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 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

 

「소년이 온다」中 7p.

 

책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아프다. 어쩌면 모르고 싶어서.. 알면서도 모른체 하고 관심도 없었던.. 하지만 외면해서도 잊어서도 안될 이야기다. 쉽게 말하기도 쓰기도 힘든 이야기다. 책을 읽고 나서 저려오는 가슴에 먹먹해지는 감정, 그리고 자꾸만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한동안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만큼 한장한장 넘기는 것도 너무 버거웠던 '소년이 온다'. 나는 솔직히 아주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정치에도 관심이 없고, 역사도 언제나 시험에 출제되는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공부한게 다다.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더 크게 다가왔고 또 의미하는 바가 많았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참 무관심하고 무지했구나 하고서 말이다. 물론 책의 내용은 허구다. 소설이니까.. 하지만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너무도 몰랐던 이야기. 말도 안되는 있어서도 안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니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다. 반복되는 피라는 단어가 어쩐지 가슴을 답답하게 해, 너는 다시 입을 벌려 심호흡을 한다.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

 

「소년이 온다」中 22p.

 

5월의 그 날, 중학생 동호는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친구 정대를 찾다가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하지만 사실 동호는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정대의 죽음을 목격했다. 자꾸만 쌓여가는 주검들을 기록하고 초를 밝히고, 시신이 도착할 때마다 정대일까봐 확인한다. 친구의 손을 놓고 도망가버린 자신을 원망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라는 엄마의 손을 뿌리친채.. 그리고 그날에 죽어간 소년과 수많은 희생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 영혼이 된 채 하지못했던 말을 전하고, 지독하리만큼 잔인했던 고문의 아픔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들을 가슴에 묻었던 엄마의 이야기까지.. 

 

꽃피는 5월, 그 날. 당신은 그날에 대해서 얼마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가?! 소설의 배경은 바로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 일어났던 열흘 동안의 이야기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언론 통제와 왜곡으로 인해 계엄군의 폭력은 엄폐되고 시민들의 폭력성만 언급되었던 그날의 진실들.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망자는 150여 명 정도. 하지만 암매장으로 인한 행방불명인 사람들을 고려한다면 추측컨데 사망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전혀 어울리지는 않지만.. 비공식적인 작전명은 '화려한휴가' 그리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기까지 1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바로 그날의 이야기다.

 

더이상 나는 학년에서 제일 작은 정대가 아니었어. 세상에서 누나를 제일 좋아하고 무서워하는 박정대가 아니었어. 이상하고 격렬한 힘이 생겨나 있었는데, 그건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오직 멈추지 않는 생각들 때문에 생겨난 거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눈도 뺨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를 진하고 끈적끈적하게 만들었어.

(...)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찌.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소년이 온다」中 51~52p.

 

페이지를 한장씩 넘길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계속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읽는 내내 망설였다. 또 누군가에게 꼭 읽어보라고 선뜻 권하기엔 좀 복잡한 감정이 먼저들게 되는.. 하지만 모두가 알았으면 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책이다. 사실 역사시간에 배우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단지 역사 속에 존재하는 있었던.. 그런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로만 기억되었던 것 같다.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 따위는 생각조차도 해본 적 없었다.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인데...

 

나혼자만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싸운게 아닌, 인간의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수많은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며.. 참 복잡했던 마음과 많은 걸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잊지 않을 께요.. 당신들을..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 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소년이 온다」中 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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