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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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휴일 아침, 조조영화 관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휴일엔 조조영화를 보려고 한다. 아침에 한적한 영화관을 들어서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내가 왠지 부지런한 인간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니까. 뿌듯함의 절정은 영화관을 나설 때 찾아온다.

,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어!’

그렇다. 아침형 인간역할놀이를 하기 위해 조조영화를 보는 것이다.

 

오늘은 차이나타운을 봤는데, 영화관을 나설 땐 뿌듯함을 느끼기는커녕 삶의 의욕을 거의 상실할 지경이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총 쏘고, 칼로 찌르고, 때리고, 죽이는 장면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만든다. 특히 칼부림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내가 찔리는 사람에 몰입하는 것인지, 찌르는 사람에 몰입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터무니없이 고급스러운(?) 의문이다.

 

내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 최근 출간된 신영복의 담론때문이다.

신영복의 책은 뭐랄까,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바른 자세로 앉아서 읽어야 할 것 같고, 옷매무새도 단정히, 안경도 고쳐 써야 할 것만 같다.(실제로 그러고 있다) 글씨체로 치자면 궁서체(진지하니까), 한 획 한 획 정성들여 쓰는 장인(匠人)의 느낌으로 읽어야 한다. 내 경우엔 한 장(), 한 장() 생각하고 메모하며 읽느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출간되자마자 사서 오래 붙들고 읽었더니 내 시시한 생각들도 모두 궁서체로 머릿속을 떠다니는 기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뷰도 진지한 궁서체로 써야만 한다.

 

담론을 크게 두 가지 주제로 분류한다면 단연 세계인간이 아닐까. '관점 달리 하기''인간 이해(인간성 회복)'가 키워드다. 익히 들어온 얘기 같지만 전혀 시시하지 않다. 금쪽같은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중 관계를 중심으로 인간 이해와 인간성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다. 난 그 부분을 읽으며 생각이 많았다. 기계가 사람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사람으로 사람을 갈음하는 시대사람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존재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을 보며 호흡곤란을 겪을 지경이었음에도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떠올랐던 건 <담론>의 그 부분 때문이다.(책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영화 홍보 영상(예고편)에 등장하는 대사중에 압권은 증명해봐, 네가 쓸모 있다는 증명.”일 텐데, 증명을 못하면?

쓸모없어지면 너도 죽일 거야.”

돈 없지? 몸으로 갚아.”

(온몸이 덜덜 떨린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쯤 해두자.)

 

자본주의가 심화된(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적인존재가 아니다. 노동으로부터, 상품으로부터, 관계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소외된 인간들은 제각기 돈을 향해 질주할 뿐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쓸모 있는 인간으로 인정받고, 돈이 없으면 몸으로 돈을 대체해야 한다. 그마저도 못하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차이나타운의 칼부림 장면은 분명 끔찍하다. 하지만 현실은 더 끔찍한 곳일지도 모른다. 노골적인 칼부림은 드문 일이지만, 남을 제치고 내가 살아남는 경쟁은 일상적이다. 모든 가치들은 경제적 가치에 대해 부차적인 것이 된다. 실종자를 수색하기 위한 세월호 인양이 세금낭비라는 논리 앞에 무기력해지듯이. 내가 영화 속 칼부림 장면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의 부조리와 처참한 모습에도 눈 감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인간다움, 인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이 깊어진다.

 

그렇다.

담론은 영화를 보다가도 생뚱맞게 의문을 가지게 될 만큼 깊고 진한 울림을 주는 책이다. 그저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칼부림 장면에 벌벌 떨고 헐떡거리기만 하던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독자로 하여금 전에 없던(그것도 꽤 진지한)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면 정말 괜찮은 책이 아닐까? 고전의 내용을 줄줄 읊는다고 인문학적인 게 아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보시길. 그것도 궁서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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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0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나타운, 아직 안 봤는데 망설여지네요. 그래도 보게 될 것 같지만‥ 진지하고 진솔한 페이퍼와 좋은책, 고맙습니다

cobomi 2015-05-03 22:53   좋아요 0 | URL
아이쿠, 고맙다뇨, 제가 다 감사합니다.
<차이나타운>은... 끔찍하달까 잔인하달까... 그런 장면에 비위가 약하시다면 보는 내내 힘드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영화 자체는 괜찮았어요.
<담론>을 읽어서 그런가, 영화 자체가 그런가 내내 생각나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보시길 추천합니다!

당근 2015-05-04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나타운 보고 싶다더니 부지런 코스프레(?) 조조로 보셨군요~ㅎㅎ 좋은 리뷰 잘 봤어요

2015-05-04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xmax14 2015-05-04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글 잘 읽고 갑니당~^^

cobomi 2015-05-04 01: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AgalmA 2015-05-04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론 읽고는 싶은데, 정해둔 책읽기 일정이 빡빡해서 아쉬운대로 담론 팟캐스트를 듣고 있어요. 말씀하신 기계-노동 대체 부분도 들었고요.
익히 들어왔지만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품성이 놀라웠습니다. 신영복 선생님 정말 어른이시더군요. 감옥에서의 그 혹독함을 유머를 섞어 사람들에게 찬찬히 들려주시는데, <쇼생크탈출>이나 <이반 데소니비치의 하루>를 보고 난 뒤의감동과 숙연함처럼...

cobomi 2015-05-04 09:47   좋아요 0 | URL
강의 팟캐스트가 있었군요! 책은 생각하고 메모하며 읽는게 좋은데, 강의는 뉘앙스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테니 좋을 것 같아요.
저도 팟캐스트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Marcus Aurelius 2015-05-0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님의 담론 읽어보고 싶었는데, cobomi 님의 글 읽고나서 꼭 사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cobomi 2015-05-05 16:49   좋아요 0 | URL
꼭 사서 읽으시겠다니, 신영복 선생님께서 좋아하실 겁니다ㅎㅎ
아이디 보고 좀 놀랐어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맞죠?
철학책에서 자주 언급되던데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2015-05-05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5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5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cus Aurelius 2015-05-05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ㅎㅎ
남은 연휴도 재미있고 알차게 보내시길.

시우파 2015-06-1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타고 왔습니다. 단정하게 댓글을 남기게 되는 여운이 좋습니다.

cobomi 2015-07-02 09:4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을베고자는남자 2015-07-01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서체로 읽자. 좋은 말이네요. 우연히 들렀는데 마침 담론을 어제 다 읽었습니다. 저는 건방지게 소파에 누워 읽었습니다. 왠지 선생님에게 죄송했단 말씀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님의 말씀에 십분 공감하고 갑니다. 차이나타운도 봤는데 인간을 쓸모있음과 없음으로 나눈 대화 역시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선생은 그 쓸모없음을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말씀하시구요.

cobomi 2015-07-02 09:44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공감하신다니 기쁩니다. 물론 제 생각이라기보다는 신영복 선생님 말씀이겠죠 ㅎㅎㅎ 쓸모없음을 극복한다... 쓸모 있음과 없음에 대해 또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