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7.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4)

   
 

 이야기는 참으로 오래된 소통 형식이다. 이야기는 정보처럼 순수한 사건 자체를 전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말하는 사람의 삶 속에 뿌리박혀 듣는 사람의 경험으로 전달된다.
 -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 중에서

 
   





   누들스는 이 도시가 버린 모든 것의 상징이다. 이 도시가 내동댕이친 모든 허섭스레기들이 누들스를  키운 문화적 자양분이었다. 그는 거지와 매춘부와 소매치기와 넝마주이와 조직폭력배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났고, 그들 모두의 버려진 삶이야말로 누들스가 매일 등교했던 ‘내면의 학교’였다. 이 내면의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라는 점에서 누들스와 맥스는 서로 통했지만,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누들스는 맥스에게 돈가방과 데보라와 친구들 모두를 빼앗김으로써 여전히 ‘세상 바깥’에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 반면 맥스는 자신의 존재를 구성한 저 버려진 삶들의 흔적을 깡그리 청산함으로써 그의 토양이었던 ‘뒷골목’의 삶을 버렸다. 그는 뒷골목 소매치기 소년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누구보다도 먼저 도착했다. 누들스는 이 도시가 버린 모든 것들을 대변하는 존재였고, 맥스는 이 도시가 버린 존 재들의 약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이 도시의 화려한 중심이 되었다. 맥스는 마침내 ‘버려진 자’가 아니라 ‘버리는 자’로 등극한 것이다.  

 



   노인이 되어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온 누들스는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친구도, 연인도, 재산도. 이 모든 것이 누들스의 어린 시절에 이미 결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 절의 몇 가지 결정적인 기억들은 그의 성격과 그의 인생 전체를 집약하는 선명한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누들스가 잔꾀를 부려 신사에게 훔친 시계를 맥스가 가로채버린 것. 그 후로 누들스 는 번번이 맥스에게 자신이 이룬 것들을,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도둑맞는다. 친구도, 연인도, 재산도, 그리고 성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까지도. 누들스는 평생 그의 인생 전체를 맥스에게 도둑맞은 느낌으 로 살아가게 된다.

   두번째 에피소드는 데보라와 누들스가 생애 첫 키스를 나누던 황홀한 순간, 맥스가 누들스를 불러내 ‘어둠의 세계’로 이끄는 장면이다. 아가서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시로 만든 데보라의 사랑스런 고백이 끝나고 수줍은 키스가 시작되자, 맥스가 누들스를 불러내 갱단의 패싸움에 끌어들인다. 데보라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한다. “가봐. 네 엄마가 부르잖니.” 패싸움에 끼어들어 피투성이가 된 누들스에게,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데보라의 마음은 굳게 닫혀버린다. 누들스는 맥스의 우정에서는 왠지 기분 나쁜 배신의 냄 새가 느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맥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누들스가 데보라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려 할 때마다 맥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발걸음을 저지하고, 누들스를 검은 유혹 속으로 초대한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안타깝게 재회한 누들스와 데보라의 로맨스를 방해한 것도 맥스였다. 어른이 된 데보라는 마치 익숙한 장면이라는 듯이 어린 시절 자신의 대사를 반복한다. “가봐, 네 엄마가 부르잖니.”   

 



   세번째 에피소드는 곡물창고 속에서의 애절한 사랑 고백이다. 그날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사랑보다 더 큰 것을 원하는 데보라의 야망은 둘을 매번 갈라놓는다. 데보라와 누들스는 서로 사랑하지만, 성공을 향한 데보라의 열정과 누들스의 반복되는 불운은 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어린 시절 데보라는 이미 누들스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는  더럽고 초라하고 가망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사랑스럽다고. 하지만 너는 시시한 불량배가 될 것이 뻔하고, 그런 너는 결코 내 사랑이 될 수 없을 거라고.   

   평생 누들스는 데보라를 갈망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다. 널 사랑하지만, 난 너의 것이 될 수 없어. 데보라는 홀로 춤추는 자신의 자태를 훔쳐보는 소년의 빛나는 순수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본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는 누들스의 순수와 맥스의 야망이 공존한다. 데보라는 마음으로는 누들스에게 끌리지만 맥스가 약속하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아가서를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한 그녀의 사랑 고백은 순수와 허영이 공존하는 그녀의 내면을 담아내고 있다. (괄호 안의 대사는 그녀가 아가서에 ‘변화를 준’ 부분이다.) 
   

 

   
 

 내 사랑 그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그의 살결은 순금처럼 빛나고
 그의 뺨은 석류를 쪼개놓은 듯 불그스레하구나.
 (비록 그는 작년 12월 이후로 목욕이라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비둘기의 눈처럼 빛나고
 그의 몸은 상아처럼 보얗고
 그의 다리는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처럼 탄탄하구나.
 (물론 그의 바지는 너무 더러워서 난리가 났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스럽구나.
 (그렇지만, 그는 별 볼일 없는 양아치일 뿐. 그는 내 사랑이 될 수 없으니 안타깝구나.)
 -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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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와르 2010-06-22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니퍼 코넬리가 성경을 낭독하면서 자기식 코멘트를 살짝 얹어주는 센스. 정말 멋졌죠.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ㅋㅋ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vs 발터 벤야민 ⑥
 

  6.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 (3)

   
 

한때 파스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는 사람만큼 불쌍하게 죽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의 경우에도 이 말은 그대로 해당될 것임에 틀림없다. 단지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기억은 상속자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1, 183쪽.

 
   



   누들스의 기억을 촉발하는 세번째 매개체는 ‘돈가방’이다. 도망 중이던 그가 기차역에서 찾아가기로 했던 돈가방. 그 안에는 그의 인생을 걸고 벌였던 커다란 도박판의 승리를 증명하는 돈다발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미래를 보장해줄 것으로 믿었던 그 돈가방에는 마치 그의 꿈을 조롱하듯 철 지난 신문뭉치 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돈다발을 가져가버린 것은 둘도 없는 친구 맥스였고, 그 돈가방을 통해 누들 스가 쟁취하고 싶었던 것은 데보라였다.

  누들스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누들스의 초라한 신세를 혐오했던 데보라에게, 누들스는 보여주고 싶었다. 멋지게 성공해서 너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된 바로 그 모습을. 텅 빈 돈가방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비전 은 산산이 박살난다. 도둑맞은 돈가방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처절했던 실패와 상실의 기억이다. 이제 누들스는 기억의 창고에 꼭꼭 숨겨놓았던 어린 시절의 비밀을 도저히 품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저 생생한 기억의 매개체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의 사슬을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벤야민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고 북적이는 거리 위에서, 버려지고 숨겨지고 지워져가는 모든 흔적들 속에서, 문명을 탄생시킨 생성의 힘을 보았다. 무엇이 쓸모 있고 무엇이 쓸모없는가를 구분하는 분별지 가 없는 아이들처럼, 벤야민은 ‘쓸모’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물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는 ‘길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길을 잃는 기술’을 연구했다. 목적지를 향해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친숙했던 모든 것조차 낯설게 만들 수 있는 ‘방황의 기술’을 연구했다.  

 



   진정 길을 잃어버린 산책자는 어린 아이의 눈으로, 마주치는 모든 사물을 향해 새롭게 말을 걸 수 있는 눈빛으로 거리를 바라본다. 사물의 쓸모를 ‘읽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사물에게서도 이 도시를 탄생시킨 욕망의 비밀을 해독해낸다. 이렇듯 ‘창조적으로’ 방황하는 산책자에게 길 잃기는 패배가 아닌 또 하나의 성취가 된다. 아마 벤야민이 길을 걷다가 자신의 고향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누들스를 만났다면, 그는 누들스의 눈동자에서 스며 나오는 방황하는 산책자 특유의 눈빛을 읽어내지 않았을까. 누들스는 이  도시가 제공하는 모든 ‘먹이들’에서 자유로워지자, 즉 이 도시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자, 비로소 이 도시를 이끌어 온 생성의 에너지를, 나아가 이 도시의 부랑아들(누들스와 그의 친구들)을 관통해온 욕망의 비밀을 알 것만 같다.    

 

 

   
 

 벤야민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현대적 질서 형식이 조용히 보이지 않게 만들려는 이들의 경험들, 즉 ‘주변현상’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조롱의 대상들은 구출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배회하는 산책자, 자의식에 넘치는 댄디(멋쟁이), 소리치는 거지, 고통받는 매춘부, 비참한 넝마주이 같은 주변적이고 천대받는 군상들이 벤야민의 도시 기록에 담겨 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은 보이게 되며, 벙어리는 말을 하게 된다. 벤야민의 도시 현상학은 가장 기괴하고 멸시 받은 사례들의 연구를 통해 현대성의 경험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 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 효형출판, 2005,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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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⑤

   5.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 (5)


   
    나타나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지는 요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거의 없다.
 - 발터 벤야민, <겨울날 아침> 중에서
 
   



 
   이제는 그만 둔감해질 때도 되었는데.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주 사소한 자극이 다시금 옛 기억을 건드리기만 해도, 간신히 봉합해놓은 영혼의 상처는 불현듯 속절없이 파열되고 만다. 내가 가장 순수했을 때, 어떤 배신과 굴욕에도 영혼의 관통상을 입지 않았을 때. 바로 그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그 이후의 어떤 화려한 추억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세상 하나뿐인 맨 처음의 아름다움. 온몸 구석구석의 촉각이 유독 한 사람의 눈길과 한 사람의 손짓에만 반응하던 순간들.   
 



   어지러운 인파 속에 그 사람이 섞여 있을지라도 가위로 오려낸 듯 오직 그 사람의 실루엣만이 도드라 져 보이던 순간들. 입김조차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그 사람이 서 있어도, 그 사람이 바로 옆에서 나를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한 없이 먼 곳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듯한 안타까움. 아마 이런 지독한 사랑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들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턱없이 늙어버린 누들스의 잠든 의식을 강타하는 두번째 매개체는 낡은 벽 위에 붙은 포스터들이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공연 선전 포스터. 이제는 남의 여자, 아니 한때 가장 사랑했던 친구의 아내가 되어버린 데보라의 공연 포스터. 어수선한 잡동사니로 가득한 곡물창고에서 스스로 조명과 음악과 연기와 연출을 모두 담당한 멋진 발레 공연의 주인공으로 당차게 빛나던 소녀. 누들스의 첫사랑 데보라는 어느새 뉴욕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스타가 되어 있다.
 



   그러나 누들스에게만은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그녀만의 숨은 얼굴이, 그녀의 화려한 메이크업 속에 숨겨진 그녀의 그늘진 삶의 흔적이 보인다. 오직 둘만이 알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은밀한 첫사랑의 추억들. 그녀의 살구 빛 입술이 내 입술에 처음 닿던 그날. 내 남루한 옷차림과 꾀죄죄한 몸뚱아리조차 천상의 아름다운 시구절로 예찬하던 그녀의 입술 모양을 낱낱이 기억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이다.
 

 

   
 

     
삶이라는 책 속에서 추억은 마치 자외선처럼 본문의 난외에 예언으로서 적혀 있던 보이지 않는 글자를 각자에게 보여준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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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6-1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원, 요정, 기억, 삶..... 뭉클한 하루.....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④ 

  4.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1)

 

   
  나의 어머니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나의 반항심과 나의 얼뜬 거리 배회를 꾸짖었는데, 이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의 거리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언젠가는 어머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렴풋하게 감지하였다. 아무튼 어머니와 어머니가 속한 계급, 그리고 나 자신이 속한 계급을 거부하고자 하는 감정—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감정은 따지고 보면 그런 척하는 감정이었지만—은 어느 거리에서 창녀에게 말을 거는, 그 어떤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드는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 벤야민, <거지와 창녀>,《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1, 21쪽.
 
   

 


 


  누들스에게 유년의 기억을 촉발하는 첫번째 매개체는 ‘시체’다. 한때 그의 삶을 지배했던 친구들 3명의 시체. 가족보다 친밀하고 연인보다 편안했던 친구들, 다음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굳이 그들의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되는, 내 몸 같이 가까운 친구들의 시체. 그들의 시체는 지울 수 없는, 언제나 예고도 없이 불 현듯 뒤통수를 가격하는 추억을 폭발시키는 첫번째 매개체다. 친구들의 훼손된 시체는 마치 미래의 내 자신의 시체를 유체 이탈하여 나 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그 추악한 시체들은 역설적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유년시절을 상기시킨다. 

 



   그 유년의 추억이야말로, 사실상 어린 시절의 추억 이외에는 더욱 아름다운 무엇을 가지지 못한 누들 스가 평생 유령처럼 죽은 기억들의 묘지 주변을 배회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리고 그 아픈 유년의 추억은 누들 스를 더욱 매혹적인 갱스터 무비의 ‘안티 히어로’로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묘사하는 어린 시절은 소름끼치게 생생하고 가혹하게 아름답다. 그 처절한 아름다움에 감염된 관객들은 영화 속 캐릭터와 자신을 가르는 거대한 시공간의 거리감을 지운 채, 누들스와 그의 친구들이 겪은 일들을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생생한 고통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어린 시절은 누구나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유년의 아픔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자라난 관객들에게는 결핍된 ‘뒷골목의 추억’을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처럼 공유하게 만든다. 이렇듯 관객에게 단지 ‘타인의 삶을 엿보는 쾌락’을 넘어 관객에게 ‘부재하는 추억’조차 창조하는 힘, 겪지 않은 사건마저 자신의 기억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영화라는 장르의 매력이기도 하다. 스크린을 통해 경험한 추억을 마치 자신의 추억인 양 생생하게 아파하게 만드는 영화의 감응력.  

 



   누들스는 죽은 친구들의 끔찍한 시체를 통해 단지 유년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이미 와 있는 자신의 죽음’을 본다. 그는 침묵하는 시체를 통해 자신이 통과해온 고통의 시간들이 뿜어내는 아우성을 듣는다. 그래, 나도 너희들처럼 고독하고 초라하게 죽어가겠지. 너희들도 나처럼 그렇게 매일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었구나. 그는 친구들과 함께 걸어왔던 시간들, 그들과 함께 꿈꿨던 사랑과 우정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온 과정이 자신의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으로부터 매일매일 멀어지는 것, 그것이 삶이며, 그 끝에는 철저히 혼자 치러내야 할 죽음의 고통이 놓여 있다. 누들스는 친구들의 ‘시체’를 통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인생에 얽히고설킨 자신의 삶을,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자신의 죽음을 본다. 가정과 학교의 보호와 통제가 아닌, 브룩클린 뒷골목의 떠들썩한 혼란이 곧 영혼의 안식처였던 그들. 누들스는 자신을 키워온 8할이 그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뉴욕의 거리 한복판이었음을, 누들스와 친구들의 영혼의 태반은 가정이나 학교가 아니라 바로 그 뉴욕의 뒷골목이었음을 떠올린다.  



  돌아온 탕아 누들스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뉴욕의 뒷골목은 아이-누들스가 어른-누들스에게 송신하는 기억의 콜라주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왕복했던 저 닳고 닳은 뉴욕의 뒷골목은 이제 누들스에게 마치 잃어버린 첫인상처럼 다시 써진다. 그것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며 기억을 끊임없이 다시쓰기 함으로써 삶 자체의 내러티브가 변형되는 체험이다.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외부적 사건의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무의식의 두터운 각질을 뚫고 기어이 솟아오르는 쓰라린 기억의 염증이 ‘현재의 나’를 매번 다시 규정하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유년 시절 기억의 복잡한 그물망과, 특히 ‘무의지적 기억(순간적인, 무의식적인 기억)’ 개념은 벤야민의 자전적 저작에 영감을 주었다. 그 기억들은 현재의 감각이 잊고 있던 과거의 경험을 갑작스러운 연상 작용과 인상을 통해 상기시켜주는 알기 어려운 깨달음의 순간에서 흘러나오며, 이 기억들은 또 다시 잊힌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홍차에 찍은 마들렌의 향과 맛, 다양한 꽃들의 향기와 같은 순간적인 자극들은 오랫동안 잠자던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깨워 사랑과 슬픔들을 만나게 한다. 벤야민의 베를린 에세이는 과거와 현재, 어른과 어린아이를 유사하게 섞어 엮는다. (……) 벤야민의 글들은 유년시절의 잃어버린 시간 뿐 아니라 대도시의 감춰진 균열들까지 찾으려 한다.
 - 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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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r 2010-06-15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쓰라린 기억의 염증... 하긴, 기억은 그렇게 별안간 뒤통수를 칩디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③

 3. 부랑자들, 혹은 비정한 도시의 산책자들 (3)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이미 사냥꾼이 되어 있다. 아이는 사물 속에서 영혼들의 흔적을 냄새 맡고 그것들을 추적한다. (……) 숲으로부터 아이는 전리품을 집으로 끌고 와 그것을 깨끗이 하고 딱딱하게 만들고, 그것들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버린다.
 -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90쪽.
 
   

 



   어린 시절 누들스, 짝눈, 팻시, 뚱보는 함께 뒷골목을 어울려 다니며 좀도둑질을 일삼는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의 시계를 훔치려던 누들스는 프랑스에서 이제 막 이민 온 낯선 소년 맥스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이 인연으로 친구가 된 누들스와 맥스는 이후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절친’이 된다. 누들스 일당은 맥스와 함께 갱단의 밀수품을 운반하며 그렇게 번 돈을 모아 인근 기차역의 물품보관함에 차곡차곡 모아둔다. 아이들의 좀도둑질과 갱단 도우미(?) 작업은 때로는 악행처럼 보이고 때로는 그저 놀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누들스가 성장하여 직업적인 갱스터가 되지 않았다면, 놀이와 악행의 구분이 모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모든 건물과 소품들을 언제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전쟁터로도 놀이터로도 이용할 수 있는 아이들의 상상력. ‘그건 좀 도둑질일 뿐이야!’라고 단죄할 수만은 없는, 그 어처구니없이 순수한 놀이의 상상력, 그리고 그 시절을 결코 되찾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누들스의 회한이야말로 이 영화의 OST <Childhood Memories>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느끼는 감동의 원천일 것이다. 빈곤과 폭력에 상습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누들스에게도 그 모든 아픔을 깡그리 잊을 수 있는 행복의 출구가 있었다. 바로 뚱보의 여동생 데보라가 발레 연습을 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는 일.    

 



   각종 잡동사니와 식료품이 가득한 창고에서 혼자 발레 연습을 하는 데보라의 모습을 바라보는 누들스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난다. 그저 평범한 창고에 불과한 이 장소는 데보라의 아름다운 춤사위로 인해 이 세상 하나뿐인 멋진 무대가 된다. 단 한 사람의 관객 누들스를 위한, 어린 소녀 데보라가 각본과 연출과 연기 모두를 거뜬히 혼자 해낸 멋진 공연 무대. 누들스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새치름한 표정으로 사뿐사뿐 춤을 추는 데보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춤곡은 <Amapola(양귀비꽃)>다. 이 음악이 나올 때마다 누들스는 연어가 필사적으로 거대한 물살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올 때나 지을 법한, 절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데보라의 비밀 공연을 훔쳐보기 위해 뚱보네 집 화장실 뒤편으로 달려간다.        

 



   아마 어린 시절은 누들스가 기억하는 것처럼 그토록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누들스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폭력,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던 전형적인 빈민가의 아이였다. 그러나 기억은 누들스의 머릿속에서 철저히 재구성된다. 어린 누들스가 미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아직 해석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저장되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어린 시절 그가 상상했던 미래보다 훨씬 남루하고 비참한 어른이 되어서야, 오랜 시간 억압된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된 그 사건들은 아름답고 애잔한 추억의 성좌를 그린다. 어른이 된 누들스가 아이였던 누들스의 눈으로 뉴욕의 밤거리를 다시 배회하자, 비로소 뉴욕의 뒷골목이 지닌 진정한 매혹이 완성된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이곳은 분명 그의 고향이지만, 누들스는 새삼 ‘어린이’의 눈과 ‘이방인’의 눈이 되어 이 거리를 다시 바라본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스산하면서도 애잔한 거리 풍경이야말로, 그가 잃어버린 시간의 총체였다.  

 

 

   
 

  벤야민은 낯선 도시인 모스크바에서 ‘어린아이’가 된다. 그는 유년시절의 도시인 베를린에서 ‘외국인’이 된다. 그는 독자들이 도시 환경을 친숙함과 습관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첫인상’으로 지각하도록 변화시켜 표현한다. 어린 아이는 보는 사람과 본 것, 주체와 대상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렌즈가 된다. 어린 아이의 관점으로 도시를 관찰하는 것은 망원경을 거꾸로 하여 도시를 보는 것과 같다.
 - 그램 질로크, 노명우 옮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124~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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