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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나무 imagepress 1
이미지프레스 글.사진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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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쟁이의 동지적 지지와 연대를 보내며...

이렇게 제목을 뽑아놓고 보니 다소 거창하다. 그리고 어딘가 80년대 풍이다. 위의 말들을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한 마디로 촌스럽다고 하는 거다. 촌스럽다는 말이 의미하는 게 무얼까?  '시대착오적'이란 말을 듣기 불편하지 않게 자연스레 탈바꿈시켜 놓은 말일 게다. 언제부터 도시와 촌락이 구별되고, 도시에 비해 촌락이 뒤처진 시대착오적인 공간이 되었을까? 거기엔 아마도 "근대성(modernity)"의 문제가 깊이 개입되어 있을 게다. 근대의 도시 풍경들이 빚어낸 악마같은 소비욕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부(재력)이다. 근대화된 도시의 시민들이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부자되기"로부터 자연스럽게 도태된 이들, 그들이 바로 근대의 풍경으로부터 소외된 촌락민들의 운명이었다.

촌스럽다는 말엔 그런 인물들에 대한 조소가 깃들어 있다. 여기 너무나 시대착오적이어서 촌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웹진 "이미지 프레스(http://www.imagepress.net)"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7년간 인터넷이란 온라인 공간에서 3년간 마당 청소하고, 다시 3년간 빨래하고, 1년간 밥 짓는 악전고투 끝에 하산하여 강호제현(江湖諸賢)들에게 내민 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사진 전문 무크지 "여행하는 나무 - imagepress vol. 01, landscape"이다. 인터넷 공간에 웹진의 형태로 출범한지 어느새 7년이나 되었던가? 이미지 프레스의 편집인이자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의 "책을 펴내며"를 읽는 심정은 마치 제갈 공명의 출사표를 읽는 듯 비장하기 그지 없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비장하게 만들었는가.

<이미지프레스>를 창간했던 1999년을 전후한 우리 사회는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사진 이미지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큐멘터리 사진이 실리던 시사 주.월간지는 수만 부씩의 발행부수를 자랑했고, 많은 사외보가 사진가들의 든든한 '밥줄'이 되어 주었습니다. 거기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이미지프레스> 같은 웹진과 사진가들의 홈페이지들이 속속 등장해, 다큐멘터리 사진의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전환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2005년 봄에는 다큐멘터리 사진 잡지 <지오>가 폐간되었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여전히 잘 나가는데?"하실지 모르지만, 편집권이 없는 한국판 <내셔널 지오그래픽>과는 달리 국내 사진가들과의 활발한 교유를 통해 좋은 작품들을 게재해 온 <지오>의 폐간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본문 4-5쪽>

과연 그랬다. <지오>의 폐간 소식은 월간 <키노>의 폐간 소식 못지 않게 충격이었다. 잡지와 단행본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천재"와 "평범"한 학생 100명의 차이와 같다. 뛰어난 단행본은 우연히 한 명의 천재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으나, 잡지는 천재 한 명이 아니라 평범한 학생 100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를 뛰어난 천재 한 명에게 의지한다고 치자. 그 결과는 한국 스포츠가 지난 독재 체제 아래에서 엘리트 스포츠 위주로 흘러왔던 것과 흡사한 모양새가 될 것이다. 실제로 문화를 즐기는 이들은 없는데, 단지 몇몇 사람들만이 국제 무대에 나가 인정받는 것 말이다. 늘상 하는 이야기지만 한 권의 잡지엔 수많은 이들이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지오>에는 수많은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이 잡지와 관계를 맺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최소한 한 두명은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다. 비록 시작은 평범하였으나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작업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노>와 <지오>의 폐간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한 잡지의 실패, 시장에서의 퇴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많은 영화비평가들, 다양한 이론들, 대중과의 소통, 사진작가들, 사진 작품들, 그들이 빚어낸 독특한 사진의 풍경들이 일시에 거리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잡지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현단계 문화 수준을 적확하게 반영하는 매체이다. 두 잡지의 퇴출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문화 저변이 넓어졌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란 점이다. 영화잡지 <키노>는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던 시기에, 사진잡지 <지오>는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카메라 바람과 더불어 외국의 유명 작가는 물론 국내 사진 작가들의 품격있는 전시회가 성공리에 개최되던 시기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과연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기에 이 사람들은 이토록 비장한 발간사를 준비한 것이 아닐까? "새로운 진지전"을 위해 이들은 새로운 참호 하나를 파고 있다. 스스로 말하길... "그 참호 안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살아남을지, 아니면 또다른 폭탄을 맞고 장렬히 산화(?)할지는 독자들만이 알고 있습니다. 자! 이제 책을 시작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십시오."라며 발간사를 정리하고 있다. 지난 80년대 기동전을 펼치던 사진가들이 장렬히 산화한 뒤, 21세기 현재의 사진가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무크 이미지프레스>는 "여행하는 나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유목민과 농경민의 시선을 결합해보고자 하는 시도일까? '참호'란 진지전을 펼치기엔 너무 불편하고, 승기를 잡아 치고 나가야 할 때는 발목을 잡는다며 짐짓 충고 한 마디 던지려던 찰나에 다시 발견한 부제를 보니 그런 충고를 던졌다간 단단히 창피 받을 각오를 해야할 듯 싶다. 이들은 이미 다 계산해두고 있었던 거다. 이번 무크지의 테마는 "풍경(風景 , landscape)"이다. 한자로든, 영어로든 흘낏 바라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풍경이란 궁극적으론 뿌리없는 자의 시선, 바로 바람의 시선이다.

그러나 사진가의 시선에 붙들린 풍경은 젤라틴 실버프린트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종종 더 좋은 기록 매체들이 속속 출현하는 현실 속에서 사진이란 기록 매체의 미래가 암담하단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사진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찾는다. 카메라의 렌즈 저 너머의 대상은 그저 고정된, 혹은 흘러가는 대상이 아니라 카메라 뷰파인더의 시선과 눈을 맞추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진가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렌즈를 통해 대화하는 자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담긴 대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아낸 자를 함께 바라본다.

카메라는 오랫동안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매체였다.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엔 오랫동안 카메라가 포착해낸 대상이 실재한 대상이란 사실을 꾹꾹 새겨 놓는다. 즉, 사진 인화지에 담긴 풍경은 현존했던 것이란 말이다. 지금은 소멸되었을지라도... 우리의 의식, 무의식 속에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진이고, 그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명이 다하지 않는 까닭이다. "여행하는 나무"는 바로 그런 시선에 대한 상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잡지의 이번 특집은 최근 국내에서 전시되고 있는 <'결정적 순간'의 대가 앙리 카르티에 - 브레송을 추모하며>가 아니라 양수겸장(兩手兼將)으로 포진해 있는 <우리의 풍경> 그리고 <아시아의 풍경>이다. "여행하는 나무의 생각하는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이 잡지를 전달받고 그날 중으로 다 읽고, 다시 또 읽었다. 물론, 현재의 내게서 이 잡지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은 나오기 힘들다. 그 까닭은 이 잡지에 대해 냉정한 시선을 확보할 만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탓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문제들은 지적하고 싶다.(물론, 이런 지적들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지 잘 알고 있다.) 우선 판형의 문제이다. 물론 일반 단행본에 비해 다소 큰 판형이긴 하지만 사진을 주요 콘텐츠로 삼는 책이라고 하기엔 아직도 다소 작다. 다음의 문제는 지질의 문제인데, 무크지인 만큼 시간에 구애를 덜 받는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각각의 사진에 어울릴 만한 다양한 지질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광택지의 사용 문제와 지질의 색깔 등도 적절히 안배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진이 본래의 빛깔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 현재에도 물론 인쇄의 질을 나무랄 수는 없겠으나 인쇄 상태가 좀 더 좋아져야만 한다는 건,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보다 이 책을 만든 이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들의 시대착오적인 도발 혹은 반동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기 바란다.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불행히도 우리들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참호 안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살아남을지, 아니면 또다른 폭탄을 맞고 장렬히 산화(?)할지는 독자들만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죽고 싶지 않다는 절규가 이니겠는가. 종종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뒤적이며 <매그넘> 사진 작가들의 이름을 줄줄이 암송할 수 있는 지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네들이 우리들의 삶, 우리들의 흘러가는 시간을 포착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말은 알량한 민족적 자존심이나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도 말하지 않았던가? 먼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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