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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 - 개정증보판 ㅣ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 1
이용재 지음 / 멘토프레스 / 2007년 11월
평점 :
표
지부터 수수하지만 기품이 느껴진다. 힘있게 내려친 필기체 제목하며 거친 스케치로 그려낸 아버지와 딸. 그리고 일관된 채색과 깔끔히
기울어진 빌딩과 구획된 설계도. 이른바 건축가의 철학과 '깡'이 표지서부터 전해지는 듯하다. 건축가들은 실학자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예술가이기도 하며 어려울 땐 사업가이자 승부사가 되기도 한다. 전에없다면 새로이 만들어내고, 안되면 되게한다. 디자인을
이리 비틀고 재료를 수정하고 공법을 바꾸고... 무수히 많은 난관이 있지만 결국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의 깡이
담겨있다. 그 결과물인 건축물에는 철학이 담긴다. 우리가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던져졌듯이 여러 건축에는 역사가 있고 자연이 있고
의도가 있고 그 중심이 되는 건축가의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다.
책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그러하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매력적인 책이다.
첫
째로, 제목에 충실하다.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 내가 정말로 아버지를 따라나선 듯 어설프지만 건축물을 요리조리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이래뵈도 건축과 대학원에서 건축평론까지 전공한 공학도. 책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건축, 근현대사를 몸에 새기다'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건축물이 생기게 되었는지 딸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독자는 딸이 되어 책을 읽고 잠시 허공을 응시한다. 저 굳건한 움직이지 않을 법한 덩어리와, 터와, 공기가
세월을 거슬러 높이 올라가기도 내려오기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예를들어 국회의사당을 견학갔을 때에는 아버지께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차례로 들려주신다. 고종의 헤이그특사파견으로 인해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전환된 이야기, 해방 후 조선총독부가 어떤
건물로 쓰이며 정체성의 부재를 앓아왔는지, 그런 와중에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의도로 국회의사당이
만들어지게되었는지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다. 건축물에도 역사가 있고 정치가 있음을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인 의견과
절차적인 진행은 비록 부족할지라도 나는 지금 아버지를 따라 나선, 잠시는 포근함에 묻어도 될, 작지만 날카로운 안목의 딸이다.
아버지의 주관이 담긴 이야기들을 부담없이 듣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않으면 입술 내밀고 톡톡 쏘아붙이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무게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버지가 이 건축여행을 통해 딸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역사도 아니고 건축도 아니고 바로
'인생'이라는 걸 마지막장을 넘길 즈음에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 건축가가 태어나고 역사를 통해 건축물이 태어난다.
둘째로, 기존의 건축 교양서들과는 다르다.
서문에서 저자는 딸을 인문학적인 자녀로 만들기를 약속한다. 인문학적인 자녀는 어떠해야 하는가? 왜 하필 건축여행인
것인가?(글쓴이의 메인 전공이기도 하였지만) 기존의 건축교양서들은 시대별로 건축물을 모두 나눈다. 그리스 양식, 이슬람 양식,
비잔틴 양식, 르네상스, 그리고 고딕 양식 등등. 그리고 예시들을 마구 쑤셔넣고 종합하고 그들의 구성상 특징을 요약하고. 하지만
저자는 딸이 경험을 넓히고 생각을 깊게하기를 원하는 한 아버지이다. 시대별로 따지고 특징을 외울 일이 아니라 건축물이 세상에
던져진 이유를 자꾸만 고찰한다. 1장에서는 근현대사를 조명해주고, 2장에서는 시대를 빛낸 인물들을 기리는 건축물에서 인물을 들여다
본다. 사이사이의 딸과 아버지의 담화는 귀엽다.
~이로써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드라마틱한 대립은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은 점차 외세에 시달리게 된다.
"딸아, 정치란 것이 이리 어려운 겁니다. 민심은 안중에도 없이 이권만 따졋다가는 패가망신이 아니라 패국망신이 됩니다."
"아빠, 아직 을미사변에 대해서 말 안 하셨잖아요."
"휴... 아빠가 너무 흥분해서 말했더니 진이 빠집니다. 불어넣어주세요."
"아자자자자자, 이얍!"
"좋습니다. 다시 힘이 납니다. 홍삼주스는 엄마나 마시라고 합시다."
3
장 '건축, 아트와 실용주의의 유쾌한 만남'에서는 좀 더 현대의 건축물에 다가선다. 3장에서는 역사적 필연성, 인물을 기리려는
의도 등은 최대한 배제하고 오로지 건물의 용도에만 집중하여 어떠한 디자인을 왜 그렇게 뽑아내었는지 자세히 조명한다. 이 때
건축가는 빛이 난다. 건축물의 디자인은 곧 건축가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전경
사진출처 http://goo.gl/R18vSd
위
주한프랑스대사관은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다. 그가 '집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라고 말했듯이 좌측의 브리지의 선들이 살아
꿈틀거린다. 서까래와 기둥 등에는 전통적인 아름다움도 묻어있다. 한국의 얼이 살아있는 것이다. "건축은 인간에의 찬가다.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바쳐진 또 하나의 자연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빚어놓은 엄청난 손짓이자 귀한 사인이다."
이
처럼 건축물에 대해 각 건축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철학을 투영했는지 건축가들의 말이 빠짐없이 장마다 담겨있다. 건축이
있음으로써 자연이 완성된다는 이들도 있고 과학과 엄격한 자료에 근거하여 건축을 하는 렘 콜하스 같은 이들의 작품도 있다.
대한성공회 성가수녀원에는 더 큰 철학을 위해 자신의 철학과 기존의 공식을 양보하기도 한 김원같은 건축가들도 있다.
"그런데 한옥 대문은 왜 살리는거예요. 현대식 대문으로 바꿔주세요."
"
안 됩니다. 이 대문은 단순한 문이 아닙니다.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이고 회한입니다. 한편으로는 성공회가 토착화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습니까. 성공회 대성당의 주교관도 한옥이고요. 이러한 철학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거기다 이 한옥 대문이 새
벽돌건물을 자연스레 감싸 안을 겁니다."
건
축가의 뚝심과 승부수, 합리성은 물론 예술가의 기질, 대의를 모두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심지어 담양 정토사 무량수전을
설계한 김개천은 기와 지붕도 불탑도 없이 네모반듯한 시멘트 건물로 법당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독일의 설치미술가 허먼 마이어
노이슈타트는 먼 타국 땅 대한민국 안양시까지 와서 숲 속에 알지못할 원통들을 짓는다. 이른바 '리볼버'(권총). 원통으로 둘러싸인
12평 남짓의 공간에서 창으로 밖을 바라본다. '창으로 본 숲속 풍경은 현실인지 허구인지 불분명하게 다가온다. 창은 단순한 창이
아니라 스크린이 된다.' 이렇듯 건축은 안과 밖을 단절하는 경계가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수단으로도 이용됨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셋
째로, 사람사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건축을 매개로 하여 여행이 지속되지만, 사실 이야기의 대부분은 '건축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건축가들이 어떤 고난을 마주하고 이겨냈는지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있다. 늙은 장수의 젊을 적 무용담을 들려주듯
건축가들의 스토리는 흥미진진하다. 역사와의 갈등, 자연과의 갈등, 그리고 돈 문제 혹은 시공사와의 갈등까지. 건축가들은 뚝심으로
밀어부치기도 하고 양보하여 합리적인 결정으로 방향을 수정하기도 한다. 건축물의 디자인과 공법에만 충실하는 것보다 '건축가'에
집중한 아버지의 안목이 훌륭하다. 이것이 진정 딸에게 해주고 싶은 인문학이 아닐까? 모두 똑같은 현실 속에서 다름을 찾는 것. 그
다름은 땀에 절고 값지고 아름다워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 공간을 거슬러 내면을 보지 않으면 쉬이 알 수 없는 그 이야기들을
좇는 과정이 건축여행에 담겨있다.
"
한국의 아버지들 다 어디로 가셨나?" 필자는 이 점에 불만이 많다. 자고로 아버지는 자녀의 인문학 교육에 신경 써야 된다. 아무리
외부에서 고개숙인 가장이니 돈 버는 기계니 떠들어대도 스스로 가족 구성원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인문학 교육이라는
것도 기실 대단한 게 아니다.그저 자녀와 이야기하고 유머를 즐기면서 짬짬이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노력하면 된다.
새
삼 그를 아버지로 둔 따님 분이 부러워진다. 이 책을 통해 주변에서 쉽게 지나치는 건축물도 두어번 더 눈길을 주고 서로 눈을
마주치려 노력한다. 그 건축물의 물생物生을 읽으려 노력하고 있다. 쉽지는 않은데, 새롭다. 그 과정에서 경건함을 느끼고 나를 한 번
더 되돌아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