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가 말하는 홀가분한 죽음, 그리고 그 이후
정현채 지음 / 비아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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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동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3일 동안 의식없이 누워있었다. 깨어난 후 하는 말이 "시커먼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와서 '가자' 하며 일으키는데 안 가려고 온 애를 쓰며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그것이 3일이나 지났는가."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정말 교수님이 불쌍해서 마음이 아팠다.
정교수님은 암투병 중, 아니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병과 함께 동행하니 암동행 중 이 글을 쓰셨다.


이 글의 결론은, 사후세계가 있으며 그곳은 고통이 아니라 아름다운 곳이다. 또 윤회하기 때문에 한 번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면 계속 인간으로 태어나기에 축생을 두려워말라고 한다. 죽음은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일 뿐이니 피하려고 애쓰지 말고 품위있게 반기라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증거를 내민다. 사후세계, 환생의 증거, 참된 영매는 '흰까마귀이론'을 말하면서 단 한 가지면 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그럼 그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요? 

결코 답할 수 없다.  성경에 없는 것은 함부로 이야기 하면 안된다.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으나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유한한 인간의 지혜로 생명과 죽음을 정의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이 교수님이 이 사후세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에너지와 시간을 성경에 쏟으셨으면 답은 달랐을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 사탄의 길이 아닌 성령의 길을 걸었다면, 현생은 단지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정도가 아니라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그 점이 가장 안타깝다.

이 책은 말한 것처럼, 많은 양의 증거가 흥미롭다. 텔레비전 뉴스, 신문, 다큐멘터리, 책, 영화, 영매들, 심지어 유투브...


그런데 왜 한국 무당이나 점쟁이의 말은 싣지 않았을까? 사후세계가 동일하다면 어느 지역이나 동일해야 할 것인데, 다르다. 이 글의 증거 대부분 서양의 것이다. 한국 역사와 샤머니즘 속의 사후세계는 고통스럽고 두려운 곳이라 옳지 않다 하는 것일까? 수많은 악한 영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하겠나. 한국에서 저승은 가지 말아야 할 곳인데 그럼 몇 천 년의 역사 속 동양 사람들은 다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객관적이라는 것은 곧 본인 판단에 좋은 것 아닌가. 




윤회를 믿는 사람의 비율이 늘었다고 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니, 이건 지옥을 믿는 사람의 비율이 높으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분이 진짜 학자 맞는가.
사후세계나 윤회를 경험한 증거보다 성령체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어떻게 감히 비교할 수가 있는가. 

교수님이 죽음을 긍정적으로 보는 면에서 좋았다. 
의료 현장에서 보는 암환자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가족들의 자세,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내게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또 안락사-존엄사에 관한 내용은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수많은 죽음을 접한 의사 입장에서 기록해준 생명유지장치의 고통도 처음 듣는 내용이라 나도 이렇게 유서에 기록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지금 내 삶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리 애써서 선하게 산들, 온전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의'에 사로잡혀 살면 '회개' 가 일어날 수 없다.  난 늘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두려운 마음으로 하루 하루 산다. 바울의 말처럼.

교수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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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 - 김문훈 목사가 전하는 세상에서 기쁨으로 살아가기
김문훈 지음 / 넥서스CROSS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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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절대 풀 수 없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죄' 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 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인생은 괴로움 (苦) 이다. 어느 종교에서나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 괴로움을 해결하는가 하는 태도는 각각 다르다. 누구는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키 위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 하고, 누구는 인간은 무아 (無我) 의 상태로 들어가 궁극엔 신이 된다고 한다.  누구는 다시 태어나는 윤회(輪廻)는 영원한 것이라 착하게 살아야 그 다음 덜 괴로운 상황에서 태어날 수 있다 한다.
그 어느 종교나 '절대자' 없이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무신론자 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조차 '신'의 개념을 머릿속에 담고 있으니 신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반증이 된다.


이 책은 목사님이 쓰셨다. 이제 막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나 기독교에 열린 마음이 있는 불신자가 읽기에 적합한 책이다.
성경 본문과 세상 예화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읽는 이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인간이 왜 존귀한가? 진화론자들 입장에서는 세포 덩어리일 뿐이다. '지렁이'나 '인간'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나와 같은 믿는 자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이 우선이고, 나는 사랑 받기에 '당연한' 존재이다. 

이땅을 살아가는 힘도 여기에서 나온다. 유명인부터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들까지, 다들 사랑에 목말라 갈구한다. 그러나 나는 누구를 만족시켜야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being 자체로' 사랑받기에 이것이 자존감으로 이어지고, 잠시 머물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이길 힘이 된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존경과 거룩과 진리를 회복하여 자유하게 되라고 쓴다. 사실 이것이 인생의 괴로움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자유함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삶. 아빠 아버지에게 맡겼을 때 평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는 아이 같은 자유함.
오늘 내게 필요한 자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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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잔치 - 서울에서 부산, 마라도까지 36일간의 도보여행기
최신종 지음 / 좋은땅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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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커 갈 수록 여행의 욕구가 커진다. 함께 뭘 하면 즐거울까, 어딜 가면 추억이 될까... 요런 고민들도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고생을 덜 할까!
아이들 데리고 집을 나서면 나서는 순간부터 후회가 밀려온다.

조금 더 크면 고생을 덜 하겠지 싶어도, 생각한 만큼 커도 생각한 만큼 고생이 덜 하진 않다.  신기한 것은 아이들 노는 것 지켜보기만 해도 즐겁다는 것. 

혹시나 아이들이 조금 더 컸을 때 도보 여행 하자고 하면 어떨까 싶은 맘에 책을 펼쳤다.
그리고 딸에게 "우리도 좀 크면 도보 여행할 거니까 이 책 보면서 준비물이 뭐가 필요한지 적어 놔~" 주문했다.

여행이란 말에 신나게 책을 펼친 초등 2학년 딸이 읽으면서 깔깔 거린다.



작가의 도보 여행은 5월 31일 9시에 출발한다 .. 여름이 시작하는 시기에 출발하다니!
한 달만 일찍 출발했어도 제목이 바뀌었을듯.

작가의 상상력과 위트가 참 재미있다.
제목부터 땀잔치 아닌가.
초등학생도 웃을만큼 쉽고 유익하고 정보가 있는 책이다.
국내 도보여행을 꿈꾸는 자들 뿐 아니라 잠시 풍자와 해학으로 정신 휴가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디자이너로서 모든 작업을 직접 해서 그런지 글과 사진, 그림이 하나로 잘 어우러진다. 
무엇보다, 작가의 긍정 에너지가 책에 넘친다. 삶을 진지하게 대하면서도 감사와 만족의 에너지가 이 책을 추천하게 한다.
시중에 여행기 책들은 뜬구름 같은 단어들을 써가면서 생각이 깊은 척, 있어보이려 애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담백하고 겸손하다.

책을 다 읽은 딸에게 "우리도 이렇게 도보여행할까" 했더니 한 마디 한다.
"악. 싫어!"

9살 인생이 남 하는 거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을 벌써 체득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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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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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 위에 존재했던 무수한 여성(조상)들의 아픔에 치를 떨며 울던 시간도 있었다. 그 한이 내 핏줄에 고스란히 유전된 듯 몸부림쳤다.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에 빠져서 대사를 외우고 그런 친구(연인)을 만나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런 쓰레기 같은 시간들을 나는 한참 보내고나서 정신 차렸다.)
여성착취의 역사는 질기도록 이어져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잡지 않아야 할 것들과 손잡는 것은 짚으로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불이 나면 홀랑 타올라 나까지 삼킬 것이다.


작가는 요즘 '핫'한 주제들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부해준다. 매체에서 뭉뚱그려서 무의식적인 단어들로 설명하는 사건들을 단어 하나의 의미와 사회적 맥을 짚어가면서, 여성이 얼마나 부당하게 차별받고 또 억울함을 당연히 받아들이는지 서술해준다.  

뉴스, 명화, 영화, 소설 등을 통해 여성에 대한 시각을 보여줘서 재미있었다. 주제별로 나뉘어진 글 중 한 꼭지 택해 소그룹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할 때 유용할 책이다.


그러나 몇 부분에서, 실망스럽다.


역시나 본인이 매우 잘 알기에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위선적이다. 

난민 입장에서 거부감을 감정의 맥락에서 살펴보란다.  거부하는 사람들이 다 반이성적으로 감정적인 것처럼 말한다.
난민 500명이 대한민국 인구 5000만을 압도할 것 같은 과잉 공포와 걱정이 허구 란다. 어이없다. 이게 과잉이면, 왜 유럽에서 잘 진행하던 난민정책 접고 반난민정책을 통과시키고 준비중인지 서술이 없는가.
난민 이야기에서 무슬림이라는 점을 축소시켜 이야기한다.

물론 우리가 그렇듯, 그들의 대부분은 무늬만 무슬림일 수 있다. 꾸란을 읽어본 적도 없고 라마단도 대충 지나가는 무슬림들이 대다수 일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혼란이 오거나 위기가 오면 종교심은 그를 장악한다. 해외에만 나가면 갑자기 애국자가 되는 것처럼.

또 글에 자주 보이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몸의 구별은 차별의 기초다. ...다른 방식으로 성관계를 하는 몸을 구별하고, 이어서 차별한다. 몸의 이분법을 기반으로 남자가 '아니'라면 여자여야 하고, 여자가 '아니'라면 남자여야 한다. 이를 자연법칙으로 여긴다. 이러한 구별은 '강제적 이성애'를 위해 필요하다. 결국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p.22)

그래서 '행복한가요?' 라고 물어보고 싶다.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작가 본인이다.

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순간 순간 괴물이 되는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꽤 괜찮은 여성이었다. 내 인간 본성을 말씀을 통해 냉철하게 직면하며 공동체와 함께 나아갈 때, 내 과거와 현재가 함께 회복되는 사건이 된다.
내가 낳았지만 내 것도 남편의 것도 아닌, 자는 아이를 닳을까 살살 쓰다듬고 가슴의 심장소리를 들을 때, 별빛도 숨을 멈추는 그 시간을 안다면 달라질텐데. 살내를 맡으며 감사가 터져나올 때 그 감동을 안다면 달라질텐데.
'생명'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알 수 없는 신비이다.

문제를 지적하는 거 누구나 한다. 페미니즘 몇 강만 수료하거나 이런 책 몇 권만 읽으면 다 이론가, 분석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늘 빈손이다. 화만 내다 끝난다.

여성 혐오를 해결할 수 있는 '액션'이 뭔가?
난민을 받아들인다면 작가는 어떤 부분에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나?
성소수자의 정의 내려보자. 약 60여 가지의 정체성 스펙트럼이 있는데, (예를 들어 조증일때는 남성, 우울증일때는 여성- 이게 정신병이지 정체성이냐!) 토론하려면 정의 부터 내려야하는데, 본인들끼리도 정의가 안 내려지면서 뭘 어떻게 용기를 내서 환대하라는 건지.

'미친년'은 제자리에 있지 않는다. 계속 움직일 것이고, '나'는 오염되고 변태되어야 한다. (들어가는 말 중에서) -이부분에서 작가를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났다. 그가 얼마나 공허와 어둠에 갇혀있는지. 자유를 찾아 헤매지만 실상은 죄의 노예로 끝없이 고통받아야 하는 그분이 안타까웠다. 나도 '오염','변태' 이런 단어들이 마치 틀을 깨는 자유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만족하고 머물러 있으면 꼴통이 되는 줄 알았다. 맞다. 현실은 썩었다.  머물러 있어도 안된다.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그분의 자녀'는 제자리에 있지 않는다. 계속 움직일 것이고, '나'는 거룩해지고 정결해져야 한다. (서평을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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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시골 살래요! -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 딸의 편지
ana 지음 / 이야기나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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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농자이다.
귀농 후 알게 된 오이 농사짓는 친구가 말했다.
"오이는 여자친구 같애.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조금만 물을 잘못 주거나 약을 잘못 주면 망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사람들은 시골에서 산다고 하면 아이들이 만날 흙 갖고 노는 줄 안다. 천지가 농약이라 맨발로도 못 다니게 하는데.
20년 전 쳤던 농약도 흙에서 채소에서 검출된다.
아이들 마음껏 비 맞히고 진흙탕에서 미꾸라지 잡고 개울에서 멱 감는 시골은 대한민국에 어디일까. 어디나 미세먼지 농도는 비슷하고 산성비를 머금은 구름이 떠돈다. 


귀농의 좋은 것은 나의 한계를 빨리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땡볕 아래 하우스 안에 들어가  일을 할 때 고상한 표현들 철학들 다 집어치우게 된다. 그래서 날것의 나를 만나게 된다.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살다가 포장지를 다 벗겨내니 그냥 '악'으로 존재하는 나. 
그리고 생의 근본적인, 먹을거리를 위해 흙 위에 엎드리면 자연히 겸손해진다.

'돈'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사상'때문에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귀농귀촌자들에게 시골이라는 곳은 또 다른 별이다.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곳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배워야 한다.

책에서는 젊은(?)이가 써서 그런가 신선한 표현들과 시각이 많다. 직접 찍은 사진들과 내추럴한 사투리가 재미를 더한다. 6주 간의 교육은, 연예인이 까르르깔깔 웃으며 실수를 연발해도 끝나면 두둑한 봉투 받는 '체험, 삶의현장!' 처럼 느껴진다.

또 시골의 삶을 낭만처럼만 묘사하지 않고 실질적인 면에서도 예를 들어주었다.  어찌보면 더 무례하고 모순적인 사람들이 도시보다 비율상 많을 수도 있다. 도시 부부가 맞벌이로 바쁘다고 학원으로 돌리는 것 못지 않게 농촌에서도 바쁜 탓에 아이들 얼굴은 명절에나 제대로 마주 보는 것 같다.



이 부분에서 귀촌 선배의 말이 좀 거슬린다.

정직하게 땀흘려 돈 벌겠다는데 고용이 '낙인'인가?


농촌에서 살면 해방같은가? 아닌데... 오히려 구속이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식물들이 내 주인이다. 
주말따윈 잊은지 오래. 하루를 잘못 쉬면 시기를 놓쳐 열흘이 아니라 몇 달을 굶어야 할 지도 모른다. 농삿일에선 매순간이 골든타임이다. 며칠 여행은 꿈도 못 꾼다. 한 나절 잠깐 아이들과 근거리 외출이 그나마도 일 년에 한 두 번 허락된다.
직장상사도 아닌데 참견하는 동네 인간들(?)을 매일 마주해야 하며 아직 살아 퍼덕거리는 가부장의 문화에서, 여성으로서 견뎌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온 동네 할머니가 다 시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책임져야할 아이들까지 있다면, 그 고상한 사상은 흔적만 남을 가능성이 높다. 사상을 위해 유기농농법, 토종종자지킴이를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일부 귀농자들에게는 묘한 자존심이 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행복한 척. 만족한 척. 역귀농은 마치 실패자인것처럼.


작가는 다행히(?) 있는 척, 아는 척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진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시골에 산다는 것과 농사를 짓겠다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판타지와 현실을 구분해서 썼다.

구례에 정착했다는 작가의 시골 생활 제 2권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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