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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날도 아닌 날 - 인생에서 술이 필요한 순간
최고운 지음 / 라의눈 / 2015년 3월
평점 :
나는 술을 좋아한다. 참 좋아한다. 어제 오후에 최고운의 <아무 날도 아닌 날>을 펼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책이 재미있어서 끝까지 단숨에 볼까, 싶기도 했지만 왠지 그 타이밍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만 같았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자기합리화'라고 하는 모양인데 난 그저 예의가 바를 뿐이다.
어제 미처 다 보지 못하고 남은 부분은 오늘 아침 학교에서 읽었다. 처음엔 분명 텅 빈 강의실이었는데 싸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보니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학생들만 있었다면 조금 덜 부끄러웠겠지만 교수님도 와 계셨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낄낄대며 책을 보고 있었다니. 대단한 책인 건 틀림없다. 심지어 철학사 수업이었는데(상상하는 그대로의 분위기). 어쩌면 오늘도 술을 마시게 될지 모르겠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을 딱히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일단은 재미있고 거침 없고 그리고 또... 또오.... 한잔 생각나는 거? 뭔가 뭉클해지는 부분도 있다.
놀라운 건, 책에 나온 거의 모든 에피소드와 주석에 격렬히 공감했다는 사실이다. 난 어쩐지 '반듯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좀 있는데 이 책은 그런 게 없다. 그래서 빨려든 건지도. 저자는 사랑스럽다 못해 만나서 소주(두꺼비 소주가 좋겠다)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나누고픈 사람이(라고 상상한)다. 나도 모르게 상상하는 것이라 쉽게 멈출 수가 없다.
대신 내가 처음 들어 보는 술과 안주의 이름, 잘 모르는 영화나 배우 이름이 나와서 살짝 주눅들었다는 게 단점이랄까. 나중엔 묘한 경쟁의식마저 생겼다. 내가 더 많은 종류의 술을 정복해 보겠다는, 뭐 그런.
이래서 사람들이 대도시(서울?)에 사는 건가, 갑자기 이해가 되고 그들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여긴 지방 소도시이고, 내가 사는 마을은 자정 무렵이면 밥집이건 술집이건 불 켜진 곳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자카야(응? 그게 뭐임, 먹는 거임?)는 고사하고 선택지가 열 손가락도 안 되니 씁쓸하다. 더군다나 가게 문 닫을 시간 걱정하느라 초조해서 술 마시는 데 몰입도가 떨어진달까. 간혹 제대로 술을 마시려면 멀리 나가야 하는데, 교통편도 마땅치 않다. 택시를 타거나 대리를 부르거나, 운전할 줄 알면서 술 안먹는 사람과 같이 살거나, 집을 '술집화' 하는 수밖에 없다.(그 어느 것도 만만한 선택은 아니다) 저자가 여기저기서 맛있어 보이는 안주에 다양한 술을 즐기는 걸 보니 진심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서울시민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서울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비용(집값+이사비용)으로 마을 경제에 기여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라고 혼자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