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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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나의 반항심과 나의 얼뜬 거리 배회를 꾸짖었는데, 이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의 거리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언젠가는 어머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렴풋하게 감지하였다. 아무튼 어머니와 어머니가 속한 계급, 그리고 나 자신이 속한 계급을 거부하고자 하는 감정—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감정은 따지고 보면 그런 척하는 감정이었지만—은 어느 거리에서 창녀에게 말을 거는, 그 어떤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드는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 벤야민, <거지와 창녀>,《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1, 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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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스에게 유년의 기억을 촉발하는 첫번째 매개체는 ‘시체’다. 한때 그의 삶을 지배했던 친구들 3명의 시체. 가족보다 친밀하고 연인보다 편안했던 친구들, 다음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굳이 그들의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되는, 내 몸 같이 가까운 친구들의 시체. 그들의 시체는 지울 수 없는, 언제나 예고도 없이 불 현듯 뒤통수를 가격하는 추억을 폭발시키는 첫번째 매개체다. 친구들의 훼손된 시체는 마치 미래의 내 자신의 시체를 유체 이탈하여 나 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그 추악한 시체들은 역설적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유년시절을 상기시킨다.
그 유년의 추억이야말로, 사실상 어린 시절의 추억 이외에는 더욱 아름다운 무엇을 가지지 못한 누들 스가 평생 유령처럼 죽은 기억들의 묘지 주변을 배회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리고 그 아픈 유년의 추억은 누들 스를 더욱 매혹적인 갱스터 무비의 ‘안티 히어로’로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묘사하는 어린 시절은 소름끼치게 생생하고 가혹하게 아름답다. 그 처절한 아름다움에 감염된 관객들은 영화 속 캐릭터와 자신을 가르는 거대한 시공간의 거리감을 지운 채, 누들스와 그의 친구들이 겪은 일들을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생생한 고통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어린 시절은 누구나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유년의 아픔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자라난 관객들에게는 결핍된 ‘뒷골목의 추억’을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처럼 공유하게 만든다. 이렇듯 관객에게 단지 ‘타인의 삶을 엿보는 쾌락’을 넘어 관객에게 ‘부재하는 추억’조차 창조하는 힘, 겪지 않은 사건마저 자신의 기억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영화라는 장르의 매력이기도 하다. 스크린을 통해 경험한 추억을 마치 자신의 추억인 양 생생하게 아파하게 만드는 영화의 감응력.
누들스는 죽은 친구들의 끔찍한 시체를 통해 단지 유년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이미 와 있는 자신의 죽음’을 본다. 그는 침묵하는 시체를 통해 자신이 통과해온 고통의 시간들이 뿜어내는 아우성을 듣는다. 그래, 나도 너희들처럼 고독하고 초라하게 죽어가겠지. 너희들도 나처럼 그렇게 매일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었구나. 그는 친구들과 함께 걸어왔던 시간들, 그들과 함께 꿈꿨던 사랑과 우정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온 과정이 자신의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으로부터 매일매일 멀어지는 것, 그것이 삶이며, 그 끝에는 철저히 혼자 치러내야 할 죽음의 고통이 놓여 있다. 누들스는 친구들의 ‘시체’를 통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인생에 얽히고설킨 자신의 삶을,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자신의 죽음을 본다. 가정과 학교의 보호와 통제가 아닌, 브룩클린 뒷골목의 떠들썩한 혼란이 곧 영혼의 안식처였던 그들. 누들스는 자신을 키워온 8할이 그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뉴욕의 거리 한복판이었음을, 누들스와 친구들의 영혼의 태반은 가정이나 학교가 아니라 바로 그 뉴욕의 뒷골목이었음을 떠올린다.
돌아온 탕아 누들스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뉴욕의 뒷골목은 아이-누들스가 어른-누들스에게 송신하는 기억의 콜라주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왕복했던 저 닳고 닳은 뉴욕의 뒷골목은 이제 누들스에게 마치 잃어버린 첫인상처럼 다시 써진다. 그것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며 기억을 끊임없이 다시쓰기 함으로써 삶 자체의 내러티브가 변형되는 체험이다.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외부적 사건의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무의식의 두터운 각질을 뚫고 기어이 솟아오르는 쓰라린 기억의 염증이 ‘현재의 나’를 매번 다시 규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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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유년 시절 기억의 복잡한 그물망과, 특히 ‘무의지적 기억(순간적인, 무의식적인 기억)’ 개념은 벤야민의 자전적 저작에 영감을 주었다. 그 기억들은 현재의 감각이 잊고 있던 과거의 경험을 갑작스러운 연상 작용과 인상을 통해 상기시켜주는 알기 어려운 깨달음의 순간에서 흘러나오며, 이 기억들은 또 다시 잊힌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홍차에 찍은 마들렌의 향과 맛, 다양한 꽃들의 향기와 같은 순간적인 자극들은 오랫동안 잠자던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깨워 사랑과 슬픔들을 만나게 한다. 벤야민의 베를린 에세이는 과거와 현재, 어른과 어린아이를 유사하게 섞어 엮는다. (……) 벤야민의 글들은 유년시절의 잃어버린 시간 뿐 아니라 대도시의 감춰진 균열들까지 찾으려 한다.
- 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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