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16)

 

 16. 길을 잃어야만 포착할 수 있는 풍경 (2)
 

   
 

 나는 비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 같아.
 부자이지만 무력하고 아직 젊지만 늙어버려.
 (……) 사냥가도, 매도, 아무것도 그에게 즐거움 되지 못한다.
 발코니 앞에서 죽어가는 자기 백성마저도.
 총애 받던 광대의 우스꽝스런 노랫가락도
 이 견디기 어려운 병자의 이맛살을 펴지 못한다.
 나리꽃으로 수놓은 그의 침상은 무덤으로 바뀌고,
 왕이라면 아무나 반해버리는 치장 담당 시녀들이
 제 아무리 음란한 치장술을 만들어내도
 이 젊은 해골로부터 미소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그에게 금을 만들어주는 학자마저도
 그의 몸에서 썩은 독소를 뽑아내지 못한다.
 권력자들이 말년에 갈망하는
 로마인들이 전해준 피의 목욕도
 그 속에 피 대신 푸른 ‘망각의 강’이 흐르는
 이 마비된 송장을 데울 수 없다.
 - 보들레르, 「우울」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 지성사, 162쪽)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 것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 자. 보들레르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견딜 수 없이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어떤 아름다움도, 쾌락도, 지식도, 권력도, 그에게 미소를 끌어내지 못하기에 그는 살아 있어도 이미 ‘마비된 송장’ 같은 피폐한 영혼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맥스 또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친구의 삶까지 송두리째 빼앗아가며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왕국은 1년 365일 내내 비만 내리는 나라처럼 질척한 우울과 음습한 불안으로 가득하다.  


 


   가면무도회에서 한껏 떨쳐입고 저마다 최고의 모습으로 분장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마치 맨눈으로 엑스레이를 찍듯 끔찍한 ‘해골’의 모습을 투시했던 보들레르.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상품과 유행과 소비자가 넘쳐나는 새로운 도시 파리에서 생명의 몸짓을 가장한 죽음의 이미지들을 포착했다. 보들레르나 벤야민이라면 첫눈에 맥스 같은 불행한 인간의 몸 전체에서 뿜어나오는 처연한 죽음의 냄새를 포착해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성공을 송두리째 거머쥔 맥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 후, 그 끊임없는 불안과 우울의 뿌리에 옛 친구 누들스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맥스가 진정으로 소유한 것은 ‘우울’뿐이었다. 맥스는 이 거대한 도시가 허락하는 모든 재화를 소유해봤지만, 그가 생의 끝자락에서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오직 자신의 생 전체를 검은 휘장으로 감싸는 듯한 끔찍한 우울이었다. 맥스는 ‘나를 죽여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누들스가 들어주지 않자, 모든 것을 잘디잘게 분해해버리는 거대한 쓰레기차에 자신의 몸을 던져버리고 만다. 스스로 쓰레기를 자처하며 흔적조차 식별해낼 수 없이 분해되어버린 맥스……. 이 충격을 가눌 수 있는 균형감각도, 이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이제는 없어진 누들스는 또 다시 마약이 약속하는 덧없는 환각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영화는 그렇게 덧없이 끝나지만, 이 영화의 복잡다단한 욕망의 퍼즐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기묘한 활기를 띠며 관객의 마음속에서 새로 조립되기 시작한다. 누들스가 꿈꾸던 화려한 삶을 소유한 것은 맥스와 데보라였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옛날 옛적 이야기’로 발화할 수 있는 사람은 누들스가 아닐까. 부르주아에도 노동자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이 도시의 ‘산책자’로 이 도시의 삶을 슬쩍 엿보되 결코 참여하지 못하는 누들스. 그야말로 그들의 삶이 그려내는 욕망의 별자리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읽어낼 수 있는 내면의 망원경을 지녔으므로.  

 

 

 

   
   모든 것이 내게는 알레고리가 되고.
 - 보들레르, 「백조」
 
   
 
   
 

우울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보들레르의 천재성은 알레고리의 천재성이다. 보들레르에게 와서 파리는 최초의 서정시의 대상이 된다. 이 시는 결코 고향 찬가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도시를 응시하는 알레고리 시인의 시선, 소외된 자의 시선이다. 그것은 또한 산책자의 시선으로, 그의 생활 형태는 마음을 달래는 어슴푸레한 빛 뒤로 대도시 주민에게 다가오고 있는 비참함을 감추고 있다. 산책자는 여전히 문턱 위에, 대도시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문턱 위에 서 있다. 아직 어느 쪽도 완전히 그를 수중에 넣지는 못하고 있다. 그는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한다. 그는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 (……) 군중이란 베일로서, 그것을 통해 보면 산책자에게 익숙한 도시는 환(등)상으로 비쳐진다. 군중 속에서 도시는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거실이 된다. 곧 이 두 가지는 백화점의 요소가 되며, 백화점은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조차 상품 판매에 이용한다. 백화점은 산책자가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곳이다.
 -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프로젝트』, 새물결, 2005, 104~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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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2010-07-22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군중이라는 베일에 비친 세상... 요새는 인터넷이라는 베일에 비친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