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15)

 

  15. 길을 잃어야만 포착할 수 있는 풍경 (1)

 

   
 

 완전히 같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감조차 잡지 못하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 발터 벤야민

 
   
 



 
  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 특유의 퍼즐 맞추기식 긴장감을 조성하지도, 남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팜므 파탈을 미화하지도, 마초적 의리와 무책임한 순수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저 암흑가의 갱스터나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로서 확실한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들, 혹은 멀리서 본다면 그저 인생의 실패자이자 뒷골목 룸펜의 전형인 사람들의 삶을 ‘성공 신화’나 ‘피해자의 넋두리’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 남부러울 것 없는 인간이나 남에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인간, 행복해 보이는 인간이나 불행해 보이는 인간, 그 모두의 삶을 공통적으로 꿰뚫고 있는 어떤 원초적 상실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그들이 가진 것이나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버린 것들 때문에 겪는 맹렬한 허무를 그려낸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잔인하도록 노골적으로, 타인의 삶을 은밀하게 엿보는 관음증적 시선으로 주인공들의 과거-현재-미래를 재구성해낸다. 
 



  이룰 수는 없지만 한때 가졌던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꿈이 사라지고 난 후. 가질 순 없지만 한 때 사랑했던 것만으로도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사랑의 기억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와 허무 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시선은 영화 속 남성들의 노리개였던 거리의 창녀부터 그들이 가장 갈망했던 꿈의 여인 데보라까지, 안 해 본 범죄의 종류가 거의 없어 보이는 천하의 파렴치한 맥스부터 여인을 얻기 위해 범죄도 불사하는 파괴적 로맨티스트 누들스에 이르기까지, 그들 어느 누구의 기억도 우아하게 미화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잔혹해 보이는 감독의 냉철한 시선은 가장 순수한 인간부터 가장 추악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이 더러운 욕망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욕망의 피투성이 문턱을 최대한 ‘줌인(zoom in)’하여 가장 밝은 조명으로 비춘다. 그 눈부신 조명 앞에서는 그 어떤 소박한 욕망도 추악해져버린다.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기에 오히려 모두의 편일 수 있는 욕망의 시선. 그것은 자본주의를 선과 악의 관점이 아닌, 윤리와 욕망의 관점에서가 아닌, 모두를 향한 ‘유혹’ 그 자체로서 바라보려 했던 벤야민의 시선과 닮아 있다. 세계 최대의 갑부에서 갈 곳 잃은 홈리스까지, 거리를 쓸쓸히 배회하는 창녀부터 초호화 세단을 타고 하루 종일 흙 한 톨 신발에 묻히지 않는 귀부인에 이르기까지, 아직 욕망과 자본에 대해 무지한 어린 아이부터 모든 종류의 욕망을 이미 섭렵하여 욕망 자체를 달관해버린 노인까지. 감독은 그들 모두를 빠짐없이 어김없이 뒤흔들고 있는 상품과 유행과 죽음과 섹스의 도시, 그 욕망의 만화경적 파노라마를 그려낸다. 길가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껍질 하나만으로도 그 도시의 풍경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벤야민처럼, 누들스 또한 뚱보네 술집의 간판이나 여배우의 공연을 선전하는 찢어진 포스터 한 장 만으로도 그가 잃어버린 시공간의 총체를 복원해낼 수 있다. 
 

 

   
 

내겐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계산서들, 시의 원고와 연애편지, 소송 서류, 연가들,
 영수증에 돌돌 말린 무거운 머리타래로
 가득 찬 서랍 달린 장롱도
 내 서글픈 두뇌만큼 비밀을 감추지 못하리.
 그것은 피라미드, 거대한 지하매장소,
 공동묘지보다 더 많은 시체를 간직하고 있는 곳.
 -나는 달빛마저 싫어하는 공동묘지.

 - 보들레르, 「우울」 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 지성사, 2003,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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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블라 2010-07-1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천년을 산 것보다 더많은 추억을 업고 살아가려니 오늘도 등허리가 쑤십니다.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