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⑨

   

 9. ‘너’를 찾으러 떠난 길 끝에서, ‘나’를 만나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 룰렛 공은 결코 ‘아,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99~100쪽.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의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영험이 아이들 놀이방의 하찮은 동화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세계의 영웅신화>, 대원사, 1996, 10쪽.
 
   

   센이 원웨이 티켓을 들고 떠난 후, 사경을 헤매던 하쿠는 비로소 깨어난다. “하쿠, 정신이 든거냐?” 하쿠는 일어나자마자 센을 찾는다. “어둠 속에서 치히로가 여러 번 절 불렀고 목소릴 따라가다가 깨어보니 여기였어요.” 가마 할아범은 놀란다. “그 애의 진짜 이름이 치히로라구?” 하쿠의 꿈속에서 간절하게 하쿠를 부르던 치히로의 목소리는 곧 미궁을 헤매던 하쿠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센이 제니바를 찾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 전언을 들은 하쿠는, 이 모든 저주의 근원인 유바바를 찾아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한다.

   한편 유바바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온천 경영을 위한 손익분기점을 계산하느라 주판알만 튕기고 있다. “이 정도 금으로 어떻게 적자를 때워? 멍청한 센이 횡재를 날려버렸어.” 하쿠는 돈에 걸신들린 유바바의 모습을 보며 센을 옹호한다. “센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걸요.” 유바바는 화가 잔뜩 나 있다. “감히 온천을 이 꼴로 만들고 도망을 가? 센은 부모까지 버리고 갔어! 센의 부모를 베이컨이든 햄이든 만들어버려!” 놀란 하쿠는 유바바를 제지한다. 센을 구하기 위해 유바바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하쿠. “기다려요! 소중한 걸 잃고도 아직 모르겠습니까?” 이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챈 유바바는, 돈 계산하느라 안중에도 없던 수퍼베이비를 애타게 찾기 시작한다. 걷지도 못하던 아기가 실종된 것을 발견하자 유바바는 대경실색한다. 화려한 장난감과 과도한 장신구로 치장된, 수퍼베이비의 밀폐된 방은 텅 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우리 아기를 어디에 숨겼어?” 하쿠는 침착하게 대답한다. “제니바의 집에요.” 유바바는 드디어 이성을 잃고 폭발한다. “제니바?! 못된 마녀 계집이 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냐?” 유바바는 완벽한 악행의 주모자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결점은 의외로 많았다. 자발적으로 센을 따라간 수퍼베이비로 인해, 유바바는 센의 부모를 함부로 베이컨으로 만들지 못하게 된다. 물샐 틈 없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유바바에게도 이토록 치명적인 틈새가 있다. 타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무소불위의 주재자처럼 보이던 유바바도 결국은 더 큰 운명의 그림 가운데 한 조각일 뿐이었다. 유바바는 하쿠에게 질문한다. “네 계획이 뭐냐?” 하쿠는 아기를 두고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다. “아기를 데리고 올 테니 센과 부모님을 인간세계에 보내줘요.” 유바바는 분노한다. 그러나 이 분노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 이상 유바바의 카리스마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넌 어떻게 되는 거지? 나한테 찢겨 죽어도 좋다는 말이냐?” 센은 하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하쿠는 센을 위해 목숨을 건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느새 ‘나의 일’과 ‘남의 일’의 구분이 없어져버린다.

   한편, 센은 수퍼베이비와 가오나시를 대동하고 제니바가 살고 있는 낡은 오두막집에 무사히 도착한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던 수퍼베이비는 어느새 센의 도움도 거부하고 뒤뚱뒤뚱 혼자 걸으며 제니바의 집을 향해 행진한다. 다행히도 제니바는 센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뚱보 생쥐가 된 수퍼 베이비는 처음으로 구경하는 바깥세상이 재미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니바의 물레질을 도우며 혼자 신났다. 근심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센은 제니바에게 용서를 빈다. “하쿠가 훔친 걸 돌려 드리려고 왔어요. 하쿠를 대신해서 사과 할게요.” 제니바는 저주가 걸린 도장을 지니고도 아무렇지 않은 센이 신기하다. “이거 갖고도 아무렇지 않았어? 엥? 주문이 사라졌잖아!” “도장에 있던 이상한 벌레를 모르고 밟아버렸어요.” “그건 동생이 하쿠를 조종하기 위해 용의 뱃속에 몰래 넣은 벌레야. 잘했어.”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미션을 수행해낸 센은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와 생쥐가 된 수퍼베이비도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제니바는 웃으며 말한다. “저런, 마법은 벌써 풀려버렸단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 생쥐-아기는 엄마 유바바에게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없다는 듯 신나게 물레질만 하다가 야금야금 과자를 씹어 먹는다.  

   유바바는 제니바를 싫어하지만 제니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린 합쳐야 제 몫을 내는데 안 맞아서 문제야. 고약한 성질 알잖아! 쌍둥이 마녀라는 운명부터가 문제지만!” 그리고 하쿠와 센을 돕고는 싶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돕고 싶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이 세계의 규칙이니까. 네 부모와 남자 친구인 용도 네 스스로 보살펴.” 센도 스스로 보살피고 싶지만 도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절박하게 묻는다. “힌트라도 줄 순 없나요? 하쿠랑 전 오래전에 만난 듯해요.” 제니바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그렇다면 얘기가 빨라지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잊혀질 수도 없는 법. 생각이 안 날 뿐이지.” 센은 결국 자신의 마음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해답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제니바는 가오나시와 생쥐, 센과 함께 열심히 물레질을 하여 무언가를 만든다. “너희들이 도와줄 테냐? 조금만 더 힘내. 그래, 넌 정말 잘하는구나.” 제니바는 흔히 생각하는 마법사와 달리 자신의 ‘노동’만으로 삶을 꾸려가는 듯하다. “마법으로 만든 건 다 소용없어.” 아무리 대단한 마법이라도 마법이 풀리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공들여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너무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제니바의 말에, 센은 한 시도 쉴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전 돌아가야 돼요. 안 그럼 하쿠가 죽어요. 아빠, 엄마도 잡아먹힐 거구요.” 제니바는 생쥐와 가오나시의 도움으로 함께 만든 머리띠를 주며 말한다. “부적! 네 친구들이 뽑은 실이야.” 센이 떠나려는 순간,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하쿠. “하쿠! 하쿠! 천만다행이야. 상처는 이제 괜찮아? 정말 다행이야.” 제니바는 하쿠를 용서해주며 센을 부탁한다. “네가 한 짓은 이제 탓하지 않으마. 그 대신 센을 잘 지켜라.” 센은 예기치 않은 모험의 세계에 빠져 고초를 겪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멋진 마녀 제니바의 사랑 또한 그 아름다운 우연 중 하나다. 제니바는 갈 곳 잃은 가오나시를 곁에 두기로 한다. “넌 남아서 내 일을 거들어 다오.” 어느새 유순해진 가오나시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할머니! 고마워요, 갈게요. 제 본명은 치히로예요.” “치히로, 좋은 이름이야. 네 이름을 소중히 해야 한다.” 

   아무리 대단한 마녀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운명의 여신 모이라(Moira) 앞에서는 제우스도 어쩔 수 없었듯이. 센은 깨닫는다. 내 스스로 나의 운명을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오직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것을. 제니바는 운명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주지는 않지만, 그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준다. 그곳이 바로 센의 마음속이다. 그 마음의 후미진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 운명의 봉인을 푸는 열쇠를 찾아내야 하는 사람은 센 자신이다. 아무도 그 임무를 대신해줄 수 없다. 영웅의 마지막 미션은 가장 어려운 만남, 즉 자기 자신과의 투명한 만남이다. 그리고 센과 하쿠는 예감한다. 너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곧 나를 찾는 길이었음을. 너를 구하러 떠난 여행이 곧 나를 구원하는 길이었음을. 너 없이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외따로 동떨어진 ‘나’로서가 아니라 ‘너’로서 이해될 때, 비로소 우리를 옭아맨 운명의 상처와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융은 이른바 미확인비행물체(UFO)에 관한 현대의 신화가 ‘무너’가 인류의 환상적 기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고 썼다. 사람들은 외부 세계로부터 방문자가 와주기를 고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구원이 그로부터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 시대의 개막은 우리에게 외계(외부우주)로의 여행이 우리를 다시 내부 우주로 전환시킨다는 사실을 되새겨주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신들이 ‘저 바깥’에서 활동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불러낸다.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여기 있다.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고 그 광휘를 목도한다.
 -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40~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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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09-09-0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UFO를 향한 판타지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군요~! 누군가 우릴 구해줄 거라는 환상...구원은 이 세상 바깥에 있다는 상상...

비로그인 2009-09-0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자신과의 투명한 만남.... 운명의 상처와 대면한다...

sotkfkd 2009-09-2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love hurts 2009-11-0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들 놀이방의 하찮은 동화 속에 숨은 비밀 암호 찾기~ 흐...말처럼 쉽지가 않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