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
뒤라는 말, 뒤
해 뜨는 장엄한 아침이 아닌
해 지는 쓸쓸한 저물 무렵의 말
높이 솟아 오르는 산이 아닌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강의 말
빛나는 햇살 받아 환해진 얼굴이 아닌
햇살 가린 그늘 속 얼굴없는 그림자의 말
빨간 루즈를 칠한 요염한 입술이 아닌
붉은 마음을 감추고 입 안에 갇힌 혀의 말
박수 받는 몇몇이 아닌
어딘가에서 박수치고 있는 여럿의 말
기쁨이 슬픔에게가 아닌
슬픔이 기쁨에게 건네는 말
웃음이 눈물을 잊었기에
눈물이 웃음에게 조용히 건네는 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앞서갈 때
누군가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말
장미꽃다발 들고 세레나데를 부르는 로미오가 아닌
꽃상여를 달고 슬피 우는 단테의 말
새벽 첫차의 시동 켜는 소리가 아닌
자정 무렵의 차고지
막차의 시동 끄는 소리의 말
잘난 사람들 잘난 세상의
그 요란하게 잘난 말들이 아닌
못난 놈들 못난 세상의
그 서글프게 못난 말들의 말
매끈하고 세련된 이마트 그런 대형마트가 아닌
투박하고 초라한 시장 그런
땀냄새와 악다구니 들끓는 재래시장의 말
시원하게 쭉 뻗은 고속도로가 아닌
산굽이 물굽이 다 돌고 도는
정선 아우라지길 그 곡선의 말
입으로 빠르게 고백하지 않고
마음으로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천천히 되뇌이는 말
가까이로 오는 이 아닌
먼 곳으로 떠나는 자들의 말
기쁨 속에 행복 속에
무심코 지나치는 말
서럽다는 말
아프다는 말
아프냐는 말
앞만 보며 길 가는 생의 여울목에서
발 아래 전혀 못 보고 건넌
그 뒤에 남아 온 몸으로
너를 받친 징검다리의 말
뒤도 안 보고 떠나는 사랑에게
뒤에 한참을 남아
‘안녕’이라는 말로 오래도록 손 흔드는
사람의 말
오래 전
너는 떠났어도
단 한 번도 너를 떠난 적 없는
나의 말
내 안의 말
--- 저는 요즘... 해가 지는 저물 무렵 오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차를 잠시 세워 두곤 합니다. 빠르게 뛰던 심장박동 같은 차의 시동을 꺼뜨리고, 밖으로 나와 무섭도록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바라봅니다. 저 편 산 너머로 온 몸을 부스러뜨리며 저무는 해를 한참 바라보고 있곤 합니다. 그럴 때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가슴에 보이지 않는 구멍을 내며 아리게 관통합니다.
그 구멍에서 슬픔이 주룩주룩 새어나올 것만 같아... 곧잘 담배를 입에 물곤 합니다. 꽉 깨문 입술에 담배 이 녀석의 신음소리가 배어들어 흠칫 놀라기도 합니다. 아~! 너도 나와 같은 생이구나! 너무도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왜? 라는 질문을 놓아버렸을 때... 나 역시 누군가의 입에서 이렇게 쪽쪽 빨려서 사라지고 마는 한 생인 것을~
순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이 세상 그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파스칼이란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저는 바람에 흔들리는 존재를 읽어내는 그의 눈빛에 놀라긴 했었지만, 이 명언 보다는 다음의 말이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구멍이 있다."
너무도 빠르게... 너무나 바삐...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어딘가로 가려 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한 번쯤 이 깊은 심연의 구멍의 실체를 보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앞장 서서 어딘가로 가려는 사람과 사물의 눈에는 절대 보일 수 없는 그 구멍 말입니다.
저물 무렵... 그리고 어둠이 고요히 내려오는 그런 시간에 어쩌면 나, 너, 우리들은 가장 맑고 순정한 시간들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갑자기 백석의 그 처연하게 아름다운 시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요.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는 것들은 /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만들었으니 / 한없는 슬픔과 사랑 속에서 살게 만드신 것이었다"
뒤에 남아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는 아마도
자신의 마음 속의 구멍을 아프게 들여다 보는 심안을 지닌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
당신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