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인에이블러의 고백
앤절린 밀러 지음, 이미애 옮김 / 윌북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내가좋은엄마인줄알았습니다 #안젤린밀러 The Enabler: When Helping Hurts the Ones You Love by Angelyn Miller (1988, 2001, 2008) #윌북 (2020)

Enabler 인에이블러 (조장자): 누군가를 도와주고 있다고 본인은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의존하게 함으로써 의존자가 자율적으로 삶의 과업을 수행하여 성장할 수 있는 기회들을 박탈하는 사람. (김태경 교수 p. 9)

원제목과 번역 제목의 괴리감이 살짝 드는 이 책은, 저자가 1934년생에 현재 80대 여성이란 사실을 참고로 해서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인에이블러라는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비록 저자의 나이가 많지만, 이타적 정신으로 나를 희생해 누군가의 정신적, 육체적 의존자가 되고자 하는 인에이블러는 시대에 상관없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특히 가정에서 그런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마 역자는 이러한 제목을 취한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의 초중반에 접어들면서 인에이블러와 내가 아는 헬퍼의 개념이 조금 헷갈렸다.

내가 가진 선한 마음과 관대함으로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사랑해주고 포용해주고 돕는 ‘헬퍼’의 의미를 변종시켜 퇴색한 것은 아닌지, 그 고결한 행위를 회의적으로 본 것은 아닌지, 내게 그리 분명치 않게 다가온 인에이블러의 의미에 맞물려 독서 초반에 어려움을 겪은 건 사실이다.

이 책은 심리학 관련 학술 도서는 아니다. 그래서 인에이블러라는 개념이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생겼는지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없다.

참고 문헌이나 논문으로 어떤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보단 저자가 경험하고 만난 이웃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과학적 설득보다는 마음으로 전하는 수기에 가깝다. 정확성은 아쉽지만 저자의 생생하고 진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례를 읽어보면 저자는 본래부터 따뜻하고 관대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런 그녀가 마당에 아끼는 소나무 한 그루 베었을 때 미친 듯이 광분했던, 우울증과 불안증을 앓는 남편 스탠과, 음료수에 해로인을 탔다고 의심하며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아들 존에게 처음으로 조장자의 역할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녀는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배려하려고 애쓰지 않고 본능적으로 옳다고 느낀 일’을 했는데 그들의 행동은 예상밖이었다. 정말 달라진 것이다.

“용서할 수 없으리만큼 잔인한 말을 퍼부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를 도와주려고 노력한 긴 세월 중에서 처음으로 그를 ‘진짜’ 도운 것이다.” (p. 67)

인에이블러들이 가장 회복해야 할 것은 ‘자존감’이며, 다른 사람들의 편의를 맞춰주다가 신체적 학대를 당하게 되는 ‘용기’

(여기서 인에이블러로서 감당하고 행하는 모든 행동의 발현 또한 용기라고 저자는 말한다.)도 오직 자신을 지키는 것에 써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p.111)

나는 책 본문 중에서 ‘타협’에 관한 부분에 가장 공감했다.

"타협은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 끊임없이 순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행동은 자기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더욱 무시하게 만들고, 자기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기 중심적 성향을 더욱 키운다.

다른 사람에게 늘 순응하는 것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p. 113)

나도 주변에 친분 있는 선배 언니가 있다. 곧 50이 되는 그녀를 만나면 한참 후배인 나는 기가 눌려 뭐든지 타협하게 되고, 싫어도 순응할 수밖에 없어진다.

프랜차이츠 커피점에 가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리하게 부탁하는 그 사람의 장단에 맞춰 주문해줘야 하는 건 내 몫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는 게 피곤했고 괴로웠다.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따금 톡과 문자를 보내 안부를 살피는 척 얼굴 보자고 한다.

만나면 그녀의 자기 자랑, 과시, 그리고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내 개인에 대한 (껄끄러운) 관심 등을 꺼내놓고 몇 시간 동안 대화하며 보낸다.

물론 그녀와의 시간이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좋은 대화도 오갔다. 내가 약해졌을 때 그분이 건넨 위로는 정말 감사했다. 연장자의 미덕이 느껴지는 시간도 존재했다.

하지만 원래가 자기중심적인 그 사람과 대화하면 나는 늘상 피곤하고 불쾌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사람의 관계가 무 자르듯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절이 중을 떠나는 것보다 그곳을 좋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분이 외롭고 힘들어서 그러실거라 이해하고자 했다. 내 마음의 아량이 너무 좁아서, 사랑이 충만하지 않아서 그분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책하기도 했다. 그분이 내 감정과 명예를 상하게 하는 ‘실수’를 했을 때도 용서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서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에이블러의 가장 큰 덕목은 용서이다.... 그들(상처를 받은 인에이블러)은 용서하는 척하면서도 의존자들에게 평생 겁을 먹을 만큼 죄의식을 듬뿍 쌓아줄 수도 있다.” (p. 117)

참아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담아두고,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끊을 수 있는 관계로서 잠재적 위험한 위치에 둔 채 나는 그분과 아직도 줄다리기를 하는 심정이다. 나의 위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감히 인에이블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할 만한 그런 그릇이 못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내가 누군가의 정신, 육체적 만족을 위해 소비되고 그럼에도 기꺼이 돕는 마음으로 희생하나 상실감이나 상처, 잘못된 자존감 충족 등을 느낀다면 우리는 인에이블러가 될 수 있다.

인에이블을 에이블로 바꾸는 것은 지금의 삶을 사는 내게 달려 있다.

아, 나는 그분의 연락에 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사람이 스스로 바꾸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뿐이다.” (p. 92)

타협은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 끊임없이 순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행동은 자기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더욱 무시하게 만들고, 자기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기 중심적 성향을 더욱 키운다. 다른 사람에게 늘 순응하는 것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p. 113)

사람이 스스로 바꾸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뿐이다. (p.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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