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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 모든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스칼릿 커티스 지음, 김수진 옮김 / 윌북 / 2019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큰 꿈을 품은 여성이 이 세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두려움 없이 자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게 페미니스트라면, 좋다,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라.”
(침웸웨 치웨자, 걸업 클럽리더 p. 58)
이 책에 대해 설명하기 전 내 얘기를 하자면, 페미니즘에 관한 내 생각은 조금 복잡하다.
당신은 여성이면서 왜 페미니스트가 아니냐?며 따질 근본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성의 권리, 가치 그리고 존재가 남성과 차별 없이 존중받아야 함에는 부인할 바 없이 동의하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라도 유린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입장은 마찬가지이다.
내가 사는 한국의 현실, 이를테면 아내, 며느리, 딸의 역할로 사는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안다.
사실 나는 결혼 전까지 여성다움이나 여성 차별에 대해 이렇다 할 피해를 본 적은 없었다. ⠀
그건 아마도 내가 살아온 세계가 얄팍했다는 이유겠지만,
책에서 강조하는 ‘사회가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강요하고 어릴 때부터 학습 시켜 내 딸이 걱정된다.’는 어느 여성 분의 에세이는 공감이 좀 쉽지 않았다.
(나에게만 해당할 수도. 페미니즘의 기본 정신 외에 다른 부차적인 것들은 여성마다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그것이 불편해 딸의 유치원 교사에게 말했다지만, 역으로 유치원 교사는 같은 여성으로 이것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 그녀의 입장 또한 고려해봐야 할 터였다.
나는 여중, 예고, 여대를 나왔지만, 그 누구도 내게 여자다워야 한다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내 스스로 간편하다는 이유로 남자처럼 머리를 커트하고 다녔다.
아, 한 번 공중 화장실을 가는데 경비원이 내게 “남자예요, 여자예요.”라고 물은 적은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기분이 좀 묘하다.
치마는 내가 좋아서 입는 것이고, 살이 쪄도 부담 없이 걸칠 수 있어 오히려 바지보다 선호한다.
다리를 쩍 벌리지 않는 건 보기 흉해서이고, 바깥에 나갈 땐 브라를 하고, 투박한 팔자걸음으로 걷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원하는 나의 천성적인 기질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내게 강요하는 여성다움은 이런 겉에 보여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성 혹은 여성다움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느낄 때는, 아내일 때다.
남편은 가부장적인 사람이고, 시부모님은 고루하신 분들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아내로서, 며느리로서의 의무는 응당 존재하겠지만, 내 가정에서 나는 자존감이 추락하는 것을 경험한다.
바로 ‘여성다움’ “순종, 복종” 등이 이런 곳에서 강요되고 압박받기 때문이다.
여성이니까 집안일, 가사일, 설거지, 출산, 양육하는 것이 마땅하고, 거기에 일을 해 돈을 번다해도 이 같은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나는 일도 하지 않으니 이 책에서 주장하는 ‘자기 일’을 갖고 당당한 여성이 되라는 지침도 내게는 fail과 마찬가지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시부모님이 아프면 그것까지 책임져야 하는 의무도 며느리인 내 어깨에 있다.
언젠가 시아버님이 당신이 병들면 나더러 수발들라고 언질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나는 이 가정에서 가장 하위에 랭크된 '여성'이었고,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며느리'였다.
책으로 돌아와 보자.
이 책은 ‘걸업’이라는 UN 여성 자선 단체와의 협업으로, 사회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55명의 여성들의 글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인종, 종교, 국가, 직업 등이 다른 여성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솔직히 내게는 좀 이질감이 느껴졌고, 그들의 수기는 페미니즘과 별개의, 서바이벌 투쟁기처럼 읽혀졌다.
그런 거리감은 책을 이해해갈수록 점차 해소되었다.
아픔과 상처가 녹아진 진실한 수기들은 내 마음에 공명했다.
짤막하지만 너무도 처절하게 기록한 92년생 트렌스젠더 찰리 크랙스의 고백.
죽음에 가까운 ‘불안’의 병을 앓고 있지만 여성일 수밖에 없어 마주한 냉정한 현실에 괴로워하던 디자이너 샬럿 엘리자베스.
“불안감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불안은 심각한 질병으로 좀 더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젊은 여성들이 내는 우려의 목소리는 검은색 정장 차림 중년 남성들의 걱정만큼 진지하게 수용되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 87)
윌리엄 왕자의 아내 케이트 미들턴은 출산 7시간 만에 풀메이크업에 완벽한 몸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 전통은 다이아나 왕세자비 시절에도 있었다.
몇 년 전엔 중국 배우 안젤라 베이비가 출산 후 얼마 안 되어 기자들 앞에 미니스커트 원피스 차림으로 선 사진도 본 적 있다.
왜 여성들은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꾸미며 완벽하게 보여야 하는 걸까.
(연예인의 경우엔 여러 동기와 계산이 깔려 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일반적인 여성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출산 후 여성은 그렇게 완벽하게 보여질 수 없다.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는 여성의 몸이 실은 찢어져 있고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첨예하게 적는다.
그녀는 세상이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그로 인해 얼마나 여성이 희생당하는지를 지적한다.
책은 페미니즘의 다섯 단계라고 하여, 각각 깨달음 (epiphany), 분노 (anger), 기쁨 (joy), 행동 (action), 교육(education)의 항목으로 접근한다.
각 카테고리에 맞춰서 편집된 수기들의 저자 대부분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바로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활발히 페미니즘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 중에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저자 헬렌 필딩, 엠마 왓슨 등 유명한 이들도 있다. 이전 서평 책이었던 ‘사랑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의 돌리 앨더튼의 이름도 보인다.
겉으로만 봐도 화려하고 더는 바랄 것 없는 여성들이 직접 경험하고 뼈저리게 느낀 차별과 부조리는 단지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여성이기에.
그들의 이야기가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목소리다.
처음엔 페미니즘에 대해 무덤덤하게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욱 치열한 전선에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거대한 차별과 부조리의 벽을 목격하면서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지구상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차별이나 억압이나 공격으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 (p.286)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 여성들의 안녕을 빈다.
#나만그런게아니었어 #윌북 #윌북서포터즈3기
나는 큰 꿈을 품은 여성이 이 세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두려움 없이 자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게 페미니스트라면, 좋다,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라.(침웸웨 치웨자 p. 58)
페미니즘 운동의 목표는 지구상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차별이나 억압이나 공격으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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