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끼호테
풀어진 넥타이를, 할딱거리는 혓바닥처럼 늘어뜨리고 어김없이
집으로 간다 사막은 아니지만, 곳곳에 넘치는 오아시스가
옷을 벗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간판 사이로, 그 흔한 말
한 마디 없이, 비루먹어 털털거리는 303번 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손잡이처럼 한없이 흔들리며, 창과 투구도 없이 하루종일
중심을 못잡고 흔들리다, 여기 치이고 이리 채이고 저리 밟히며, 그 흔한
돌멩이 하나 던져 보지 못하고, 그 흔한 주먹 한 방 날려보지도 못한 채 몇 번씩
낙마했던 하루를 되새김질하며 잠시, 앞에 앉은 여자의 올이 빠진 스타킹과
말굽처럼 솟은 하이힐을 관음하다, 명료하고 건조한 여인의, 안내 방송에 화들짝 놀라
내린다, 하수도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로등이 고사목처럼 다닥다닥 붙박힌
라 만차의 골목 골목을 지나, 점멸을 멈춘, 신호등이 있는 붉은 시장을 거쳐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며 옥탑에 매달려 잠시, 달빛 아래 숨을 고르며 매만진다,
닳고 닳아 더 이상 비밀을 간직하지 못한 열쇠를 꺼내고, 잠시 생각한다 저
안에 가라앉은 먼지처럼 하루종일 기다렸을 안온을, 고요한 일상을, 철커덕
잠시 놀란 어둠이 맨 얼굴로 이빨을 드러내다, 망설인다, 스위치를 눌러도
피어나지 않는 별빛처럼 대답없는 형광등, 잠시 당황하다 여지껏 켜본 적이 없는
촛불에 불을 당긴다 둥근 알을 뿜은 낙타처럼 촛불은
끔벅끔벅 꿈을 꾸고 그 앞에서 나는
오래 전에 읽었고 아직까지 못 읽은
돈끼호테를 펼친다
오늘밤도 이러다 잠들 것이다
---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많이 번역되었고, 널리 읽혔다는 소설이 바로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쓴 ‘돈끼호테’입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창비'에서 심혈을 기울여 선보인 완역판을 구입하고는... 틈틈이 읽었습니다. 지금껏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 못 읽었습니다.
'돈끼호테'는 그저, 철지난 기사도 소설에 미친 중늙은이가 옛기사 복장을 하고 비루먹은 말과 낡은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무용 아닌 무용담을 펼치는 내용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진정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역설적인 텍스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무엇에 미쳐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면 그 의미는 분명히 드러나겠지요.
무엇에 미쳐 사십니까?
과연 무엇에 미쳐 가슴뛰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돈입니까? 아니 무슨 그런 세속적이고 천박한 말이냐구요?
그러나 다시 묻습니다.
돈입니까? 아파트 평수입니까?
좀 더 화려하고 세련되고 편한 자동차입니까?
행여 골프같은 우아한 운동에 미치신 건 아닙니까?
'돈끼호테'가 미친 가치는, 우스꽝스럽고 다소 허황된 모습과 행위로 그려지고 있지만... 어쩌면 약자에 대한 사랑과 연민, 모두가 철지나고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자신만의 꿈과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은 어쩌면 이 바쁘고 빠르고 세련되게만 흘러가는 숨가쁜 자본과 도시의 삶에서는 너무나 쉽게 잊혀지고 지워지는 본질적인 가치들일 겁니다.
저는 그런 '돈끼호테'가 좋아서 이 시를... 오래 전 어느 깊은 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필휘지로 갈겨 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