르니 만년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부터는 걸어올라가야 했다. 케이블카에 있는 동안 알프스 산맥의 산자락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수 있었고, 경사가 심한지라 밑을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 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한참을 걸으니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빗방울은 자꾸 굵어져 갔고, 그칠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인 우리로선 온 몸으로 비를 맞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하늘과 가까운 곳에 시원스럽게(?) 비를 맞는 것 또한 그리 큰 곤욕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하의 기온속에 비를 맞았기 때문에 나의 체감 온도는 급격히 낮아짐을 느낄 수 있었고 나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서둘러 내려와야 했다. 로마로 향하는 역으로 가면서 굶주린 허기를 채우기 위해 길가에 있는 말레이지아 음식점에 발을 멈췄고, 시장이 반찬이라고 밥알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그곳에서 스위스에서 유학하는 한국학생을 만나서 동병상현의 정을 느꼈고,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몇마디를 남긴채 제 갈길을 가야했다. 야간 기차속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로마의 정열적인 태양에 부시시한 얼굴로 눈을 떠야 했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의 영하의 날씨와는 사뭇게 이탈리아는 지중해 여름의 열기가 나를 감싸안았다. 로마의 고대 유물에 대해 서서히 얼은 나의 몸과 마음은 녹아 내렸다. 아니 벌써 기온적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언어의 장벽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손짓, 발짓으로 현지인과 친숙히 대화를 나눌수가 있었고, 현지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이천년이 다 되어가는 콜로세움과 방송을 녹화하던 스페인광장, 동정을 세 번 던지면 다시 로마에 돌아온다는 트레이생 등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치안상태가 좋지 않아서 무장 경찰들을 시내 곳곳에서 볼수가 있었고, 특히 환전을 하려고 은행을 가려면 몇 번의 복잡한 보안 장치를 거쳐야 했다. 종교에 대해서 무지한 나에게 바티칸 시티의 방문은 다시 한 번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고, 엄청난 크기의 면적과 웅장한 조각마다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원죄에 대한 용서를 내포하고 있어 나의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고 미래의 목표를 다시 설정하는 기회였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이곳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일어났다. 3일전부터 동행하던 배낭객 친구가 소매치기의 수작에 의해 여권과 카메라를 도난 당했다. 화가나기 보다는 어이가 없음을 느꼈다. 세상에 이런 죽일놈들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경우가 아닌가. 가난한 우리 배낭객에게 무엇을 착취할 게 있어서 그리 난리를 피우는가 말이다. 경찰서에가서 도난 신고를 하면서 느낀 감정은 우선 그들의 여유로운(?) 태도, 아니 뚝 까놓고 말해 외국인에 대한 무관심을 느껴 그리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중도포기할 수는 없는게 아닌가. 새로운 각오로 장도의 길을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황영조의 함성이 아직 꺼지지 않은 올림픽이 개최된 바르셀로나로 발길을 옮겼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참고 견딜지어다. 그리하면 그대에게 복이 있나니. 바로셀로나로 들르기 전에 프랑스 니스로 들렸다. 휴양의 도시, 젊음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곳 니스, 처음으로 해수욕장에 썬텐에 온갖 젊은이의 불꽃을 태웠다. 그렇게 즐기다 어느새 배고픔으로 캄보디안 음식점으로 향했고, 무아지경 속에 음식을 즐기는 가운데 카메라를 놓고 오고 말았다. 그곳에 다시 가보았지만 카메라는 찾을 수가 없어서 내 가슴만 더욱더 쓰라린 것이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 바로셀로나 민박집에 들렸고, 그 집에서 먹은 육계장은 아마 적어도 3년동안은 잊지 못할 그럴 미식이었다. 바로셀로나하면 가우디의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투우 플라멩고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먼저 가우디가 제조한 대성당은 커다랗게 점토로 빚은 듯이 아름답고 미묘한 디자인을 가졌고, 그 두 번째로 투우를 보았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약간 다른 투우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전에 투우사의 일대일 대결을 연상하였으나 투우사의 뒤엔 너무 많은 보조 투우사들이 진을 치고 있어 왠지 소에게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의 관광상품이라고는 하지만 잔인함의 그 하나의 뜨거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나도 왠지 투우의 보고난 후 왠지 개운치 못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플라멩고를 보지 못하여 아쉬움이 가득 들었으나 환상적인 분수쇼를 그 아쉬움을 채우기는 충분하였다. 오색 찬란한 화려한 불빛을 배경으로한 분수쇼는 만인의 사랑을 가득 앉기에 충분했다. 스페인의 수도 마르리드는 집시가 들끓는다는 소문과는 달리 쾌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는 관광이 아닌 또 탐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장을 풀자 마자 우리는 UNED라는 스페인의 원격 교육기관으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첫날은 영어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으나 용케 만난 비서중 한분이 영어를 할 줄 알아 정보센터를 듣고, 보고, 홍부부와 내일 만나기로 한 다음 실질적으로 원격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때 마드리드의 모든 대학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힘들게 찾은 UNED의 대학에 따뜻하게 한 사나이가 환영해 주었다. 그를 통해 UNED의 건물 내부를 돌아볼 수 있었고, 도서관 컴퓨터의 운영을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다음날 UNED 본부를 재방문하여 원격교육의 전반적인 내용과 중요성을 들을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개선문,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트의 언덕, 노트르담사원 말만 들어도 왠지 친숙할만큼 우리가 흔히들 들어온 곳을 견학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빠리는 단지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빈부의 격차가 심한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20일간의 바쁜 일정을 마치고 26일 아쉬움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공항으로 향했다. 집으로 오는 설레임을 가득앉고 말이다. 정말 이번 탐방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많은 물건을 보고, 느끼고, 들은 아주 좋은 시간들이었다. <전북대학교 무역학과 김창수> <이 페이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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