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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은 '건축'과 얼마나 가까우신가요?
저는 상당히 먼 편입니다. 이웃이 아니었다면 '건축'이란 단어를 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던 '건축'이 성큼성큼 시야에 들어온 건 순전히 이 책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덕분입니다.
이 책은 대중적 건축 입문서로서, 건축이 벽돌과 콘크리트가 아닌 건축가의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건축가가 우리를 대상으로 주섬주섬 늘어놓은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도록, 말로 이야기를 풀어내 건물을 만들려 합니다.
정말 건물이 잘 빚어질런지, 제 가슴도 콩딱콩딱 합니다.
저자 서현은 '점' 부터 이야기합니다.
하얀 백지에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점 하나를 찍습니다. 그저 점 하나일 뿐인데, 점을 하나 더 찍으려고 하면 이미 위치를 확보한 점이 얼마나 확실하게 공간을 통제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네요. 이미 위치를 선점한 점 때문에 디자인이 대칭으로 흐르기 쉬운데, 그러면 내용은 경직되기 쉽다면서 얘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점과 점, 이렇게 두 개가 되면 영역이 생기고, 영역이 선으로 확대됩니다. 선은 공간에서 담이 되어, '비례'라는 단어로 우리에게 나타나지요.
보기 좋은 비례를 만들기 위한 건축가들의 수많은 노력과 황금 비례이야기는 유럽의 수많은 건축양식이 눈에 잡히는 듯 하게 해주었어요. A3, A4 종이에 담긴 비례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탐구를 보는듯 했습니다.
이렇게 건축의 기초를 풀어쓴 다음 저자는 우리가 흔히 보는 건물을 예로 들어 건축을 이야기해줍니다. 어딘가 뚝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 지금 내 삶이 이뤄지고 있는 도시, 서울이라 더 친근했고 이해가 쉬웠으며 재미있었습니다.
<삼성플라자>
워낙 번잡한 거리에 있어 혼란스러울 법한 이 공간을 보행자에게
개방된 마당으로 만들기 위해 건축가는 굽은 벽을 선택했다지요.
<루스채플>
기둥의 수를 줄여서라도 지붕이 떠 있는 듯 보이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건축
<브릿지증권 사옥>
명동입구에 자리잡은 자신의 위치가 갖는 중요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그런 만큼 개방되어 있습니다
경동교회, 교보강남타워, 그랜드힐튼 호텔, 국립민속박물관, 국회의사당, 금호전기 사옥, 두산빌딩, 로댕갤러리, 명보플라자, 명동성당, 포스틸타워, 코엑스몰, 올림픽 역도 경기장, 포스코센터... 저자가 풀어놓은 건물 중 가장 인상깊은 곳은 <국립현대미술관>이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입구는 산을 향해 나 있어, 관람객은 건물의 모퉁이를 우회해야 한다네요. 안 그래도 먼 길을 과감히 더~ 멀게 만들었다는 점이 건축가의 결단이랍니다.
관람객은 이 길을 걸으며 정말 미술관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는 사이 건축가 의도대로 자연 풍경을 보며 쉬엄쉬엄 걷게 되지요.
그렇게 멀리 돌고 돌아 드디어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섭니다.
그 순간 갑자기 막이 열리고 조명이 켜지고 지휘자 지휘봉이 빠르게 움직입니다. 내가 걸어온 길과 사뭇 다른 웅장한 미술관 자태를 보며 절로 하게 되는 감탄, 이것이 건축가의 의도입니다.
저는 매년 여름 이 곳을 다녔는데 어찌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는지, 건축가 의도와 달리 서비스 도로만 타박타박 걸으면서 왜 이리 멀까! 원망만 했던 기억이 부끄럽습니다.
저자는 <부석사>를 끝으로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건축하는 이들이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로 꼽는 부석사는 이들에게 순례지와 같다고 합니다. 부석사의 위대함은 단지 오래 전에 지어졌기 때문에, 거친 세파를 헤쳐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공간이 이루어낸 가치로 현대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러하답니다.
신라 시대지만 무량수전은 고려 시대의 건물이고 다른 건물은 또 훨씬 후대에 지어졌습니다. 1300년을 이어온 보존과 첨삭이 날줄과 씨줄처럼 교차하는 과정, 그 긴 세월을 관통하는 일관된 마음이 부석사에 있답니다.
그 마음을 저자는 '문득 돌아봄'으로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석사에 가게 되면 느낄 수 있을까요.
천왕문을 나서면 부딪히는 계단, 그 계단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이,
안양문부터 꺽인 길 - '축을 꺽어 놓음'이 가지는 의미를,
잠시 마당에서 숨을 고르며, 문득 뒤를 돌아볼 때 한 번도 짐작하지 못한 산 아래 풍경을 한순간에 내려다보며, 깨달음의 통렬함을 느낄 수 있을런지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믿어봐야겠어요. 정말 믿어야 겠어요.
읽은 날 2013. 4. 11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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