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색, 계〉와 롤랑 바르트 ⑥

 

3. 세번째 풍크툼 :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 <2>


   그녀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다. 오직 그녀의 암살 대상이자 마지막 사랑, ‘이 선생’뿐이다. 그녀는 우 선생에게 고백한다. 자신은 이제 연극과 현실을 구별할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그는 제 몸뚱이뿐 아니라 한 마리 뱀처럼 제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옵니다. 매번 더더욱 깊숙이……. 매번 그는 제가 절정에 몸부림 치고 울부짖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만이 제 감정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우 선생은 ‘첩보원답지 않은’ 그녀의 아마추어적 정직함에 놀라 그녀의 고백 자체를 거부한다. “됐다! 그만해라!”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고백은 너무 솔직해서 소름이 끼치고, 너무 투명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진이 다하고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그를 원하게 되는 겁니다. 그의 몸에 힘이 빠지는 그 순간, 난 당신들이 쳐들어와 그를 향해 총을 쏘고 그의 피가 내 몸에 흩뿌려지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갈등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녀의 처절한 고백은 허공의 메아리로 흩어지고 만다.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 고백은 안타까운 메아리가 되어 그녀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것은 왕 치아즈가 막 부인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였고, 이제 막 부인이 되어버린 왕 치아즈가 죽을 때까지 솔직해질 수 없는 자신의 암살 대상 이 선생에게 하지 못한 고백이었다.
   그녀는 이 순간 연극과 현실을 완벽하게 일치시킨 것이다. 아폴론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하다 월계수가 되어버린 다프네처럼 타인의 사랑을 거부하던 그녀가, 이제 어떤 희망도 보상도 없는 사랑에 전 존재를 걸게 된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투명한 진실의 화살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견고한 인식의 장벽을 관통해버린 것이다. 이제 그녀는 두렵지 않다. 더 이상 외롭지도 않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막 부인의 사랑을 지킬 것이다. 그녀의 사랑을 공격하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맞서서. 
 
    종기처럼 나의 사랑은 곪아
    이제는 터지려 하네.
    메스를 든 당신들.
    그 칼 그림자를 피해 내 사랑은
    뒷전으로만 맴돌다가
    이제는 어둠 속으로 숨어
    종기처럼 문둥병처럼
    짓물러 터지려 하네.

   - 최승자, 「이제 나의 사랑은」,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49쪽.

   그녀는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완벽한 첩보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연기력의 카탈로그에는 굳이 포함되지 않았던, 그녀만의 자발적인, 진솔한 즉흥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북쪽 고향의 산을 바라보니 눈물이 내 옷깃을 적시고. 소녀 여전히 그대를 그리오이다. 낭군이시여. 환난 속 사랑은 더욱 깊으리오. 낭군이시여. 환난 속 사랑은 더욱 깊으리오. 소녀가 실이 되고 낭군께서 바늘이 되면. 우린 영원히 함께 하리이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이 선생의 눈에 언제나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잔혹한 살기와 섬뜩한 냉기가 어느덧 사라지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더 많이, 더 오래 함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만이 가득하다. 그들의 첫 관계처럼 폭력적인 섹스가 아니라 다만 가만히 손을 잡는 것만으로 이들에게는 완전한 소통이 시작된다.  

   “오늘은 그냥 가지.” 굳이 밤을 함께 보내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서로 ‘통’했다. 묘하게 연극적이고 유치하면서도 어떤 도덕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의 무구한 동심이 담뿍 담겨 있는 이 노래는 섹스보다 따스하게 그의 마음을 녹여준다. 아무도 엿보지 못한, 거대한 만다라의 현란한 문양처럼 복잡하게 꿈틀거리는 그녀의 마음을 엿본 유일한 사람은 이 선생이었다. 그들이 손을 잡는 순간, 더 이상 섹스 없이도 사랑할 수 있게 된 순간, 그녀는 공포와 절망과 고독을 한꺼번에 떨쳐냈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의 손은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 최승자, 「사랑하는 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73쪽.

   그녀는 이제 나약하지 않다. 평생 동안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빈방에 갇혀 있던 왕 치아즈는 이제 외롭지 않다. 그녀를 빈방에 가둔 것은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망상의 벽돌로 지어진 견고한 영혼의 성벽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강력한 믿음의 다이너마이트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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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day 2009-07-2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마다 출석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다음 만화속 세상에서 연재하던 '이끼'를 손꼽으면서 기다렸는데 또 다른 읽을 거리를 찾은 것 같아 기쁩니다. ㅎㅎ

블레이드러너 2009-07-23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풍크툼! 어려운 개념인 것 같은데, 여울님의 글 때문인지 왠지 금새 정감이 가는 단어가 됐네요. 저도 한 번 다른 곳에 사용하고 싶네요. 풍, 크, 툼!

두근두근 2009-07-2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상하게 글로 읽으니까 더 애틋하고 절절하게 느껴진다능..-ㅅ-;;

모범생 2009-07-23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다보니 색계 영화를 보고 짠했던 마음이 되살아나네요..'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라는 강력한 믿음의 다이너마이트라.. 멋진 표현인 것 같아요! 연재 잼있게 보고 있습니다^^ 화이팅!

신안 2009-07-2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색계 영화를 봤었는데 이렇게 글과 함께 다시 보니 더욱 진한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훗 ㅡㅅㅡ 2009-07-2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연재 잘 보고 있답니다. 계속 건필해 주세요. ^^

2009-07-2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 문단 정말 마음에 와 닿네요. 다음회 손꼽아 기다립니다~

시네필짱 2009-07-23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살짝 민망해서 너무 정확하게 발음해버리는 것에 대해서
그는 제 몸뚱이뿐 아니라 한 마리 뱀처럼 제 마음속까지 파고들어옵니다. 매번 더더욱 깊숙이. 매번 그는 제가 절정에 몸부림 치고 울부짖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만이 제 감정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라는 대사는
이선생이 아니라도 가만히 듣고 있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은데,

남자와 여자 사이에
더 이상 섹스 없이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올까요?

sotkfkd 2009-09-12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 부분을 읽어 내려오니 퍼뜩 떠오르는 나의 시인 '기형도' 그의 시 '빈 집'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