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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추위와 시장기는 서로를 충동질해서 결핍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추운 거리에서 혼자 점심을 먹게 될 때는 아무래도 김밥보다는 라면을 선택하게 된다. 짙은 김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콱 쏘는 조미료의 기운이 목구멍을 따라가며 전율을 일으키고, 추위에 꼬인 창자가 녹는다.
「라면을 끓이며」中 16p.
책을 선택하는 기준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작가만 믿고 구입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나와 맞지 않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기 마련이다. 출간과 동시에 말도 많았던 김훈 작가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손꼽히는 작가이긴 하지만 나에겐 너무 어려운 듯한 느낌의 작가이기도 하다. 출판도 안된 책이 사재기 논란에 휩싸이고.. 나오자마자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진입을 하고.. 물론 유명한 작가의 책이니 그만큼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는 건 사실이겠지만 어찌보면 뭐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제목과 어울리게 이 책을 구입하면 함께오는 사은품이 양은냄비였다고 한다. 라면을 끓여먹으라는 센스~!!였나보다. 하지만 이게 도서정가제 위반이 될 줄이야;;; 어쩌면 책은 책의 가치로만 판단받아야 하는데 사은품으로 독자를 현혹한 셈이고 이같은 이벤트로 베스트셀러 순위를 올리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오죽하면 사은품을 위해 책을 구입하고, 상품을 구입했는데 책이 딸려오더라 하는 우스갯 소리도 나오니까 말이다. 말도 많고 논란도 있었기에 더 읽기에 망설여졌던 책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더 궁금해 졌던 책이기도 했다.
전기밭솥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였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울타리 안으로 불러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라면을 끓이며」中 71p.
오래전에 절판된 김훈의 산문 '밥벌이의 지겨움','바다의 기별' 과 같은 기존의 산문집에 실렸던 글의 일부와 그 이후에 새롭게 쓴 원고지 400장 분량의 산문들을 합쳐서 엮은 책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작가 자신이 쓴 산문들 중에서 꼭 남기고 싶은 글들을 모은 것이라 '김훈 산문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김훈의 작품은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모든 글들이 처음이었지만 말이다.
산문은 글을 쓴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주관적인 내면,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글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밥', '돈', '몸', '길', '글' 과 같은 주제에 맞춰 그의 가족 이야기나 만난 사람들. 유년 시절의 추억 등 김훈의 어제와 오늘이 고스란히 한 권의 책 속에 담겨있었다. 짧은 문장, 짧은 내용으로 쓰여져있는 글들이긴 하지만 뭔가 모를 힘있는 문체와 깊은 인상을 남기며 어쩌면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대표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란다.
「라면을 끓이며」中 137p.
무명의 작가의 책이었다면 큰 사은품을 주고 베스트셀러 차트에 단숨에 진입한다고 해서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마 김훈 이라는 작가의 이름이기에 더 화제성에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논란이야 어쨌든 간에 내가 만난 김훈은 멋드러진 문장에 기교를 부린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 김밥 속에 단무지와 시금치 또는 우엉 한 줄만 넣어 한 두 가지 재료만으로 맛을 낸 것을 좋아하는 그 답게 솔직하면서 강한 여운을 남기는 작가로 기억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