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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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는 재미는 쏠쏠한데, 추리소설을 보는 즐거움은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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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 몽키스 구단 에이스팀 사건집
최혁곤.이용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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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팬의 사심을 담아, 근래 읽은 책들 중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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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앞이었다. 나는 현관 옆에 위치한 바깥 화장실로 기다시피 들어갔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속에 것을 모두 토해냈다. 반나절 묵은 시큼한 맥주와, 함께 딸려온 파전 건더기가 물풀 가득한 끈적한 도랑 모양을 이루며 변기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을까. 라는 생각으로 무료한 하루를 보낸 나는 다음 날 학교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각진 코를 찾아갔다. 가끔 교내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긴 했어도 서로 아는 체를 한 적은 없었던 터라 교실로 찾아온 나를 보는 그의 표정에 뜨아함이 묻어났다.

 

"웬일이냐?"

 

나는 멀뚱해하는 그의 얼굴을 잠시 구경한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 알고 있었냐?"

 

"."

 

"너희 엄마랑 쓰레기..."

 

그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멍청한 거야 뭐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러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잠시 뒤, 우린 학교 운동장 응원석에 나란히 앉았다. 나무 그늘 아래이긴 했어도 오전 내내 달아오른 열기에 시멘트 바닥이 후끈했다.

 

"너희 아빠랑 새엄마가 어떻게 같이 살게 된 건진 알고 있니?"

 

각진 코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삐딱한 자세로 물었다.

 

"대충 짐작 정도만."

 

나는 짧게 대답했다. 엄마가 죽은 뒤 쓰레기는 클럽 살림을 챙기면서 동시에 나를 돌볼 보모가 필요했고, 어쩌다 만난 늙은 호빵은 거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내 추측은 딱 거기까지였다. 더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이틀 전까진.

 

"그럼 뭐, 얘기 다 된 거네."

 

그가 방향을 바꾸어 운동장 건너편 먼 산을 쳐다봤다. 발아래 운동장은 뜨문뜨문 흩어져 공을 차는 애들을 제외하곤 대체로 한가했다.

 

"쓰레기를 -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할게. 그게 너도 듣기 편할 것 같고- 먼저 만난 건 이모가 아니라 우리 엄마였지. 이혼하고 나서, 뭐 그 전인지도 모르고, 가끔 친구들이랑 너희 가겔 갔는데 아마 그때 쓰레기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아. 몇 번 만나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을 거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네 죽은 엄마얘기도 나왔을 거야. 우리 엄마 성격에 누가 아무리 좋아도 가진 돈 싸들고 자원봉사 하러 가고 싶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쓰레기한테는 끌렸던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적당히 묘안을 낸 것이 이모를 너희 집 식구로 만들고 엄마는 가끔 얼굴 비추면서 쓰레기랑 계속 관계를 가지는 거였지. 누가 봐도 이상한 모양새가 아니니 위험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 게다가 당시엔 이모도 변변한 자식 하나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죽은데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어하던 시기였으니 자기들 딴엔 썩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 내 생각이긴 하지만 애초부터 둘은 행여 그들 사이가 들킨 다해도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이니까."

 

갸름한 턱이야 녀석이 더 잘 알 테지만 어쨌든 쓰레기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나는 잠시 상념에 빠졌고 그 모습을 본 각진 코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생각해보니 미안하네. 난 네가 다는 아니더라고 어느 정돈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나는 그를 마주보았다. 짐짓 비장해 보이는 그의 얼굴 뒤엔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은 것에 대한 우쭐함이 슬쩍 숨어있었다. 나는 거기에 대고 어제 하루 방안을 뒹굴 거리며 내린 결론을 확인시켜줘서 고맙다는 얘긴 차마 할 수 없었다.

 

대충 얘기가 끝났다 생각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했다. 각진 코도 따라 일어서나 했는데 갑자기 녀석이 할 얘기가 더 있다며 다시 앉아보라고 했다.

 

너 지난 토요일에 중년 부부 한 쌍이 쓰레기 찾아간 것 알고 있지?”

 

룸에 앉아 거드름 피우던 그 부부 모습이 떠올랐다. 맞은편에서 쩔쩔매고 있던 쓰레기 얼굴과 함께.

 

. 근데 넌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누나한테 들었지.”

 

마스카라가 흘려준 모양이었다.

 

그 부부 거기 뭐 하러 간 건지는 알고 있니?”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돈 다발. 아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각진 코가 얘기에 앞서 잠시 뜸을 들였다. 녀석 답지 않다. 방금 전언니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제 엄마 얘길 했을 때보다 더 신중한 모습이었다. 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가 어렵게 입을 뗀 건 그때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한 달 전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토요일 오후로 나를 데리고 갔다. 클럽 옥탑방 부엌. 마치 뭍으로 내팽개쳐져 숨이 막 끊기기 직전의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던 그녀를 본 바로 그 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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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동안 쭉 기다리고 있습니다...천천히 가시더라도...조금은 올려주셨으면...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큰 도로에 면한 지하 만화방에 들러 책을 돌려주고 나왔을 땐 주위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띄엄띄엄 늘어선 가로등에선 희미한 빛이 어슴푸레 스며 나오고 있었고 인근 가게들 간판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불빛과 어울려 특유의 밤거리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도로 반대편으로 건너가 타야했지만 알싸한 밤 분위기에 홀린 나는 그냥 인도를 따라 걷기로 했다.

 

비슷한 분위기의 거리이긴 했어도 한낮 무더위 속에 걸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삼겹살집에서 새어나오는 달싹한 고기 냄새와 레코드가게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김완선의 노래, 그리고 전파상 쇼윈도에 진열된 TV를 통해 보이는 드라마 속 여배우의 열연에 나는 한껏 들떴고, 건물사이로 난 좁은 골목 안 여관을 향해 두 손을 꼭 잡은 채 걸어 들어가는 커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처럼 보였다. 나는 밤이 선사하는 여유로움에 완전히 취했고, 이 길이 그냥 이대로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낭만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황홀경은 오래가지 않았다. 느리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어느 덧 그녀가 운영하는 양품점에 도착해 있었던 탓이다. 그녀의 가게는 고만고만한 보세 옷가게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주로 30~40대 여성들을 위한 화려하지만 촌스러운 옷들을 다루고 있는 덕에 주위가게들에 비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문을 열자 안쪽 카운터 뒤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던 가게 주인이 보였다. '갸름한 턱'. '각진 코'의 엄마이자 새 엄마의 여동생. 둘은 자매이긴 했어도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같이 있을 땐 그 외모의 차이가 더욱 도드라졌는데 동생이 언니보다 몸매며 얼굴이 훨씬 예뻤다. 특히 계란형 얼굴과 늘씬한 목 사이를 있고 있는 날렵한 턱은 그 우월의 차이를 압도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배다른 자매. '갸름한 턱'을 처음 봤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을 사실로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각진 코'가 마치 자신의 학년 석차를 얘기 하듯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중요해?'

 

긴 이야기 끝에 녀석이 짧게 덧붙인 말이었다. 자신의 가정사를 여자 탤런트의 미모 순위를 매기는 것보다 하찮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와 나는 죽이 잘 맞았다.

 

 

갸름한 턱이 단정한 자세로 일어서서는 기계적인 미소로 나를 맞았다. 각진 코가 늘 '가식으로 도배된' 이라고 얘기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 왔니?"

 

그녀는 흰색 원피스 차림이었고 허리엔 뱀처럼 생긴 가는 벨트가 조이듯이 둘러져 있었다.

 

", 가져갈 것이 있다 해서요."

 

", 그래 잠깐만 기다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카운터 뒤의 연결된 방으로 사라진 그녀가 얼마 뒤 한 손에 종이가방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아침에 시간 나서 부친 건데 언니 갖다 줘. 비닐 팩에 싸서 넣어 놨으니 대충 데워 먹으면 될 거야."

 

그녀가 해물파전이 든 종이가방을 내게 건넸고 나는 전달받은 가방을 손에 들고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아직 다른 용건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시답잖은 배달 심부름이나 하자고 꿀 같은 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기까지 온건 아니었다.

 

"여기 이거..."

 

그녀가 풀로 봉해진 편지 봉투를 카운터 서랍에서 꺼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새침한 표정과 함께 내게 내밀었다.

 

"아저씨한테 갖다 줘."

 

여기서 아저씨란 우리 클럽에서 동남아 순회공연 가수 타이틀로 무대에 서고 있는 그 사람이다. 나는 그를 항상 '동남아'라고 불렀는데, 늘 초췌한 표정에다 지저분한 구레나룻은 언제나 좌우길이가 맞지 않았으며 무대에 서지 않을 때의 후줄그레한 차림까지 더하면 도저히 아마추어 가수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갸름한 턱과 그 사이에서 이런 연락책을 맡기 시작한 것이 약 세달 전인데, 도대체 그의 어떤 면에 갸름한 턱이 끌리게 되었는 지는 그의 덥수룩한 곱슬머리가 자연산인지 아니면 고급 미용실 파마 덕인지 만큼이나 내겐 미스터리였다.

 

"그리고 이건 수고비"

 

그녀가 천 원짜리 다섯 장을 쥐어주었다. 내가 일요일 오후의 단잠을 포기하고 버스 두정거장을 걸어 여기까지 온 진짜 이유였다. 편지 한통을 전달하고 받는 심부름 값치고는 꽤 큰돈이었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년 전 이혼한 남편으로 부터 받은 상당한 액수의 위자료에 지금도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의 생활비를 받는 그녀에게 이까짓 푼돈이 아쉬울 리가 없었다.

 

"따로 전해드릴 얘기는요?"

 

그냥 가기 머쓱해 인사대신 던진 질문이었다.

 

"없어."

 

용무가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돌아서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갸름한 턱이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 아빠한테도 안부 전해줘"

 

나는 '그럼 수고비를 좀 더 주셔야죠.'라고 하려다 말았다.

 

 

손에든 종이가방이 거추장스러워 올 때는 그냥 버스를 타고 왔고, 클럽에 들러 갸름한 턱이 부탁한 일을 마치고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준 파전을 안주삼아 가게서 들고 나온 맥주를 들이켰다. 이내 잠이 쏟아졌다. 긴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아침에 깼을 때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어제 먹은 해물파전때문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학교를 안 간 적은 많지만 아프다는 핑계로 빠져본 적은 없어서 일단 등교는 하기로 했다. 하지만 1교시를 지나자 머리까지 깨질듯이 아파왔고 결국 교무실을 찾아갔다. 사정을 얘기하고 조퇴를 신청하자 담임이 한심한 녀석이라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꺼지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울렁거림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바닥이 아닌 창밖 먼 곳을 보려고 노력했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지나가는 전봇대 개수를 세고 사람들의 옷차림에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평소 자주 지나다니는 길가의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고, 이제 다왔다는 생각이 들자 신기하게도 두통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갸름한 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손이 누군가의 허리에 둘러져 있었고 상대는 동남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속에 있는 모든 걸 게워내고 싶어졌다. 갸름한 턱은 어젯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던 그 커플이 손을 잡고 들어가던 여관 골목을, '쓰레기'와 함께 부둥켜 안은 채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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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진 코'가 내 방을 마치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한 건 이 집 자물쇠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였다. 다세대 주택 1층 구석에 위치한 어두컴컴한 쪽방인데다 딱히 돈 되는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탈이 난 채로 두고 있었는데, 한 손에 만화책을 든 채 낄낄거리며 누워있는 녀석을 보니 수리비가 좀 들더라도 고쳐놓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는 나와 같은 나이에 다니는 학교도 같았다. '각진 코'란 별명은 그가 틈날 때마다 엄지와 검지로 코를 위로 세우듯이 문지르는 버릇 때문에 내가 붙인 별명이었는데, 그는 그런 식으로 자꾸 비비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코가 높아질 것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좀 음흉한 구석이 있는데다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애들 흉내를 내느라 가끔 건들거리긴 해도 바탕 자체가 나쁜 녀석은 아니어서, 나는 그가 새엄마의 여동생 아들이란 사실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는 좀 더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 왜 왔어?"

 

각진 코의 옆에 쌓아올려진 만화책들 중 한권을 집어 들며 내가 물었다. 고행석의 불청객시리즈였다.

 

"누나 만나러 갔었는데, 목욕 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잠깐 신세지러 왔지"

 

누나란 '마스카라'를 가리켰다. 그녀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녀석 혼자서 쫓아다닌 지 좀 됐다.

 

", ... 오늘은 꼭 한번 해야 되는데."

 

"아직이야?"

 

". 줄듯 하면서 자꾸 튕기네."

 

녀석이 몇 번 같이 자자고 졸랐었는데 잘 안됐나 보다.

 

"근데, 어디가 그렇게 좋아?"

 

"딱 봐도 죽이게 생겼잖아. 테크닉도 끝내줄 것 같고."

 

각진 코의 손이 느슨해진 벨트 아래로 들어가더니 불룩해진 팬티 위를 쓰윽 한번 훑었다.

 

근데...“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가게 오는 아저씨들 매일 상대하다 막상 네꺼 보면 물건 같기나 하겠냐?”

 

각진 코가 발끈했다.

 

"미친 새끼. 너 내꺼 봤어?"

 

나는 울그락불그락하는 그를 앞에 두고 '안 봐도 뻔하지 뭐'라는 말을 더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러면 진짜로 꺼내 보여줄 기세다. 별로 유쾌한 그림은 아니다. 남자 둘만 있는 좁은 방에서.

 

"근데, 좀 전에 들어와서 나 있는 거 슬쩍 보고는 다시 나갔다 왔잖아."

 

흥분을 가라앉힌 각진 코가 보고 있는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누구야?"

 

모자라 보이긴 해도 눈치하난 귀신같다.

 

"교회 친구. 같이 왔는데 그냥 돌려보냈어."

 

"여자?"

 

"."

 

녀석이 손에 든 만화책을 접더니 '호오' 소리를 내며 내 쪽을 쳐다봤다.

"괜히 미안하네. 나 때문에."

 

맘에도 없는 얘기였다. 그는 곧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내가 먼저 오자고 한 것도 아니니까."

 

이번에는 그가 벌떡 일어섰다.

 

"이 새끼. 진짜 미친 놈 맞네."

 

그가 쥐고 있던 만화책이 바닥에 팽개쳐지듯 엎어졌다.

 

", 여자가 제발 좀 따먹어 달라고 남자 혼자 있는 집엘 찾아오는데, 그런 기횔 걷어 차냐. 븅신 새끼야."

 

착한 녀석이긴 한데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나는 못들은 척 그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고 잠시 씩씩거리던 녀석도 늘 그렇듯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엎어놓은 만화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만화방에서 빌려 온 스무 권 남짓 한 만화책들을 모두 끝내고서야 각진 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은 그가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책들로 인해, 마치 관객들이 먹다버린 음료수 캔이며 과자봉지들로 뒤 덥혀진 영화관 객석만큼이나 어지럽혀져 있었다.

 

'가려고?"

 

". , 설마 여태껏 때 밀고 있진 않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씨익 미소가 번졌다. 아마 제멋대로 상상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구제불능인 놈이다.

 

"만화책 좀 이따 갖다 줘."

 

그가 나에게 명령하듯 말하고는 방문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뭔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돌아서서는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참, 엄마가 아침에 해물파전 만들어 놨다고 이따 와서 가져가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이 더운 여름에 다른 음식도 아니고 웬 파전이람.' 하고 생각하고는 보고 있던 고행석의 '노래하는 불청객' 열두 번째 권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 샌가 잠이 들었나 보다. 깨어보니 방안의 뜨겁던 공기가 한 풀 꺾여있었고 창밖으로는 어스름이 져 있었다. 옆에서는 잠들기 전에 틀어놓은 선풍기가 이 일이 마치 자신의 숙명이라는 듯 묵묵히 날개를 돌리고 있었다. 다시 이대로 누워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해야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어지럽던 방안을 대강 정리한 뒤 각진 코가 빌려온 만화책을 챙겨서는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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