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역사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 배국원, 유지황 옮김 / 동연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신의 역사, 카렌 암스트롱>

 

이 책 제목을 보고 걱정했다. 이 책 <신의 역사>를 읽어야하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나는 세상 지식나무 가지에 달린 열매를 종류별로 가득 담고 싶어하는 채집가인데, 열매가 매달

려 있는 가지, 줄기, 뿌리까지  탐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골치 아픈 건 질색해

하는데, 탐스러운 열매에 대한 호기심이 간혹 이를 넘어서게 할 때가 있다.

 

유달승의 <중동은 불타고 있다>를 읽은 후  시온주의 주장의 근거와 서구가 갖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공포의 기원이 궁금해졌다.

근원적인 대답은 근원이 대답해줄 터, '골치 아파도 어쩔 수 없군' 하는 자포자기 마음으로 이 책

을 읽어나갔다.

 

이 책은 명제로 정리된 종교적 '신념'과   그 명제들을 신뢰하게 만드는 '신앙'과는 구분되어야 한

다며 선을 긋고 시작한다. 시대와 변화를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 표현 불가능한 신의 실재 그 자체

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인류가 아브라함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

가에 대한 내용을 알려준다. 즉, 기원전 4천년전 문명의 발상지였던 유프테라스강 유역을 중심으

로 한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의 역사가 담겨있다.

 

이를 통해 어렸을 때 가끔 가졌던 신에 대한 의문이 유치원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음을 세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어릴 때 친구 손 잡고 다녔던 교회, 그 수준 말이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도록 종교가 유치원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건 종교와 생활과의 간격이 멀

어졌기 때문이다. 갈수록 우리의 대다수는 더 이상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둘러쌓여 살아가

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발달된 과학과 소비시대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물질적, 육

체적 세계에만 관심의 촛점을 맞추라 한다.

내 수준이 이렇다보니, 이 책에서 알려주는 내용, 구절은 모두 몰랐던 내용이다.

 

가령,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한 뿌리라는 점, 기축시대 여러 사상들은 서로에게 영향

을 주고 받으며 생성, 발전되었는데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이 그러했고, 종교를 둘러싼 쉼

없는 논의와 대립이 그러했다.

인간과 교류하지 않던 그리스 철학자들의 신과 인간사에 개입하는 신의 이야기, 반인격신과 인격

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 거대한  흐름을 쓴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17살 때,  옥스퍼드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  7년 동안

수녀가 되기 위해 엄격한 수도회의 규칙과 수련을 견디기도 했다. 비록 25세 경에 수녀원을 완전

히 떠나긴 했지만,  살만 루슈디와 함께 마호메트에 관한 전기를 펴내기도 한 그녀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불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편견 없는 자세가 으뜸이다.

 

그녀가 전하는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의 역사를 보자.

 

초기 종교적 신앙은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서 필수적이면서 자연적

으로 시작됐다.

태초에 신들은  거룩한 무형질의 질퍽질퍽한 황무지로부터 둘씩 출현했으며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은 애초에 없었다. 그리고 신의 실체에서 최초의 인간을 창조했다.

 

'성서'에 보면, 유일신 종교의 시작은 기원전 20~19세기, 가나안에 정착했던 아브라함에서 연유

됐는데, 초기 인간과 친근했던 신과 달리 야웨는 이스라엘인에게 자신의 특별한 백성이 되어 특별

한 효율적인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음을 약속했다.  신과 인간의 계약이 시작됐고  신과 인간의 간극

이 벌어졌다.

 

그 후 기축시대의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야웨는 '유일한' 신으로 등극했다.  동서양을 막론한 새로

운 세계관 출현 속에서 이방종교에 흡수될 위험을 견디고 최초의 유일신, 유대교로 탄생한 것이다.

유대교 탄생에서 보여지는 키워드는 다른 신들에 대한 적개심과 기존 사고방식과의 단절이다.

선지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태도 즉, 다른 신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스라엘인에게 중동

의 신화적인 사고 방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고 당시 주류적 흐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유일신 종교 이전, 고대 다신교가 가진 관용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리잡았건만, 그 후 다신교를 배

척했다니, 현재 기독교 모습이 세삼스럽다. 그들이 말하는 '우상 숭배'의 들키고 싶지 않은 한면을

본 거 같다.

반면, '주류적 흐름과 다른 방향'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념, 철학으로서의 순기능으로 읽을 수 있

겠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다. 초기 기독교인은 예수를 새로운 모세, 새로운 여호

수아,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시자로 받아들였다.  붓다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그 시대 많은 사람의

가장 깊은 열망을 포착했고, 유대인들이 수세기 동안 꿈꾸었던 것을 실체화했던 것 같다.

예수가 죽은 후에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신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분명히 예수는 자신을 신이

라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기원전 6세기 붓다의 죽음은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쳐 4세기 경 '원죄'에 대한 개념이 도입됐고,

예수 안에 신이 성육했다는 삼위일체론이 만들어졌다.  성육신론은 언제나 유대인에게 경악스러

운 일이었다. 보수적인 로마인에게 기독교는 조상의 신앙으로부터 이탈한 불경건의 극악한 죄를

범한 광신자의 종교로 비쳐졌다.

 

기독교는 성육신을 믿으며  종교적 진리에 대한 배타적 개념을 지켜 왔다.  그러던 중 7세기경 새

로운 신 계시를 주장하고  경전을 만든 아랍인 예언자의 등장에  유대인처럼 경악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이 성육신한 유일한 구원자임을 주장하는 기독교 세력이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랍 예언자에 의해 창시된 유일신교 '이슬람'은 놀라운 속도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

역으로 확산되었다.

신의 언어라 일컬어지는 경전, 꾸란 the qur'an(낭송)과  무함마드의 힘은 유대인이 다신교적 고

대 신앙과의 단절을 위해 700여 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을 단지 23년 만에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슬람인을 신의 계시를 받지 못한 야만인이라고 조롱했는데,

그런 그들이 단기안에 이룩한 놀라운 업적에 대한 경외감, 두려움, 아마도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

지는 게 아닐까 싶다.

야만인이라 여겼던 이한테 받은 굴욕감과 두려움이 두고두고 그 원흉이 된 것이리라.

 

이슬람교는 경제적인 성공 속에서 공동체 이기주의와 탐욕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중시

하는데서 시작했다. 어느 종교보다 정치적인 탄생이며, 그러한 경향은 지금까지 어이지고 있다.

 

9세기, 그리스 과학과 철학의 시대의 철학자들은 종교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종교에 덧붙여

있는 원시적이고 편협한 요소를 제거하여 종교를 정화시키기를 원했다. 그들은 알라의 존재를 자

명한 것으로 믿었으며, 알라의 존재가 합리주의 철학 이념과 양립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

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동자'의 존재 증명을 수용해 세계 모든 존재는 발생 원인이 있으며, 그 발

생의 근원인 부동의 동자가 영원불멸의 완전한 존재 자체라 했고,

 

플라톤은,  세계는 신성한 이성을 표현하는 것이고,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정화하는 것에

의해 신성한 것에 참여하고, 일자 一者에게 돌아갈 수 있다며 유출의 논리에 집착했다.

 

이븐시나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신 이해와 <꾸란>의 계시적 신 이해 사이의 절충이 시

도되기도 했지만 결국,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철학적 신 이해는 신비주의적 종교

경험의 신 이해로 급격히 대체되었다.

알 가잘리가 말한   "종교 경험만이 인간의 이성과 지적 능력을 초월해 존재하는 신을 입증할 수

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다."로.

 

또는, 신이 '존재'한다기보다는 '비존재'하며, '현명하기'보다는 '무지하지 않다'는 식으로.

또는, 신은 '무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카렌 암스트롱이 전하는 책 한권으로 오랜 세월 인간이 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모든 흐름을 파

악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제법 굵직 굵직한 줄기를 볼 수 있다.

거대한 흐름을 관장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아마도 이 문구가 아닐까.

 

"만약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탁월한 신앙가들로부터 하늘 위에서 세상으로 강림하

는 신을 기다리는 대신 내 자신을 위하여 신에 대한 감각을 의식적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신이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일캐워 주었을 것이다.

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실재라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불가지론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게 <파이이야기>의 얀 마텔이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라고 했을 때, 뜨끔했다.

내가 불가지론자인가. 아닌가. 얀 마텔에게 참을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데.

 

나는 어쩌면 불가지론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카렌 암스트롱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휴머니즘은 그 자체로서 신 없는 종교인 셈이다. - 물론 모든 종교가 유신론적인 것은 아니다.

현대의 윤리적이며 세속적인 이상은 지성과 감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어서

보다 전통적인 종교들이 한때 가르쳐 주었던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관한 믿음을 찾는 방법을

현대인에게 보여 주고 있다."

 

 

휴머니즘,인문주의,인본주의 그 위대한 시작인 르네상스

 

읽은 날  2012. 3. 19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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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공식 한국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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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이 책, <오래된 미래>는 <총, 균, 쇠>와 세트로 인식된다.

<총, 균, 쇠>에 따르면,  오래 전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지리적 잇점으로  획기적인 농경생활이 성

공했고, 이에 따라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가 시작됐다고 한다. 인구의 증가는 내부로만 향하던 시

선을 외부로 돌리게 했다.

인구가 증가한만큼 부족한 것을 메워야 하는 필요가 생겼다. 그리고 인구가 증가하면, 증가된 자

(토지, 노동력 등)을 독점하는 권력자가 생기기 마련인데, 이 권력욕 또한 외부를 향한다.

이러한 필요와 권력욕이 자신들의 주변부를 탐색하게 하고 차차 범위를 넓히게 했으리라.

애초에 '인구'가 증가하지 않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이 책, <오래된 미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헬레나 호지가 1975년 언어 연구를 위해 인도 북부 작은 

마을 라다크에 들어갔다가  빈약한 자원과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지혜를 통해 천년

이 넘도록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온 라다크가  서구식 개발 속에서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 역시 라다크에 머물면서 '규모'라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규모든 인구

든, 우리네의 시골 마을을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구가 적은 호젓한 시골 마을, 마을 사람들은 대개 옆집 대소사는 물론 숟가락, 젓가락 수까지

훤하다. 반면, 인구나 넘쳐나는 대도시는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심지

어 옆집 사람이 죽어가도 모를 수 있다.

 

이 차이는 아마도 대가족제도와 작은 규모의 공동체 생활일 것이다.  자녀를 키워보면,  대가족

제도의 장점을 넉넉히 느끼게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엄격함과 단호함으로 대한다. 우리아이들

이 종종 느낄 것 같은 답답함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넉넉한 품으로 자주 해소되곤 한다. 아이들

이 부모에게 통하지 않는 떼를 가끔 할머니한테 부릴 때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는데,

"에미하고 할미하고 같으니?"

이 말은 내가 들어도 절로 미소가 나는 말이다.

 

각자 사생활이 침범당할 것 같은 위치에 다닥다닥 이웃이 위치해 있다. 소통해야 하는 이웃수가

많고 어디까지 이웃으로 그어야할지 모르는 애매함 속에 피곤함이 자리잡는다.

애매함과 피곤함이 '작은 규모의 공동체 생활'로 위치가 바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의 말대로 대가족제도와 작은 규모의 공동체 생활이야말로 성숙하고 균형있는 인격이 만들어

지는데 훌륭한 기초를 형성하리라 생각한다.

대가족의 넉넉함과 공동체의 관심,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일수록 상황을 조절할 줄 알고 어떤 상

황에서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빈약한 자원과 혹독한 기후 속에도  대가족제도와 작은 규모의 공동체 생활로  사랑, 존중, 우정,

행복을 누리며 살았던 라다크에 어느 날 개발의 바람이 불어닥친다.  개발은 사람들에게 인위적

인 결핍감을 느끼게 했고 그 결과 구성원 사이의 경쟁의식은 더욱 커졌다.  사람들은  서구식 모

델을 표준으로 삼아 모든 행동과 사고를 그에 맞게 따르라는 압박을 받는다. 강요된 서구 이미지

를 추구함에 따라 자신의 고유문화와 뿌리를 부정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게 된

다.

 

600년이 넘도록 마찰 없이 공존해왔던 다수의 불교도와 소수의 이슬람교 사이에 갈등이 고조된

다.  서구식 경제개발 속에 두 집단은 싸움을 시작했고,  상대방 주택에 폭탄을 던지는 등 생명을

빼앗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업화로 많은 사람들의 성향이 더욱 경쟁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감에 따라,

그런 성향들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 치부해버리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탐욕과 이기적인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 산업화로 인해 사람이 소외된 현상인 것이다.

 

라다크에 불어닥쳤던 개발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지금은 '라다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 운동을 통해 라다크가 오래되었으나  우리의 '미래'가 되기를, 저자인 헬레나 호지와 함

께 희망해본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우리가 지금 시급히 해야 하는 일은 농업 자체에 그에 합당한 권위를 복원시킴으로써 앞서 언

한 추세를 반전시켜야 하는 것이고 또 농업을 정식 직업의 위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일이다.

수출을 위한 환금성 작물 재배 대신  지역 소비용 식량 생산의 비중이 증대되고  그렇게 생산된

물들이 정부지원하에  구축된 운송체계를 통해 원격지로부터 유입된 작물들과 경쟁하지 않아

되고, 또 대단위 농장이나 기업형 농경을 위한 자본집약적 농업설비 대신 지역의 조건에 맞는

규모 농업기술에  더 많은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영세농의 수익에서  생태학적 측면에서 더욱

강한 재래식 영농 방법으로 이전된다면 농부들은 더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인류가 오래 전 경작을 하며 정착했던 소박한 시대,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지만 땅을 경작

하는 일에 합당한 권위를 복원시킨다면,  산업화로 훼손된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헬레네 호지의 대안을 보니 <88만원 세대>가 생각났다.

우리 사회의 현실인 88만원 세대를 위해 우석훈, 박권일이 제안한 것 중 '농업 공무원'이 있었다.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농업공무원의 일거리를 주어 농업을 정식 직업의 위상으로 끌어올린

면, 추세가 반전되고 지역 소비용 식량 생산이 증대되고...선순환이 되지 않을까.

화려한 스펙, 높은 눈높이와 진정한 땀의 가치...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오래된 과거를 미래로 끌어올리는 꿈을 가져보자.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라다크의 평화, 뿌리깊은 자기 존중, 사랑과 우정이 크게 와닿았다면, 우리는 충분히 꿈을 꾸고

실현,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읽은 날  2009. 8. 1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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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주경철 지음 / 사계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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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역사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주경철>

 

고전.

고전은 하나의 콤플렉스다.  읽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항상 위시 리스트에 고전 한 두 권쯤 담아놓고 언젠가....를 고대한다.

내게 <논어>도 늘 그런 책이다.

일찍이 송나라 유학자 정자의 말은 <논어>를 쉽게 펼치지 못하게 한다.

"<논어>를 읽지 않았을 때도 그저 그런 사람이요, 읽은 후에도 그저 그런 사람이면 곧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예전 박경리의 <토지>를 읽은 첫 소감은 이랬다.

"누구든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역시 힘든 모양이다."

100여년 긴 세월이 바탕이 된 그 소설에서 최서희가, 김길상이 그 성품으로 지금 시대에 살았다

면 어땠을까. 나는 그 시대에 어떤 인물로 오버랩 될까...싶은 것이 시대의 한계에 묻힌 인간상이

첫 화두였다.

그러하기에 고전은  텍스트의 문맥과 함께  그 시대의 배경을 이해해야만  더 받아들이기  쉬울지

르겠다. 단순히 텍스트의 이해가 '고전'의 빛나는 명성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물론,  시대의 배경과 상관없이 100년, 1000년 이상 살아 남은 책이 가지는 위용도 흠모해야 하

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의 장점은 매우 뛰어나다.

문학 속에 나타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줌으로써  역사와 문학 상호 간에 넘나듬이 매우 신선할

뿐만 아니라 어렵게 느껴졌던 고전을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역사는 '흑사병'이다.

흑사병의 발병은 중앙아시아였는데, 1346년 킵차크한국의 통치자가 흑사병이 몽골군을 습격하

자 남은 병사와 함께 철수했다. 이때 통치자였던 야니벡이 공성기(캐퍼필드)를 이용해 죽은 시체

들을 성 안으로 날려보내고...그 성 안에 있었던 제노바 상인들이 1347년 자유를 되찾아 고향으

로 귀국했을 때 감염된 쥐와 병균이 함께 들어갔을 것이라 한다.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인간 사회가 거의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보카치오

의 <데카메론>은  생의 의미를 다시 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다.  추상적 사랑뿐만이 아닌 육체적 사랑이든 정신적 사랑이든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 위안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을 뿐이라는,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이 새

운 세계를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 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도 몇몇 고전과 함께 늘 읽고 싶은, 읽어야 할 고전이기만 했

다. 그가 <월든>뿐 아니라 <시민의 불복종>도 썼다는데 그가 쓴 문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다. 즉, 이 매사추세츠 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

름을 댈 수 있는 열 사람이,  아니 단 한 명의 정직한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를 그만두고 실제로 노

예 제도를 방조하는 입장에서 벗어나며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놀라운 한 사람이 힘을 보여준 그가 속했던 시대적 배경을 보니  그의 비장함과  지향하는

가치가 더 빛나 보였다.  그 시대적 배경은 다름 아닌  미국과 멕시코와의 전쟁이었는데,  얼마 전

하워드 진, 레베카 스테포프의 <살아있는 미국역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역사였다.

 

앞으로 고전은 계속 읽을 것이다. 읽어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고전을 읽지 못함에 대해 예전만큼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을 것 같다.

고전이 가지는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와 자혜를 알기 쉽게 알려주는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요, '당

대의 언어'로 쓰여진 당대의 책만이 주는 알기 쉬운 지혜와 가치를 즐겨도 좋을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한문이나 중국어보다 그리고 우리네 조상들이 19세기 이전까지 써오던

말보다 훨씬 더 영어에 가깝다 하지 않았나.

 

푸시킨의 <대위의 딸>, 스탈 부인의 <코린나-이탈리아 이야기>의 배경이 된  혁명을 보며 궁금증

이 생겼다.

무릇 혁명이 성공하려면 어떤 것이 탄탄해야 하나?

혁명의 성공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또, 성공한 혁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 궁금증에 답해줄 책을 언젠가 만나겠지만, 저자의 또 다른 책 <문화로 읽는 세계사>를 먼저 만

날 것 같다.

저자 주경철이라면, 세월을 뛰어넘는 가치와 지혜를 이해하기 쉬운 당대의 언어로 만나게 해 줄것

같다.

 

읽은 날   2012. 6. 1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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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네모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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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데스몬드 모리스>

 

사람은 사람이다.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이다. 신을 닮은 존재이다....

태어나 이렇게 학습했고 주위도 이런 시각 일색이었다.

어린 시절, 온 세계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절, '사람도 동물이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놀라 펄쩍 뛰곤 한다. 어떻게 사람이 동물과 같을 수 있냐며 손사래를 친다. 그 후 학교를 통

한 학습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문화, 역사, 과학 속에만 존재할 뿐 46억년 지구 생물체 중 '하

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구를 거쳐간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가 아닌, 지금 현재 유일

한 존재 '하나'가 익숙한 개념이다. 신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책 <털없는 원숭이> 는 사람이 동물임을, 46역년 지구 생물체 중 '하나'임을, 그리고 우리

또한 지구를 거쳐가는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임을, 그리고 언젠가 지구에서 사라질지도 모르

는 유한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이건만, 이 책이 출간됐을 때(1967년) 파장은 매우 컸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털 없는 원숭이>가 판매 금지되었고, 교회는 이 책을 몰수해 불태

웠다. 인간 진화론은 조롱 거리가 되었고, 이 책은 소름 끼치는 악취미의 농담으로 여겨졌다.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종교적 선전물이 홍수처럼 나에게 밀려 들어왔다.

나는 종교적. 성적 금기를 깨뜨렸을 뿐 아니라, 인류가 선천적인 강력한 충동에 지배를 받는

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을 짐승처럼 만들었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이 책의 장점은 유인원, 진화.....교과서에서나 보는 딱딱한 단어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듣기

편한 이야기를 해준다는 점이다.

 

우리 털 없는 원숭이는 곤충을 잡아먹는 원시적인 식충류에서 출발해 일부는 초식동물이 되

고 일부는 곤충 외에 먹을거리를 넓혀갔다. 유인원 단계에서 숲은 나무와 풀이 우거져 안락

고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어 그들에게 에덴 동산이었다.

그러나, 기후 변동으로 약 1500만년 전 숲이 크게 줄어들자 일부는 숲 속 요새를 고수하거나

일부는 숲을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성공이었다. 대성공을 이끈 밑바탕에는 뛰어난 '두뇌'의 힘이 매우 컸다.

다른 종보다 이미 크고 발달한 두뇌를 가졌고, 갑자기 숲이 아닌 지상에서의 암담한 현실에 맞

닥뜨렸으나 필요는 두뇌를 더 발달시켰고.......

급기야 그는 정말로 에덴 동산을 떠났고 생물학을 벗어나 문화의 영역으로 일찌감치 들어왔다.

 

데스몬드 모리스는 이 외에도 '가능한 한 섹시하게' 편을 통해 사람이 한 쌍의 암수관계를 강화

하기 위해 진화한 얘기를 해주고 있다. - 이 모든 것이 단지 암수관계 강화만 위한 것이라 보기

엔 거부감이 있지만 -

"입술, 귓볼, 젖꼭지, 젖가슴과 생식기처럼 분화한 신체기관에는 말초신경이 풍부하게 분포되

어 있어서 성적 자극에 극도로 민감하다. 사실 귓볼은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서만 진화한 것처

럼 보인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앞으로 툭 튀어나온 통통한 코도 해부학자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독특하고 신비로운 신체기관이다. 해부학자들은 코를 '기능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군살의 일

종'이라고 불렀다."

 

이 외에도 동물과 다른 감각기관 및 신호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못 흥미롭다. 사람의 겨드랑이와

생식기에 냄새 분비샘이 집중되 있는 이유에 이르면, 누가 내 독서를 지켜보고 있을지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때로는 서사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이 책의 주제는 시종일관 동일하다.

우리는 웅대한 사상과 오만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우리도 한갖 동물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으며, 우리는 생물학적 통제를 초월해 있다는 기묘한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경향이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흥미로운 동물들이 과거에 수없이 멸종했듯,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조만간 우리는 사라질 테고,

다른 동물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우리는 자신을 생물학적 표

본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읽은 날 2009. 7. 28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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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한국사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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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한국사,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학창시절 국사가 세계사가 그닥 재미있지 않았던 건 변하지 않는 과거

사실만 나열해 배웠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과거의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찾지

못했기에 그저 암기과목으로 받아들였던 거 같다.   때로는 국가가 가르치고 싶어하는 사실만

배웠기에 주체적 역사관을 갖기도 어려웠을 테고.

 

학교 밖, 책을 통해 만나는 역사는 역사가에 따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조망할 수 있게 해주기에 읽을수록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이 책 <밖에서 본 한국사>는 역사 에세이란 부제로 '밖에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고 국가보다

'민족'차원에서 서술했다는데, 솔직히 그 차이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하

고 있는 우리의 화이부동 和而不同 전통은 매우 인상깊었다.

 

그가 말하는 한민족은   '한반도에 농업국가를 이루고 살아오면서 형성된 민족' 이다.    원류는

만주의 선진문명을  수백 년 시차를 두고  받아들이는  후진지역으로  시작했다.     청동기시대

만주와 한반도에  알타이어계 언어를 가진  수많은 종족집단 중  대부분은   중국문명에 흡수된

반면, 한민족은 궁극적 정체성을 지켜왔는데  그 정체성의 바탕이  바로 화이부동이라 한다.

즉,  중국문명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또한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던 것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

라 한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고구려.  학교에서 배운대로  고구려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흐름에 있는 우리의 고대국가로 다른 나라가 설 틈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를 계승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란다.  신라는 당시 제 코가 석자였기에  고구려의

작은 영토와 백성의 일부만 넘겨받았던 반면,  중국 (당시 당나라)은 고구려의 핵심요소를 계승

받았다.  그러나, 신라는 작게 계승받은 고구려를  반도국가 (고려)로  크게 발전시켰고,    크게

계승받은 만주지역은 뒤쳐져 야만의 땅으로 전락했다.

 

그 후 고려시대.   몽골이 유라시아를 휩쓸던 때   고려처럼 작은 나라가 30년 동안이나 버티고,

그 후 100 여년 간 몽골 지배를 받았지만,   한편으로 문명수준을 높여  적응력  강한  정체성을

만든 기회로 삼은 것 역시 화이부동의 전통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조선 건국자들이 문명수준이 높은 중국과의 관계를 풀기 위한 답으로 '사대'를 내놓았다. 이는

힘에 눌려 억지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천하질서에 능동적으로 공헌한다는 명분으로 약자

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고, 강자는 약자의 태도가 일시적 득실에 따라 바뀌지 않으리라 신뢰할

수 있는 길이었다.

우리가 하대했던 '사대주의'는  19세기 말 일본이 조선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청나라와의 관계

까지 폄하하려는 그네들의 나쁜 관념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화를 열심히 한 우리는  독립국으로 남아 있지만  거부한 지역들은  정복당했는데,

이런 모순된 상황이 바로 '화이부동'의 원리 탓이다.

중국문명에  동화되지  않은  곳은 '정복'의  대상이었고, 동화수준이  높은 곳은 안정된 관계를

자발적으로 추구해 위협으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동화란 단어는 불편하다.  우리가  가장 높은  문명국이  아니었다는 세삼스런 자각,  단지

살기 위해 같아지려 노력했다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대신  동화란  단어를 '변화'로  치환하면

훨씬 수용이 쉬울 것 같다.

거대흐름의 변화를 외면한 채  자신의 고고함만을 지키려 하면  부러지거나 꺽히기 쉽다.  변화

흐름 속에 자신의 것을 추구해야만 온전하게 살 수 있다.

이러한 우리의 전통이  어느날 갑자기  해방을 맞아,  그동안  부끄러움의  대상 속에  같이 묶여

있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전통을 찾아야 할 때다.

새로운  흐름이  겹쳐지고 있다.  시장  만능의  경제통합이  대다수  인류에게  바람직한 상황을

가져다 줄 것인지  의심되는 거대한 변화 속에  매몰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우리의 정체성 -

화이부동을 찾아야 할 때다.

남을 깔보지  않으면서도  우리 뿌리에서  아낄만한 미덕을 찾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우리의

떳떳함을 잃지 않는 '교양'의 정신, 서로간의 경쟁보다 '협력'을 해간다면 온전히 찾아지리라.

 

신영복 선생님의 작품

 

읽은 날  2011. 11. 3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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