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7.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4)

   
 

 이야기는 참으로 오래된 소통 형식이다. 이야기는 정보처럼 순수한 사건 자체를 전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말하는 사람의 삶 속에 뿌리박혀 듣는 사람의 경험으로 전달된다.
 -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 중에서

 
   





   누들스는 이 도시가 버린 모든 것의 상징이다. 이 도시가 내동댕이친 모든 허섭스레기들이 누들스를  키운 문화적 자양분이었다. 그는 거지와 매춘부와 소매치기와 넝마주이와 조직폭력배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났고, 그들 모두의 버려진 삶이야말로 누들스가 매일 등교했던 ‘내면의 학교’였다. 이 내면의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라는 점에서 누들스와 맥스는 서로 통했지만,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누들스는 맥스에게 돈가방과 데보라와 친구들 모두를 빼앗김으로써 여전히 ‘세상 바깥’에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 반면 맥스는 자신의 존재를 구성한 저 버려진 삶들의 흔적을 깡그리 청산함으로써 그의 토양이었던 ‘뒷골목’의 삶을 버렸다. 그는 뒷골목 소매치기 소년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누구보다도 먼저 도착했다. 누들스는 이 도시가 버린 모든 것들을 대변하는 존재였고, 맥스는 이 도시가 버린 존 재들의 약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이 도시의 화려한 중심이 되었다. 맥스는 마침내 ‘버려진 자’가 아니라 ‘버리는 자’로 등극한 것이다.  

 



   노인이 되어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온 누들스는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친구도, 연인도, 재산도. 이 모든 것이 누들스의 어린 시절에 이미 결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 절의 몇 가지 결정적인 기억들은 그의 성격과 그의 인생 전체를 집약하는 선명한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누들스가 잔꾀를 부려 신사에게 훔친 시계를 맥스가 가로채버린 것. 그 후로 누들스 는 번번이 맥스에게 자신이 이룬 것들을,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도둑맞는다. 친구도, 연인도, 재산도, 그리고 성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까지도. 누들스는 평생 그의 인생 전체를 맥스에게 도둑맞은 느낌으 로 살아가게 된다.

   두번째 에피소드는 데보라와 누들스가 생애 첫 키스를 나누던 황홀한 순간, 맥스가 누들스를 불러내 ‘어둠의 세계’로 이끄는 장면이다. 아가서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시로 만든 데보라의 사랑스런 고백이 끝나고 수줍은 키스가 시작되자, 맥스가 누들스를 불러내 갱단의 패싸움에 끌어들인다. 데보라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한다. “가봐. 네 엄마가 부르잖니.” 패싸움에 끼어들어 피투성이가 된 누들스에게,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데보라의 마음은 굳게 닫혀버린다. 누들스는 맥스의 우정에서는 왠지 기분 나쁜 배신의 냄 새가 느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맥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누들스가 데보라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려 할 때마다 맥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발걸음을 저지하고, 누들스를 검은 유혹 속으로 초대한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안타깝게 재회한 누들스와 데보라의 로맨스를 방해한 것도 맥스였다. 어른이 된 데보라는 마치 익숙한 장면이라는 듯이 어린 시절 자신의 대사를 반복한다. “가봐, 네 엄마가 부르잖니.”   

 



   세번째 에피소드는 곡물창고 속에서의 애절한 사랑 고백이다. 그날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사랑보다 더 큰 것을 원하는 데보라의 야망은 둘을 매번 갈라놓는다. 데보라와 누들스는 서로 사랑하지만, 성공을 향한 데보라의 열정과 누들스의 반복되는 불운은 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어린 시절 데보라는 이미 누들스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는  더럽고 초라하고 가망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사랑스럽다고. 하지만 너는 시시한 불량배가 될 것이 뻔하고, 그런 너는 결코 내 사랑이 될 수 없을 거라고.   

   평생 누들스는 데보라를 갈망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다. 널 사랑하지만, 난 너의 것이 될 수 없어. 데보라는 홀로 춤추는 자신의 자태를 훔쳐보는 소년의 빛나는 순수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본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는 누들스의 순수와 맥스의 야망이 공존한다. 데보라는 마음으로는 누들스에게 끌리지만 맥스가 약속하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아가서를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한 그녀의 사랑 고백은 순수와 허영이 공존하는 그녀의 내면을 담아내고 있다. (괄호 안의 대사는 그녀가 아가서에 ‘변화를 준’ 부분이다.) 
   

 

   
 

 내 사랑 그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그의 살결은 순금처럼 빛나고
 그의 뺨은 석류를 쪼개놓은 듯 불그스레하구나.
 (비록 그는 작년 12월 이후로 목욕이라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비둘기의 눈처럼 빛나고
 그의 몸은 상아처럼 보얗고
 그의 다리는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처럼 탄탄하구나.
 (물론 그의 바지는 너무 더러워서 난리가 났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스럽구나.
 (그렇지만, 그는 별 볼일 없는 양아치일 뿐. 그는 내 사랑이 될 수 없으니 안타깝구나.)
 -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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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와르 2010-06-22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니퍼 코넬리가 성경을 낭독하면서 자기식 코멘트를 살짝 얹어주는 센스. 정말 멋졌죠.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