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①

 

1. ‘구별짓기’의 디스토피아: 짝퉁에도 등급이 있다?


   거리를 배회하던 창녀가 우아한 드레스를 떨쳐입고 오페라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릴 때(<프리티 우먼>), 감옥의 죄수들이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며 난생처음 예술의 감동을 만끽할 때(<쇼생크 탈출>), 우리는 왜 달콤한 해방감을 느낄까. 영국 국무총리가 미국 대통령의 야코를 납작하게 만든 후 총리 관사를 휘저으며 막춤을 추고(<러브 액츄얼리>), 세계 최고의 여배우가 평범한 서점 직원과 사랑에 빠져 눈물 흘릴 때(<노팅 힐>),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영화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될까. 영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런 파격적인 ‘계급 배반’의 환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실현되는 행운을 누리기 어렵지 않을까. 자신이 속한 계급의 도식적 이미지를 일탈하는 캐릭터에게 우리가 매혹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지나치게 촘촘한 ‘문화적 구별짓기’의 그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이제 단지 경제적 기준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으로는 불충분한 것일까. 현대인은 점점 정교한 잣대로 개인의 사회문화적 위치를 식별하고 서열화한다. 통장 잔고나 부동산 소유 여부를 넘어 ‘소비와 취향’의 잣대로 개인의 사회적 좌표를 확인하는 풍속. 그것은 마치 대단한 상품에 어울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는 듯한 거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갈 땐 동창회 갈 때만큼이나 공들여 화장을 하고 제대로 차려입고 나가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특히나 이 백화점은 분위기가 유난하다. (……) 똑같이 맨얼굴로 서 있어도 이 동네 사람과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의 피부는 때깔에서 차이가 난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도 이 동네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다. 그게 걸치고 있는 입성의 차이에서 나오는 느낌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뼛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 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작가세계] 2006 여름, 228쪽.   
 
   

   맨얼굴의 피부와 표정만으로도 ‘이 동네 사람’과 외지인을 구별할 수 있다는 믿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도 이 동네 사람들과 외부인을 가려낼 수 있다는 확신. 강남 모 백화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화려하지만 폐쇄적인 이미지,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면 왠지 이방인처럼 서걱거리는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보이지 않는 문화적 장벽을, 작가는 “뼛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이라 이름 붙인다.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자본의 위력이 개인의 삶 깊숙이 침투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계급의 논리’로 판가름한다. 이러한 무한 소비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인터넷 문화 중 하나가 ‘같은 옷, 다른 느낌’이다.
   ‘코디가 안티야?’라는 말이 유행이 되는 시대. 스타들은 옷 한 번 잘못 입고 나왔다가는 너무 쉽게 ‘굴욕’의 주인공으로 추락하고 만다. 네티즌의 매서운 눈썰미로 매일매일 업데이트 되는 ‘같은 옷, 다른 느낌’ 코너는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따로따로 서 있으면 저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스타들이 ‘같은 옷, 다른 느낌’의 올가미에 걸리면 여지없이 ‘승자 vs 패자’의 이분법에 사로잡히고 만다.
   네티즌들은 스타들이 우연히 똑같이 입은 옷의 브랜드는 물론 제조년월과 가격까지 빠삭하게 추적해낸다. 평소에 각자의 개성으로 빛나던 두 스타들의 아름다움이 ‘같은 옷’이라는 ‘동일한 잣대’로 비교되는 순간 승패는 잔인하게 판가름 난다.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같은 옷’에 구겨 넣고 ‘이 옷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네가 아냐!’라고 선고하고 싶은 공격적인 욕망의 기원은 무엇인가. 아주 작은 차이라도 찾아내서 서열에 따라 줄 세우고 싶은 이 욕망의 뿌리는 무엇인가. ‘같은 옷 다른 느낌’은 아무리 명품으로 도배해도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감각의 차이’가 있다는 소비사회의 무의식을 뼈아프게 형상화한다. 옷차림을 통해 그의 성장 환경 뿐 아니라 뿌리 깊은 무의식까지 진단해낼 수 있다고 믿는 사회, 짝퉁 사이에도 엄연한 등급이 있어 ‘얼마나 명품을 완벽하게 재현하는가’를 기준으로 상품의 가격이 매겨지는 사회. 우리가 매순간 결정하는 소비의 품목들, 먹고 마시고 입고 듣고 보고 즐기는 모든 것들에서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를 진단하는 것, 그것이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 최대의 지성으로 격찬받았던 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시선이었다. 부르디외의 학문적 관심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제조되는가’였다.    

   ‘내가 너보다 요만큼 낫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증명해보여야 간신히 체면이 유지될 수 있는 삶, 레이스와 찻잔과 찻숟가락 하나하나에서도 자신의 귀족적 정체성을 일일이 박아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계. 이 처절한 구별짓기의 전투를 생생하게 그려낸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다. 격조 높은 고고함의 미장센으로 은폐된 처절한 구별짓기의 전장, 그곳은 1870년대 뉴욕이었다. <순수의 시대>는 우리가 매순간 뼈저리게 의식하지만 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매끄러운 순수를 가장해야 하는, ‘너와 나의 다름’에 대한 풍요로운 인류학적 보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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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2009-07-2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홋. 새로운 연재 시작되나 보네요. 이야기 듣기 전에 순수의 시대부터 보고 와야 겠어요. ㅎㅎㅎ

astromilk 2009-07-2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별짓기라니, 정미경 님의 저 글과 너무나도 맞아떨어지네요. 설명이 쉬워서 좋아요, 언제나 여울 님, 화이팅!

빵하 2009-07-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맛깔스런 글에 푹 빠져,, 그간 봤던 영화속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네요
순수의시대라,,, 외모지상주의 세상을 풍자할만한 영화인지 벌써 궁금해지는데요^^

블레이드러너 2009-07-2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로운 연재, 기대 만빵, 두근 두근 두근....

예인 2009-07-27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사물화에 대한 사례와 표현이 돋보입니다. 루카치의 미학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문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보기드물게 대성할 수 있는 작가를 만나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요. 디테일한 부분에 좀도 신경을 쓰는 것이 필요한 듯 합니다. 철학으로 영화읽기를 하면 한결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신만의 영화읽기가 첨가될 수 있으면 좋겠지요. 니체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취향을 살리는 것이 예술에서만큼은 중요한 듯 합니다. 다소 파시스트적일지라도 ^^ 아무튼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건필하세요.

예인 2009-07-27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과를 나오셨군요. 실례가 될지 모르겠는데, 제가 시를 연재하고 있거든요. 6년여에걸쳐 시를 90여편 정도 창작했습니다. 아직 등단은 못했구요. 60 편 정도는 서정시 30편 정도는 현대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시를 쓰다 보니까, 내 시가 좋은지 좋지 않은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제 시에 대한 감평을 해 줄 수는 없는가요.

오렌지샤벳* 2009-07-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구별짓지 않는 삶, 가능할까요? ^^a

야호 2009-07-2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 철학과 교수님의 촌철살인 강연을 듣고 있는 듯한. 멋져요! ^^

바이런 2009-07-30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부르디외+_+ 롤랑바르트편도 정말 잘 읽었는데, 이번편도 정말 기대됩니다! 시네필 다이어리 완전 팬이에요ㅎㅎ 여울님 만쉐이~

sotkfkd 2009-09-12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구별 짓기', 우리들이 스스로 마련해 놓은 무덤이라는 생각이 늘 들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