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 모택동의 한국전쟁
주자안롱 지음, 서각수 옮김 / 역사넷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배경과 정책결정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연구자로서 중국의 군인, 외교관 등 담당자등과의 면접,

방대한 증거와 자료로 중국의 참전 결정을 연구하고 있다.

제 1장, 중국, 그리고 한국전쟁의 개전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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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극단적인 기형적 모습이 하나인 스너프 필름이 중국에도 침투했고, 세계최대의 생산국으로 부상했네요. 정글 자본주의가 판치는 중국적이랄지...

사회주의체제붕괴이후 가난한 동유럽인을 대상으로 북유럽, 미국등의 부유층들이 스너프필름을 제작의뢰하면서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고, 체체에서의 스너프 필름 역시 세계를 경악했지요

이라크에서 김선일씨 필름역시 일종의 스너프 필름이지요. 한국정부에서 인터넷을 통하여 필름의 유통을 차단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지요. 저 역시 그 끔찍한 필름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영화의 연출과는 전혀 다르더군요. 뭐랄지 김선일씨 필름의 경우는 전 국민을 공포의 히스테리로 만들 정도의 파괴적이더군요.

중국에서는 포르노 제작도 사형인데, 인권이나 인간의 가치가 없는 국가이므로,

부유층들의 즐기는 문화로 스너프 필름이 제작된다고 하네요.

중국에 거주하면서 더욱 안전문제에 신경이 쓰이네요 스너프 필름은 살인, 강간등을 담고 있으므로

제작, 유통조직을 잡아내는 것도 힘들고, 떠도는 소문만 무성하네요

물론 소지 자체도 불법이 되겠고, 필름자체가 워낙 고액으로 거래가 되므로 일반인들은 구하기가 불가능하고 특정 부유한 매니아(?)만 구입이 가능하겠지요

 

스너프 필름 [ snuff film ]

극중에서 실제로 누군가가 살해되는 장면을 가진 포르노 영화

스너프란 폭력 살인 강간 등의 모습을 담아 은밀히 유통시키는 필름으로 섹스장면을 그대로 연출하고 상대방을 죽이는 과정을 그대로 찍은 영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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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보는 내곡동으로 통한다

국정원 이어 기무사·정보사 이전 추진… ‘세계 최대 정보타운’ 조성 주민 반발 거세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內谷洞) 일대에 ‘세계 최대의 정보타운’을 조성할 예정이다. ‘세계 최대의 정보타운’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내곡동의 인구는 2000년 현재 8751명밖에 안 되지만 면적은 12.67km2나 된다. 15개 동(洞)을 거느린 서울시 중구의 면적 9.97km2보다 더 넓다. 게다가 면적의 대부분이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다. 그러니 오히려 국가기관들이 들어올 부지는 충분하다는 얘기다.

중구의 명소 하면 남산(南山). 그 안자락에 무시무시한 ‘남산 안기부’가 있었다. 그 ‘남산 안기부’(국내 파트)가 ‘이문동 안기부’(해외 파트)와 한지붕을 쓰는 통합 신청사를 내곡동에 지어 이전한 것은 지난 95년 9월.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구룡산과 대모산 그리고 경기도 성남시와 경계가 되는 인릉산 사이에 형성된 내곡동 분지에 자리잡은 까닭은 서울시 내에서 ‘레이더에 안 잡히는 곳’으로 이만한 땅을 확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

내곡동 주민 김정식씨(62)는 “그때만 해도 안기부의 위세가 무시무시한 시절이라 주민은 아무도 내놓고 반대를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국군 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에 이어 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까지 각각 20만 평씩을 차지하며 이곳으로 옮겨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에 소재한 기무사가 이전을 추진한 것은 이른바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93년부터. 당시 문화예술계의 요청에 따른 대통령 공약사업 추진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법적 제한과 예산문제 등으로 이전문제는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지난 96년 전문업체의 안전진단 결과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자 현 위치에서의 재건축을 추진한 끝에 지난해 4월 김대중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았다.

‘레이더에 안 잡히는 분지’

실제 기무사 본청 건물은 88년 전인 1913년 경성의대 부속건물로 건축되어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 그러나 ‘현 위치 신축’ 방침이 알려진 후 문화예술계 및 언론계의 반대의견을 수용한 당시 박지원 문화부 장관이 김대통령에게 이전을 건의하자 기무사는 ‘시설 현대화’ 문제를 다시 접어야 했다. 사실상 대통령의 ‘친위부대’인 기무사가 부대 이전문제로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충정’에서였다.

기무사는 이때부터 서울시에게서 13개 이전 후보지를 추천 받아 은밀하게 부지 물색에 들어가 내곡동 일대 20여 만 평을 낙점했다. 그런데 껄끄러운 점은 바로 이웃에 모든 정보기관에 대한 ‘조정’ 권한을 가진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기무사에 따르면 김필수 기무사령관이 지난해 11월 대통령에게 내곡동으로의 부대 이전계획을 보고해 “국정원장과 협의해 추진하라”는 사실상의 ‘재가’를 받아냈다는 것. 그런데 대북공작을 수행하는 정보사까지 국정원과 인근한 강남구 세곡동으로의 이전 방침을 밝히고 지난 4월 국정원장이 임동원 원장에서 신건 원장으로 바뀐 뒤 사정이 달라졌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그 연유를 이렇게 말한다.

“지난해 연말 기무사령관이 대통령에게 부대 이전계획을 보고했을 때 ‘국정원장과 협의해 추진하라’는 말씀을 한 것은 사실이다. 기무사와 정보사는 이것을 가지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얘기한다. 그러나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이 이 문제를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바람에 군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일 뿐 협의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신건 원장이 취임한 이후 밑에서 건의해 ‘협의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기무사측은 이에 대해 펄쩍 뛴다. 국정원 예산을 쓰는 것도 아니고 지난해 12월 국방부 정책심의 결정을 거쳐 국방예산으로 추진하는 사업인데 국정원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 그런데도 국정원이 I.O.(정보관)들을 풀어 은근히 반대 여론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의 입장은 다르다. 국정원이 내세우는 ‘협의’의 근거는 ‘국가 1급 보안시설’이라는 점. 국정원측은 보안업무 규정과 시행규칙상의 ‘협의’는 사실상 국정원장의 ‘승인’을 뜻하는 것이라며 “말로만 협의해야 한다면 그런 규정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또 대북공작이 주임무인 정보사가 굳이 서울 시내에 주둔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제기한다. 그러나 정보사측은 “우리가 이전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서초동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서울시의 부대 이전 추진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국정원이 내세우는 또 다른 반대 이유는 정보기관을 한데 모아놓으면 그만큼 보안유지가 어렵다는 것.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처럼 국가 1급 보안시설이 밀집한 곳은 없다는 것이다. 또 ‘유사시 미사일 공격 등으로 집중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그러나 기무사의 한 관계자는 “전쟁이 나면 국가 기간시설과 비행장, 작전부대 등이 선제 타격대상이고 국정원과는 직선거리로 3km나 떨어져 있다”며 이는 괜한 트집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모난 돌’ 옆에 있다가 ‘정’ 맞을 우려는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보안사(기무사의 전신)가 중앙정보부를 ‘접수’한 79년 10·26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리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도 나온다.

게다가 양쪽 다 이 문제를 입밖에 내지는 않지만 기무사가 부지로 수용할 능선의 바로 아래에 국정원장 공관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으로서는 내심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기무사 이전팀의 한 관계자는 “보안시설 규정 때문에 산 능선까지 부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만 평도 안 되는 현재의 소격동 부지보다 20만 평은 너무 큰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기무사 본부와 그동안 분산되어 있던 직할부대와 경비대, 통신단 등이 다 들어오고 연병장과 조경시설 등을 갖추려면 그 정도는 필요하다”면서 “이번에 이전하면 사실상 영구히 주둔한다는 각오로 주민과 공존하는 부대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 1급 보안시설’ 모두 집결 그러나 기무사가 넘어야 할 산은 국정원뿐만이 아니다. 내곡동 관내에 있는 군 관련시설을 보면 주민의 불만은 당연하다. 내곡동을 가로지르는 헌릉로를 사이에 두고 기무사·국정원·정보사가 들어서고 그 맞은편에는 강남-서초·강동-송파 예비군 훈련장과 화생방 방호사령부까지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뿐이 아니다. 인근 세곡동 정보사 이전 예정지 근처는 행자부가 추진하는 민주화운동 희생자 묘역 조성 후보지로 유력한 두 곳 중 하나다. 유재성 서초구청 내곡동장은 “게다가 서울시에서 추진중인 장묘시설(화장터) 13개 후보지 중 4곳이 내곡동에 집중해 있어 주민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무사 이전 반대추진위 김학만 총무는 “그동안 30년 동안이나 재산권·생활권 침해를 참아왔는데 군부대가 들어와 이제는 발전의 희망이 없다”면서 “이곳은 10년 이상 공시지가가 묶여 있기 때문에 최소한 실거래 보상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기무사 이전으로 내곡동 안에서도 가장 피해가 큰 곳은 내곡동의 원조격인 안골마을. 기무사가 들어서면 33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경주김씨 씨족마을인 안골은 국정원과 기무사의 철조망에 갇혀 영락없이 ‘고립된 섬’이 될 형국이다. 기무사도 이런 점을 고려해 체육시설 등을 만들어 주민 편의시설로 개방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안골 주민들은 “국정원도 처음 들어올 때는 주민 산책로를 개방했지만 나중에 보안을 이유로 봉쇄해 버렸다”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실거래 보상을 수용한 국정원의 보상·수용 사례를 적용해 안골마을 전체를 보상·수용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기무사의 한 고위관계자는 “신축·이전 건으로 두 번이나 대통령께 보고해 재가를 받은 사안을 가지고 다시 대통령께 보고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배수진(背水陣)을 쳤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정원과 주민을 설득해 기무·정보사 이전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세계 최대의 정보타운’과 ‘세계에서 유례없는 정보 집중현상’은 여전히 남는다.

< 김 당 기자 > da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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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와서 중화 문명을 잃어버렸다

집단히스테리의 공간같다

중국인, 한족들은 스스로의 이름도 있어버리고 국가주의 함몰되어간다

이방인들, 외국인들 역시 허구의 공간에 물들어간다

좀 답답하다

오늘 하루는 황사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신기루처럼 모든 것을 속이는 매커니즘에 익숙해져간다

비극의 공간에서 역사를 고민해본다

 

중국 20세기 발명품, 한족, 중화 민족주의를 넘어라

중국 공산당은  4천년 중국지역의 역사에서 최대의 영토와 인구를 거느리는데 성공했다.

한족최초의 정권은 한, 수, 당, 명등의 위대한 정권을 세웠고, 몽고, 티벳, 만주족 등로부터 끊임없는 식민지 생활을 하였고, 이제는 청제국 300년을 마지막으로 손중산의 한족혁명과 공산당의 중국혁명을 통하여 한족 최대의 영토와 인구를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그들 지배한 황족과 소수민족을 설복시키는 논리로 4천년 한족의 역사에서 이제는 민족을 섞는 전략이 중화민족주의라는 것을 발명했다.

중화민족주의라는 문화컨텐츠는 중국인민공화국 내부에 어떤 느낌을 주는가?

아메리카 민족주의 와같다.

국내적 탄압과 중국위협론

소수민족, 귀족공산당, 한족위의 소수민족탄압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 

군사적 위협, 경제적 번성, 천안문 사태, \

영토분쟁과 침략 전쟁

 중국을 포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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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 축구단 + 어떤 나라 (2disc) [알라딘 특가]
대니얼 고든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천리마는 중국의 대약진운동이나 스탈린의 대중동원형 노동체계로

선수들의 사상도 축구도 그 당시에는 천리마식이었다.

감독은 50년대 후반 시작된 천리마 운동이라는 시각에서 북한사회와 축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영화는 초반부터 영국인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고, 냉전상황에서 북한 선수들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시작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영국외무성의 북한팀의 영국진출을 고민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소개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정치와 스포츠는 따로 있지를 못했다.

감독은 국기, 국명등에 대한 문제를 피파, 체육장관, 외무장관들은 북한팀의  서방진출의 고뇌모습을 제치있게 스케치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당사국 영국은 북한에 대한 편견이 심했지만, 북한팀이 머무른 도시의  미들스브로 시민들은 최약팀 북한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열광적으로 북한팀을 응원해주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이 오르기 전까지 북한의 66년 영국월드컵 8강이 최고성적이었고, 신화였다.

한국인으로서 북한 축구단의 기적같은 8강이야기는 2002년의 4강신화처럼 민족의 자랑스러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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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축구단

일부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 선수들의 일부는 정치수용소에 있거나 갔다왔다고 전해진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으며 아시아 국가로서는 최초로 8강에 올라 Korea 붐을 일으켰던 북한 축구의 영웅 박승진도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실수를 했다가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썩게 된 경우이다. 이때 북한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포르투갈과의 결전을 앞두고 몰래 숙소를 빠져 나와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것이다. 패인(敗因)을 따지는 검열에서 사실이 들통난 선수들은 여지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박승진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아 요덕수용소의 혁명화구역에 갔던 것이고, 다른 선수들은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 월드컵 8강신화의 주인공들. 이들은 거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박승진, 안세욱 등이 수용소에 끌려간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일부 선수들의 행방은 지금도 묘연한 상태에 있습니다. 박승진이 요덕수용소에 끌려온 것은 북한 축구계는 물론 저를 비롯한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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