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번째 풍크툼 :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 <1>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여자의 첫사랑. 그것만큼 위험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영화 <파니 핑크>의 원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이다. 파니 핑크는 “서른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날 확률은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는 독설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어버린 쓸쓸한 스물아홉 싱글이다. 그녀는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랑을 꿈꾸지만 ‘친밀해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다. “당신이 실망할까 겁나요. 섹스에 있어서 난 좀 바보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머리가 방해하거든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냉장고에 남아 있는 우유의 유통기한이나, 연말정산에서 세금을 얼마나 돌려받을지, 아니면 발 냄새가 나진 않을지. 내 모습이 지금 어떻게 보일까 신경 쓰죠. 내가 너무 무겁지 않나 신경 써야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단 얘긴 아녜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녀는 사랑을 나눌 때조차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원망한다. 관객은 그녀에게 무슨 특별한 결격사유가 있는 것일까, 요모조모 관찰해보지만 오히려 그녀는 지나치게 멀쩡하다. 그녀가 영화 초입에 툭 내뱉는 대사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그녀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나 자신도 날 사랑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그녀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진짜 문제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피해망상으로 은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웃집 남자인 심령술사 오르페오는 그녀에게 손금을 봐주겠다며 장난스럽게 접근한다. 운명의 남자를 점쳐준다 호들갑을 떨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진정한 솔메이트가 된다. 가난과 질병, 고독과 차별로 황폐해진 오르페오의 영혼은 너무도 티 없이 건강하다. 그는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미래에 주눅들지 않는 영혼이다. 죽어가는 오르페오의 사랑보다 깊은 우정은 아프지 않은데도 늘 아프다고 믿는 파니 핑크의 가녀린 영혼을 따스하게 감싸준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생일이 될 거라 믿었던 서른살 파니 핑크의 생일, 오르페오가 립싱크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는 그녀의 그늘진 영혼을 밝히는 영원한 빛이 되어준다.
하지만 우리의 막 부인, 아니 왕 치아즈에게는 <파니 핑크>의 오르페오처럼, 사랑이 떠나가도 사랑보다 더 짙은 우정을 선물해주는, 그리하여 사랑의 ‘대상’이 없이도 사랑 그 자체를 저절로 알게 해주는 다정한 멘토가 없다. 사는 내내 빈방에 갇혀 있는 듯 쓸쓸해 보였던 왕 치아즈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거나 ‘누군가 날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여자는, 심하게 둔하다. 이 선생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인(sign)을 여러 번 보내지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그녀는, 그리고 아무도 사랑해본 일이 없는 그녀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이 여자는 더욱 위험하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그 어떤 사랑도 진정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그 모든 관계를 향한 열망이 ‘한 남자’에게로 투사될 위험 말이다. 그녀 곁에는 오직 그녀를 살인공작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조직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이 선생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녀에게는 희미한,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린 첫사랑 광위민의 뒤늦은 고백도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통조림이다. 뒤늦게 사랑을 느낀 광위민은 그녀에게 키스하지만 그녀는 그의 몸을 조용히 밀어내며 말한다. “왜 3년 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
광위민은 이제야 그녀를 도우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조직은 너무 완고하다. 광위민은 항일 조직의 브레인 격인 우 선생에게 왕 치아즈를 그만 작전에서 빼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녀는 정식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장기간의 압박은 버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 선생은 그녀의 이용 가치만을 생각한다. “왕 치아즈가 정말 잘해줬어.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해.” 우 선생은 왕 치아즈를 칭찬하기까지 한다. “왕치아즈의 강점은 자신이 첩보원이란 의식을 지우고 막 부인이란 배역과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거네.” 우선생은 알지 못한다. 이제 첩보원 왕 치아즈는 사라져가고 사랑에 빠진 막 부인만이 남았다는 것을. 그녀는 배역과 혼연일체가 된 나머지 현실로 돌아오는 출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어엿한 운동가로 성장한 광위민은 그녀를 구하고 싶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지알고 계십니까? 그녀는 이미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젠 우리가 행동할 차례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 선생은 광위민보다 더 처절하게, 이 선생을 효과적으로 암살하여 조직의 더 ‘커다란 그림’을 완성해야 할 의무를 강조한다. “놈은 내 아내와 내 두 자식들을 죽였지만 난 놈과 식탁 하나를 두고 식사까지 했다. 이게 바로첩보원이다! 나보다 더 놈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어. 놈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난 놈을 조금 더 살려줄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절실함을 주장할 때, 승자는 더 큰 권력을 가진 자일 수밖에 없다. 우 선생은 개인적 복수심과 조직의 안녕이라는 커다란 대의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킨 사람이기에 조직원의 ‘하찮은 사랑놀음’ 따위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