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 (2disc)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알렉산드르 카이다노프스키 외 출연 / 영화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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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되는 경험의 늪에서 희망을 후회하고, 한탄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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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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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기 두 여성이 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인 19세기의 영국에 사는 동년배의 두 여자. 그들은 서로를 속이기 위해 만나지만 곧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진실과 의도의 배를 가르고 진실한 욕망을 끄집어내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부드러움, 주체할 수 없게 서로를 끌어당기는 애무, 그리움.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넘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는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되는 때이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가 동성 연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배경으로 급진적인 사랑을 다루고자 하진 않습니다. 레즈비언 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고 해서 그런 선이해를 갖고 접근해야 할 지적 소설이 아니라 알아야 할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몇 번의 급격한 반전을 엔진으로 부지런히 이야기를 견인해 나가는 장르 소설입니다.



 시골이라 할만한 브라이어에 사는 막대한 상속녀 모드 릴리.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정신병원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그녀.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처방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삶을 마무리 한 광기 들린 어머니. 모드는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고(그녀를 낳다가 죽었으니) 알고 있으며 언젠가 어머니처럼 미쳐버릴 것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죽은 생모 대신 병원의 간호사들을 어머니처럼 따르며 자랐던 어린 시절. 어느 날 삼촌이라는 사람이 그녀를 데리러 옵니다. 오래 전부터 모드를 데려가기 위해 간호사들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양육하게 했던 것입니다. 브라이어의 대저택에 있는 누구도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모드는 전염병 같이 불결하고 야생동물처럼 예의를 모르고 훈육할 수 없는 구제불능일 뿐입니다.



 삼촌은 야심만만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소설들에 관한 완벽한 하나의 책을 만드는 것. 영원히 끝나지 않을 작업입니다. 그 일에는 조수가 필요했고, 모드는 그 일을 위해 삼촌의 고요한 저택으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저항도 해봅니다. 도덕적 판단을 해서가 아니라 억압적이고 어두운 곳에서 어린애다운 고집으로 반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항을 완전히 멈추고, 그 끈적끈적하고 소용돌이치는 물살 속으로 몸을 내맡”깁니다. 그녀가 “유순해진 것은 채찍질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 아”닙니다. “인내심의 잔인함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미친 자의 인내심만큼 끔찍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드는 그곳에 시간과 분위기, 그녀의 일이 길들여집니다. 삼촌에게 책을 읽어주고, 삼촌의 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항상 가죽장갑으로 손을 감싸고 있으며, 적나라한 그림과 문장들을 기억 세포 안에 보관합니다. 그녀에겐 책 자체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의 가치를 가늠할 때도 책을 기준으로 해야만 이해할 수 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낯익은 활자체입니다. 그래서 리버스 씨와 런던(모드의 눈에 런던은 우선 “글자투성이”의 도시입니다)으로 도망을 치게 되면 “나 자신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형태의 삶을, 아니 정해진 형태가 업는, 가죽과 장정이 없는, 책이 없는 삶을 살 그곳!”에서 “종이는 금지할 것이다!”라고 다짐합니다.

삼촌이 죽고, 혼자 남은 모드는 삼촌의 많은 책을 처분합니다. 도망 치기 전 면도칼로 그어버린 책들은 태워버리고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멀쩡한 책들은 대부분 팔아 버립니다. 삼촌 생전엔 책이 상하지 않도록 페인트로 창문을 막아 종일 어두운 서재였지만 이제는 시간에 따라 흘러나오는 빛을 받아낼 수 있게 어둠을 거둬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모드. 그녀는 그곳에서 글을 씁니다. 지옥이었지만 이제는 약간의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글이었습니다. 글을 써서 책을 내는 것. 그것으로 돈을 받아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 이야기의 뼈대를 발라내고 제가 던지는 질문으로 회귀합니다. 「지옥과 마찬가지의 세상에서 책을 읽는 건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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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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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거리까지의 역사"

 『중세의 가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정확히, 1년 전이었을 테다. 같은 책을 다른 판본으로 들고 있었다. 버스 간에 앉아 오전의 찬 공기를 폐부 깊이 빨아들이며 앞으로 펼쳐질 중세의 세밀화에 귀 기울일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가독성이 뚝뚝 떨어지는 오래된 판본의 이 책은 나에게 고산이 되기 시작했고, 가을에 맞추어 완독을 하겠다는 일념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리고 1년이 되어 나는 다시, 이번엔 새 판본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계획하지 않았던 일인데, 순전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 저간의 사정은 여기 밝히지 않겠다)


 나에게 중세는 고대보다 멀게 느껴진다. 중세라는 어휘도 그렇고, 익숙하게 보거나 읽은 그 시절의 문화와 정치가 “끼여있는” 이질적 시간으로 느껴진다. 그 대상화의 느낌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꿈 자리가 묘했다. 익히 썼던대로 “중세의 아우라가 거듭 출몰”하는 기현상이 내가 눈 감을 때마다 벌어졌던 것이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부르고뉴 공국이며, 저자가 부각시키는 양 극단의 평화롭게(?) 공존하는 중세인들의 정신과 기사도적 이상의 민낯. 우주적 거리감을 주는, 영겁같은 무지막지한 우주 사이즈를 들이 밀 정도는 물론 아니고, 달 정도 되는 이질적 고향의 토질같은 것이 그 안엔 무궁무진했다.


 하위징아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기본적을 틀은, 중세를 르네상스와 명확하게 구별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고, 중세에 이미 발아하기 시작한 사상이 지금 와서 ‘르네상스’라 부르는 시대에 눈에 띄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중세는 우리가 매도하고 극복해야 할 단순한 타자가 아닌 것이다. 시적 어조의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렇게 중세의 가을, 그가 처음 영감을 받아 자주 응시하였던 “깊어가는 저녁 하늘”, “진홍색으로 침윤되었고, 납빛의 구름들 때문에 위협하는 듯이 보였으며, 구리같은 가짜 광채가 가득”한 하늘에 대한 역사서이다.



 * 번역과 판형 등에 불만은 없지만, 출판사 측의 무성의로 오탈자와 띄어쓰기 오류가 남발하는 지경이다. 눈에 거슬릴 정도니, 책의 본새를 깎아먹는 주범이 돼 버린 것이 큰 아쉬움이다. 좋은 책을 내놓고도 칭찬받기는 글러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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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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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사흘째, 계속, 꿈 속에서 중세의 `아우라`가 출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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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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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번역된 아타루의 두 번째 책이자 첫 번째 `공저`는 간주곡이나 마찬가지! ˝잘라라...˝의 덕을 톡톡히 본 듯한 출판사가 처방해 주는 진통제 같은 책이다. 효력이 그렇게 강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난 차라리 <사상으로서의 3.11>(그린비)에 수록된 사사키 아타루의 강연문을 재독할 것을 추천한다.


 비평가/철학자의 아타루의 색을 빼고 소설가이기도 한 사사키 아타루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비평가/철학자 아타루의 글을 읽는 것이 그래도 괜찮은 것은, 들뢰즈, 니체, 푸코, 라캉 등 그래도 공유할 수 있는 소통의 지점들이 산재했있다면, 소설가 아타루의 내용이 어려운 건 우리에게 아직 그의 소설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뢰즈를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철학의 어려움을 옹호하고, 난해함의 쾌락을 찬양하는 데서는 박수를 치며 좋아라 했지만 군데 군데 막히는 것은 전작을 읽을 때와의 확연한 괴리감이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후루이 요시키치의 작품을 논하는 2012년 파트 앞에 놓인 한 편의 글과 한 편의 인터뷰. 


 이 책은 사사키 아타루의 개인의 이름만을 겉에 깔고 나오기엔 무리가 있다. 대부분이 대담이나 인터뷰이며 근대 이후의 발명이라 할 1인 창작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참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데... 그리고 이 책에는 부제로써 아니면 '이 치열한 무력을'을 부제로 돌린 뒤 '아날렉타 제 4권'이라는 본령을 좀 더 부각했어야 한다. 힙합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마지막에 실린 'Back2Back'에서의 설명에도 나오듯이 협업이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 창작행위에 대해 어떤 가능성을 예감하고 있는데 그것이 책의 표면에선 가려진 것이 아쉽다. '아날렉타' 시리즈의 취지에 부합하고 그 맛을 살리려 했다면 가격이나 판형 등이 저렴해질 수 있었을텐데. 


 끝으로 나에게, 이 책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하나 꼽는다. 편 수로는 8할 정도 분량으로는 9할 이상이 대담인 이 책에서 유일한 장문의 글('후루이 요시키치, 재난 이후의 영원')의 주석 152번이다.


"물론 후루이 문학의 팔루스phallus 혹은 여성 문제를 정면에서 다룰 필요가 있겠으나 이는 다른 기회로 넘긴다. 또한 지금까지 논해온 내용에 덧붙여 '영토성', '후렴'을, 혹은 '여성이 됨'(경탄을 자아내는 걸작 <밤은 지금>이 바로 이를 그린 소설이다.), 혹은 '동물이 됨'(<남동생>이라는, 동물로의 생성 변화를 그린 소설이 있음을 지적해둔다)을 논한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를 끌고 와 후루이를 논하는 것도 가능했으며, 그렇게 논하지 않은 것을 의아해 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오히려 그게 더 타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스러운 들뢰즈=가타리는 일본어를 못 읽기 때문에 후루이 요시키치를 모른다. 불쌍한 들뢰즈. 불쌍한 가타리."(273면,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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